[세계의 스포츠 브랜드] ⑤ 저스트 두 잇, 나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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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스포츠 브랜드] ⑤ 저스트 두 잇, 나이키
  • 김서나 패션에디터
  • 승인 2020.05.2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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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로고와 슬로건 앞세워 대중 사로잡아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농구 시장 점령
다양한 스포츠 영역으로 확장하며 경쟁 브랜드 따돌려
로고와 슬로건을 내세운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브랜드로고와 슬로건을 내세운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오피니언뉴스=김서나 패션에디터] 스포츠 브랜드뿐만 아닌, 전세계 의류 브랜드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하며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나이키(Nike)’.

다른 글로벌 스포츠 기업들에 비해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나이키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엔 마케팅의 힘이 컸다.

세련된 카피와 영상의 광고 캠페인, 스타 플레이어들과의 스폰서쉽 등을 적극 활용하며 넓은 보폭으로 선두 기업들을 따라잡은 나이키는 격차를 벌리며 달려나가고 있다.

 

◆ 로고와 슬로건, 그리고 마이클 조던

미국 오리건 대학교의 육상 선수 출신으로 졸업 후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필 나이트(Phil Knight)는 육상부 시절 코치였던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과 의기투합해 운동화 사업을 준비했다.

독일의 '아디다스(Adidas)'가 주도하던 운동화 시장의 틈새를 파고 들기 위해, 일본 ‘아식스(Asics)’의 전신인 러닝화 브랜드 ‘오니츠카 타이거(Onitsuka Tiger)’를 우선 수입, 판매하기로 한 나이트와 바우어만은 1964년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영업에 나섰다.

트럭에 제품들을 싣고 대학 육상부들을 찾아 다니는 주먹구구식 방식이었지만 점차 주문량을 늘려가며 자신감을 얻은 나이트와 바우어만은 1971년부터 수입이 아닌, 직접 제작을 해보기로 하고 브랜드 리런칭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브랜드네임은 당시 1호 직원으로 합류해있던 필 나이트의 동문 친구 제프 존슨(Jeff Johnson)의 추천에 따라 그리스 신화속 '승리의 여신' 니케의 영어식 이름 ‘나이키’로 정했고, 브랜드 로고는 그래픽 디자인 전공 대학생 캐롤린 데이비슨(Carolyn Davidson)에 의뢰해 받은 후보 중 니케의 날개와 닮은 하나를 골랐다.

바로 현재까지 나이키의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스우쉬(Swoosh)’ 로고.

휙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의미인 ‘스우쉬’ 로고는 심플하면서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이키의 이미지를 대표했고, 최초의 자체제작 러닝화 ‘코르테즈(Cortez)’에 스우쉬를 장식해 시선을 끄는데 성공한 나이키는 와플 모양의 밑창으로 품질을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인지도를 높여갔다.

1976년부터 광고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브랜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동안 미국항공우주국(NASA) 출신 엔지니어와 함께 ‘에어 테크놀로지’를 개발한 나이키는 1980년엔 미국 운동화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러닝화 ‘테일윈드(Tailwind)’와 농구화 ‘에어 포스 1(Air Force 1)’으로 에어 시리즈를 이어가고 의류 라인도 전개하며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나이키는 에어로빅 열풍과 함께 급부상한 ‘리복(Reebok)’으로부터 일격을 맞았는데,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이다.

1985년부터 에어 테크놀로지를 적용한 조던의 시그니처 농구화 ‘에어 조던(Air Jordan)’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조던과의 시너지 효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나이키는 아디다스와 리복의 추격으로부터 달아났고, 에어 포켓이 보이게 밑창에 투명 창을 만든 '에어 맥스(Air Max)'로 다시 한 번 인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1988년 나이키 정신을 보여주는 슬로건,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 탄생했다.

간결하지만 도전적인 이 슬로건은 모두에게 능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메시지를 던져주며 나이키의 스포츠 세계로 발걸음이 향하도록 이끌었다. 1990년 나이키는 오리건 주 비버튼에 새로운 사옥을 세우고 첫 나이키타운 스토어를 열며 위용을 과시했다.

1999년 공동 창립자 바우어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성장을 거듭한 나이키는 현재 자회사로 독립시킨 ‘조던’ 브랜드와 2003년에 인수한 스니커즈 브랜드 ‘컨버스(Converse)’를 함께 전개하고 있다.

1980~90년대 에어 조던 광고 캠페인
1980~90년대 에어 조던 광고 캠페인

◆ 에어 조던에 이어 줌 코비 시리즈로 선두 지켜

에어 조던의 역사는 1984년 NBA(미국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된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며 시작되었다.

대학시절까지 아디다스를 즐겨 신었던 조던이었지만, 아디다스가 그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틈을 타 나이키는 조던과 다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며 신인왕을 거머쥔 조던에게 그의 이름을 딴 시그니처 슈즈 ‘에어 조던 1’을 만들어주었다.

이는 특정 선수의 이름을 내건 최초의 농구화로, 이때부터 시그니처 슈즈의 유무가 슈퍼스타인지 아닌지 판가름해주는 기준이 되었다.

조던이 날아올라 덩크하는 모습을 본떠서 에어 조던 시리즈만을 위한 ‘점프맨’ 로고도 만든 나이키는 매년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의 후속 모델들을 추가했고, 1987년부터 조던은 인세를 지급받는 나이키의 파트너로 동행했다.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가 화려하게 채워짐에 따라 에어 조던의 인기도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샤킬 오닐을 앞세운 리복의 위협도 막아낼 수 있었던 나이키. 1993년 아버지의 사망 사고로 충격을 받은 조던이 전격 은퇴 선언을 하고 야구 선수에 도전하자 ‘에어 조던 9’을 야구화로 다시 제작해주기도.

