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②…패장의 원통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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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②…패장의 원통한 운명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0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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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국 왕 살해의 패착…동·서양 운명을 가른 탈라스 전투 패배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온다는 뜻으로, 16세기 이래 유럽이 아시아 국가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서세동점은 8세기에도 있었다. 그때 서쪽 세력은 이슬람이었다.

622년 예언자 무하마드는 성전(헤지라)을 선포하고 한손엔 코란을, 다른 한손엔 칼을 들고 무력 정복에 나서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한다. 무하마드가 죽고 그의 후계자(칼리프)들이 이슬람의 최고 통치자가 되어 중동과 동로마제국, 북아프리카, 페르시아로 이슬람의 영토를 확장했다. 661년 칼리프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왕조가 등장하고, 750년 압바스 왕조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다.

압바스 왕조는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놓고 중국의 당(唐)나라와 패권 경쟁을 벌였다. 19~20세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였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1,000년 전에 압바스왕조와 당나라 사이에도 벌어졌던 것이다.

 

1차전은 당나라의 승리. 751년 1월, 고구려 유민의 후손 고선지(高仙芝) 장군은 비단길을 따라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원정에 나서 그곳의 석국(石國) 왕과 그 북쪽에 있던 튀르기시 카간의 항복을 받았다.

고선지의 세차례 원정을 통해 당나라는 중앙아시아 팽창의 정점을 이뤘다. 고선지는 중국 신강성 타림분지와 지금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인 일리 분지, 키르키스스탄의 이식쿨, 아프카니스탄의 쿤두즈와 카불, 파키스탄 북부의 카시미르의 보호자였다. 쿠차에 본영을 둔 고선지는 사실상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중국 총독이었다.

 

▲ 탈라스 전투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 /위키피디아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무너지고 말았다. 포로로 잡힌 석국왕이 살해된 것이다.

석국 투둔(tudun, 왕)의 이름은 차비시(車鼻施)로 기록되어 있다. 고선지가 타슈켄트로 입성하자, 차비시는 항복을 청하고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 안서절도사 고선지는 당나라를 배반한 차비시를 꾸짖고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보냈는데, 당 조정에서 차비시의 목을 벤 것이다.

고선지는 탐욕스러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석국을 토벌한후 슬슬(瑟瑟)이라는 보석 10여곡(斛), 황금 등을 5~6마리의 낙타에 실어 가져왔으며, 명마(名馬)와 보옥(寶玉)도 매우 많이 가져왔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일종의 약탈이다. 이런 보화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타슈켄트의 석국 왕실을 털었던 것이다.

게다가 군주의 목을 베었으니, 서역이 발칵 뒤집혔다. 당나라는 그동안 정벌한 나라의 군왕을 살려두었다. 장안 또는 낙양으로 압송해 전승을 기념하지만, 궁궐을 숙위한다거나 현지 지방직에 봉해 패전국의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막았다.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도 그런 대우를 받았고, 파미르 남쪽의 소발률국 국왕도 살려 두었다.

하지만 당 조정은 석국의 투둔 차비시를 살해했다. 국내 사학자 이덕일은 저서 「장군과 제왕」에서 양귀비와 그의 일족에 현혹되어 있던 황제 현종의 조정이 잘못했다고 지적했지만,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저자 르네 그루쎄는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서역의 반발을 초래했다고 썼다.

어쨌든 고선지는 여러차례 원정의 성공으로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정점에 있을 때 가장 위험스런 독소는 자만이다. 고선지는 석국 왕의 재산을 몰수하고, 피정복자를 무례하게 대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궁궐이 약탈당하고 부왕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석국의 왕자는 분개했다. 그는 대식(大食), 곧 압바스 왕조가 지배하는 사라센으로 도망쳤다. 석국 왕자는 서역의 여러나라에 사신을 보내 반당(反唐) 궐기를 호소했다.

석국 왕자의 호소에 당나라를 복수하기 위한 서역제국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압바스 왕조가 주력군을 보내고, 주변의 서역 국가들이 동조했다. 고선지도 급히 한족 군대와 당에 충성하는 서역 부족을 모아 대항군을 조직했다.

