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뿌리에 새겨진 왜인 호공(瓠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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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뿌리에 새겨진 왜인 호공(瓠公)의 흔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5.29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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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김 세 족단과 관계한 강력한 세력인듯…외교관에서 재상까지 역할

 

2,000년전 신라가 경주 고을에서 건국할 때 호공(瓠公)이란 왜인이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이다. 이 인물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한다.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조에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부른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이게 전부다. 성도 이름도 없다. 분명한 것은 왜인(倭人)이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는 그가 일본인임을 밝혀준 것이다.

호(匏)는 표주박을 말한다. 표주박은 물을 떠먹는 도구다. 아마도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물을 먹기 위해 표주박을 옆구리에 차고 온 듯 싶다.

 

호공은 신라 초대 혁거세에서 4대 탈해 임금까지 85년의 시차를 두고 등장한다. 처음엔 전권을 부여받은 외교관으로 등장하고, 탈해 때엔 대보(정승)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 왕실의 박, 석, 김의 3개 족단과 출발부터 모두 관계를 맺는다.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한 사람이 100년 가까이 살기란 불가능하므로, 호공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왜인 출신의 특정 일족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공이라 불린 왜인 집단은 신라가 경주에서 부족연맹으로 출발할 때 100여년의 기간을 두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선주민일 가능성이 크다.

 

▲ 호공의 집이 있었던 경주 월성터 /문화재청

 

역사의 기록을 들여다 보자.

 

① 박혁거세 38년(기원전 20) 봄 2월,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예방케 했는데,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호공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분(혁거세와 알영)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람은 바르게 되고 하늘은 온화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ㆍ낙랑ㆍ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임금께서 겸허하게 저를 보내어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과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노하여 힘으로 핍박하시니, 이는 어떤 의도입니까?”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가까운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자 겨우 호공의 귀국을 허락했다.

 

② 탈해는 양산(楊山) 아래에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보고 그곳이 좋은 집터라고 여기고 꾀를 써서 얻어 살았는데, 이 땅은 뒷날 월성(月城)터가 되었다.

탈해는 토함산(吐含山) 위에 무덤처럼 생긴 집을 만들고 그곳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지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가 보였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곧바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는 속임수를 써서 그 집 곁에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집에 가서 말하였다.

“이 집은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아니라고 다투었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관청에 고발했더니, 관청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은 원래 대장장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가 있는 동안 저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땅을 파서 조사해보면 아실 겁니다.”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그래서 아이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남해왕(南解王)은 탈해(脫解)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고,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③ 탈해는 즉위 2년(서기 58)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탈해 9년(서기 65) 봄 3월, 임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아뢰자,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뛰어났다. 임금이 기뻐하며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자라나자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니,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했다. 금빛이 나는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씨라고 했다.

 

▲ 호공이 알지의 탄생을 발견한 경주 계림 /문화재청

 

가뜩이나 사료가 부족한 우리 고대사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 정도의 분량이 정리됐다면, 호공은 대단한 인물, 또는 족속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그의 역할은 초대 임금 혁거세의 특사 역할이다. 당시 마한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강한 연맹체였다. 호공이 혁거세의 명을 받고 특사로 파견된 이유는 마한왕이 조공을 시비 걸었다는 점에서 대국과 소국의 위상정립이라는 동양 고대외교의 가장 큰 현안을 해결하러 간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전권을 갖고 파견되었다면, 호공은 박씨 세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커다란 알이 박(匏, 조롱박)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사람들이 혁거세의 성을 ‘박(朴)’이라고 했다고 한다. 조롱박과 표주박의 차이, 큰 박과 작은 박의 차이다.

호공의 집이 양산((楊山)이고, 혁거세가 태어난 곳도 양산이다. 혁거세의 박씨 부족과 호공족이 신라 초기에 강력한 연대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2대 남해왕 때에 해상세력인 탈해가 가야를 거쳐 신라에 들어온다. 처음엔 탈해와 호공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두 사서엔 탈해가 사기꾼으로 표현되지만, 실제는 상당한 무력을 지닌 해상 세력으로서, 신라에 진입해 위압적으로 호공족의 재산을 약탈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웃기는 장면이 나온다.

박씨 세력이 호공에게 우호적이었다가 바로 배신을 때린다. 박씨인 남해왕은 호공의 재산을 지켜주기는커녕 약탈자인 탈해에게 딸을 주어 최고 정승자리인 대보로 삼는다. 박씨 세력이 석씨 세력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탈해가 숯과 숯돌을 이용했다는 것은 철기를 가진 종족이고 상당히 강력한 무기를 소유했음을 알수 있다.

 

박씨에게 배신당한 호공은 왕따가 된다. 하지만 역전이 발생한다. 탈해가 4대 임금이 되면서 이듬해 호공을 최고정승자리인 대보로 임명한다. 아마도 호공의 무리들이 박씨에게 밀려나 석씨에게 붙은 것이다. 호공은 권력의 변화에 민감했다고 보여진다.

탈해 임금 때에 김알지의 탄생신화에도 호공이 등장한다. 김씨 족단은 흉노족으로 만주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공이 김씨 세력과도 연계를 맺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엔 탈해왕이 시켜 호공이 계림으로 가서 알지의 도래를 알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선 호공이 월성 서쪽 마을(계림)을 가다가 수풀에서 알지를 발견하고 탈해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호공이 신흥 김씨 세력를 끌어들여 석씨세력과의 연대를 도모했다고 보면 무리일까.

탈해는 알지(김씨)에게 임금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만, 알지는 박씨인 파사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삼국유사」는 설명한다. 석씨와 김씨가 연대했지만, 다시 박씨 왕조로 바뀌게 된다.

호공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박·석·김의 세 지배집단은 서로 정권을 바꿔가며 신라 천년 역사를 새긴다. 하지만 신라 건국초기 100년 동안 세 족단을 오가며 권력집단을 형성했던 호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박씨 족단이 재집권할 때(파사) 석씨와 김씨에 붙었다가 소멸한 것일까.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기로 하자.

 

탈해에게 빼앗긴 호공의 집터는 그후 신라의 궁궐이 되었다. 월성(月城)이다.

파사왕이 다시 박씨 정권을 세우고, 석탈해가 빼앗은 집의 터에 궁궐을 지었다. 탈해가 빼앗은 호공의 집을 박씨들이 다시 빼앗았다는 얘기다.

월성은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호공이 살던 그 집터에서 신라 천년의 토대가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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