다행히 17개월만에 농구계로 복귀한 조던을 맞으며 나이키는 그의 농구 업적을 밑창에 새겨 넣은 ‘에어 조던 10’으로 환영했고, 조던이 한번씩 은퇴와 복귀를 다시 반복하고 결국 2003년 최종적으로 은퇴를 한 후에도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조던이 마지막 은퇴를 앞둔 무렵, 나이키는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를 만났다. 하지만 조던처럼 그의 데뷔부터 함께 한 건 아니었다.

대학 진학 대신 프로 직행을 선택했던 브라이언트는 1996년 LA 레이커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며 아디다스와 먼저 계약했다. 처음부터 주전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출장 시간을 늘려가던 그는 슬램 덩크 컨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고, 이후 급성장하며 조던의 뒤를 잇는 NBA 최고의 인기 선수로 등극했다. 그리고 아디다스와의 6년 계약이 마무리되자 그는 나이키와 손을 잡았다.

나이키에서 발표된 그의 첫 시그니처 농구화는 2005-6시즌에 등장한 ‘줌 코비(Zoom Kobe)’.

줌 코비 시리즈 중 로우컷으로 디자인을 변경하고 와이어로 발을 감싸준 ‘줌 코비 4’, 과감한 뱀피 무늬를 입힌 ‘줌 코비 6’, 그리고 아킬레스건 수술 후 복귀한 브라이언트를 위해 발목부분을 니트로 처리한 ‘줌 코비 9’이 특히 사랑을 받았다.

맹독을 가진 뱀을 뜻하는 별명 ‘블랙 맘바(Black Mamba)’로서의 20년을 마치는 그에게 2016년 특별한 시그니처 ‘코비 A.D.’로 경의를 표하기도 했던 나이키. 2020년 1월 26일 헬기 사고로 코비 브라이언트를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게 되면서 ‘Mamba Forever’ 영상으로 그를 추모했다.

현재 나이키와 조던 브랜드는 각자 별도로 스타 플레이어들의 시그니처 슈즈를 전개하고 있다. 2017년부터 나이키가 NBA 유니폼의 공식 후원 업체로도 나선 가운데 전 구단 중 샬럿 호네츠만이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호네츠의 구단주가 마이클 조던이기 때문.

호네츠는 30개 구단 중 유일하게 조던 브랜드의 점프맨 로고가 붙은 유니폼을 입는다.

은퇴하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위해 선보였던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은퇴하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위해 선보였던 나이키의 광고 캠페인

◆ 스타 마케팅의 위력으로 활동 무대 넓혀

빅 네임을 활용한 나이키의 마케팅 전략은 농구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오리건 대학 육상팀에서 시작된 역사인 만큼 같은 대학의 장거리 육상 스타 스티브 프리폰테인(Steve Prefontaine)이 나이키가 후원한 첫 선수였고, 프로 선수로는 테니스의 일리에 나스타세(Ilie Nastase)가 첫 후원 선수였다.

육상과 테니스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탑 플레이어들과 스폰서십을 계속 진행하며 넘버원 스포츠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간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농구계를 평정하면서 스타 마케팅의 위력을 실감했다. 1990년대 중반 아디다스가 장악하고 있던 축구 시장에도 같은 방식으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스널 FC의 파트너로서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발을 들인 나이키는 199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릭 칸토나(Eric Cantona)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재미있는 광고 시리즈로 축구팬들의 흥미를 끄는 데 일단 성공했다.

이후 티에리 앙리(Thierry Henry),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hristiano Ronaldo) 등을 간판 스타로 앞세우며 축구 브랜드로서의 경쟁력을 어필한 나이키는 세계적인 클럽, 국가대표팀들과의 계약을 늘려가며 아디다스의 아성을 흔드는 중이다.

현재 NBA와 미식축구리그, 메이저리그의 공식 스폰서를 모두 맡고 있는 나이키는 앞서 언급한 종목들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 종목의 관련용품들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타이거 우즈(Tiger Woods)와 함께 성장한 골프를 빼놓을 수 없다.

일찌감치 타이거 우즈를 주시하고 있던 필 나이트는 1996년 우즈가 프로에 입문하자마자 그를 나이키의 품 안으로 끌어오는데에 성공했다. 바로 다음해 우즈가 첫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유럽의 기성 세대를 꺾는 미국의 젊은 챔피언으로 추앙받자 나이키는 우즈의 빛나는 커리어를 따라 골프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부상과 스캔들로 우즈가 빛을 잃어가는 동안 나이키의 골프 사업은 다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계약을 유지하고 있었던 나이키는 지난해 우즈가 11년 만에 마스터스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오랜 의리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의 화려한 컴백을 환영하며 나이키가 선보인 광고 영상은 ‘저스트 두 잇’으로 마무리되었다.

타이거 우즈의 컴백을 기념하며 선보인 나이키의 광고 영상 캡쳐
타이거 우즈의 컴백을 기념하며 선보인 나이키의 광고 영상 캡쳐

셀럽들과의 콜라보레이션도 시도했던 나이키는 2010년대 초반 힙합 스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와 ‘에어 이지(Air Yeezy)’를 내놓아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로열티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결국 그와 헤어진 나이키는 아디다스와의 협업으로 더욱 거센 열풍을 일으키는 웨스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이키에겐 조던이 있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NBA 리그가 중단되자 미국 스포츠 채널 ESPN은 마이클 조던의 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를 방영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ESPN 다큐멘터리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조던의 여전한 인기를 입증한 것.

조던의 위닝 멘탈리티가 시간을 뛰어 넘어 나이키에게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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