고선지는 군대를 이끌고 안서도호부의 치소인 쿠차를 떠났다. 그는 비단길(Silk Road)를 따라 서진하다가 천산산맥을 지나 북상했다. 목적지는 탈라(Talas). 지금 키르키스스탄 서부 탈라스주의 주도로, 탈라스강이 흐른다.

751년 7월 두 군대는 탈라스 강가에서 대치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의 병력수는 2만4,000에서 6~7만까지 다양하다.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2만 정도로 본다. 이슬람 연합군의 수는 과장해서 20만이라고 한다. 압바스측 숫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압바스 군대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고선지는 서역을 세차례 정벌해 성공한 명장이었다. 하지만 석국왕을 죽인 것이 큰 실수였다. 당군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바로 투르크족 계열의 카르룩((葛邏祿, Karluk)이었다. 게다가 발한나(拔汗那)도 배신했다. 서역의 민족들이 대거 당의 복속에서 이탈한 것이다.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대치할 때 약소민족은 누가 이길 것인지에 목숨을 건다. 신흥 이슬람세력이냐, 기존의 지배자 중국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역인들은 대거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족으로 지지를 돌린 것이다.

전투의 향방은 결정되었다. 전방에 있던 발한나가 돌아서고, 후방의 카르룩이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이역 멀리서 고선지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대참패였다. 아랍측 자료에 따르면 당나라 7만 군사중 5만이 전사하고 2만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패장은 말이 없다.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후 안서절도사 자리에서 물러나 하서절도사라는 이름 없는 보직으로 밀려났다.

 

▲ 탈라스 전투도 /위키피디아

 

탈라스의 패전으로 당나라의 서역 지배권은 붕괴되었다. 넓이로는 중국 한족의 거주지역보다 넓은 곳이 떨어져 나가 독립하거나 압바스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동양사학자 바실리 바르톨트(Vasilii Vladimirovich Bartol’d)는 “이 역사적인 날이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이슬람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 중국 제지술 /위키피디아

당시 당나라의 황제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있었고, 정무는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楊國忠)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곧이어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한다. 만일 현종이 정치를 안정시켜 내란을 미연에 방지했다면 서역의 넓은 땅이 다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탈라스 전투는 고선지와 당나라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당대 최대 선진국이었던 중국의 문물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패전한 일본이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처럼…. 그것은 제지술과 나침반의 원리였다.

아랍장군 지야드 이븐 살리흐는 수천명의 당나라 포로들을 사마르칸트로 데려갔는데, 이들 중에는 당나라의 선진기술을 가진 고급기술자와 지식인이 있었다. 이들에 의해 제지술과 나침반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고선지에겐 또한번의 기회가 왔다. 755년 절도사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당의 수도 낙양을 점거하고 장안으로 향했다. 당 현종은 탈라스에서 패해 한직을 떠돌던 고선지에게 토벌군 부원수로 임명했다. 토벌군 원수는 황족이므로, 고선지가 사실상 사령관을 맡은 셈이다.

고선지는 당의 동도(東都)인 낙양과 서도인 장안 사이 동관(潼關)이라는 협곡을 지켰다. 안록산의 반란군이 동관을 공격할 때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공세를 취할 요량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고선지를 늘상 따라 다니던 감군 변영성(邊令誠)이 모함했다. 환관 출신의 변영성은 고선지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자주했는데, 고선지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변영성은 고선지가 주둔지인 섬주(陝州)를 떠나 임의로 동관으로 이동해 피해를 입혔다고 현종에게 과장해서 밀고했다. 판단력이 흐릿해져 있던 황제는 고선지에게 참형(斬刑)을 처하라고 명했다. 고선지는 억울하게 죽었다.

중국 민간고사에 중국 역사 10대 원장(寃將)이 있는데, 고선지는 그 10명에 들어간다. 원장이란 원통(寃痛)하게 죽은 장수를 말한다. 이 10대 원장에는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장수들이 많다. 한고조 유방에게 죽임을 당한 한신(韓信),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 이목, 몽염, 팽월, 고영, 원승환, 단도제, 수아부, 그리고 고선지다. 10명중 9명이 한족이지만, 고구려 후손이 포함됐다. 한족 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에게도 고선지는 억울하게 죽은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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