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발견] 2. 인연과(因緣果) 인식 선택
상태바
[붓다의 발견] 2. 인연과(因緣果) 인식 선택
  • 주우(宙宇)
  • 승인 2018.02.28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과因果란 원인原因을 놓으면 자연적으로 결과結果가 따라온다는 말이다. 대다수 우리는 현실에서 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일부 사람들은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되게 하려고 조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결과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세상 자체가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땅에서 어찌해서든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면서 이기적 행태를 보이는 삼성이라는 초(헌)법적 집단을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한 원인에 대한 사회적 귀결을 회피해왔지만, 상당기간 엄청난 노력으로 쌓아온(현혹해온)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린 메르스 사태를 통해서 우주적 귀결은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사회가 어찌하지 못하는 어떤 교만한 개인이나 단체도 결국 참담한 우주적 귀결을 맞이하고 만다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이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삼성에는 축복이다.

이렇듯 이 우주에서는 각자 믿음 ․ 생각 ․ 말 ․ 행동이라는 원인을 선택할 수 있으나, 관여 ‧ 제어 ‧ 조작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결과를 뜻대로 선택할 수 없다. 왜냐면 현실에서는 자신이 놓은 원인因에 대한 진짜 결과果가 주어지기 전에 일정한 과정緣을 통해서 잘못된 원인을 없앨 기회를 제공하고, 결과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 ‧ 공간을 달리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因~연緣~과果의 방식으로 작동되는 현실의 삶은 외관상 부조리한 듯 보이나 틀림없이 어떤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직감한다.

특히 인과의 과정이 화학반응처럼 짧지 않고, 때로는 다른 생으로 이어지기도 하므로 언제 어떤 식으로 귀결이 올지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진짜로 결과가 오는지조차 알아채기가 어렵다.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3차원 시간이 아니라 과거 ․ 현재 ․ 미래가 공존해서 원인 ‧ 결과가 동시에 존재하는 4차원적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로 ‘인과율因果律’이라 한다.

우주에서 당연하게 작용하고 있는 중력重力을 물리학에서 알아보기가 어렵다고 하듯이 삼계에서 당연하게 작동하는 인과율도 인간사에서 알아보기가 어렵다. 특정 법칙이 확실히 작동하고 있으나 때때로 벌어지는 부조리한 (듯한) 현상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인과가 없다고 여기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이를테면 신神이 있다면 자신에게 특정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여기거나 우기고 싶은 이들이다. 심지어 일부 불자佛子도 경전을 내세워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인과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과방식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기르는 과정을 거쳐서 맺어진 결실을 보듯이, 인간사도 인간이 원인을 제공하고 그다음 펼쳐지는 현상에 대해 선택하는 과정을 거쳐서 고착된 현실인 귀결을 맞이한다. 콩을 심어서 콩을 얻고, 팥을 뿌려서 팥을 거두며, 도토리가 자라서 떡갈나무가 된다. 원인 ‧ 과정에서 생각 ‧ 말 ‧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나 현실로 주어지는 결과를 선택할 자유가 없는 인과율이다.

인hetu因~연paccaya緣~과phala果 도식화해보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원인이 (선택의 기회라는) 과정을 거쳐서 (주어지는) 결과가 되고, 이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식으로 순환한다. ~원인⇒과정⇒결과∽원인⇒과정~ 이렇게 순환하므로 각자 자신에게 지금 벌어지는 어떤 상황이든 특정 흐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다. 벌어지는 어떤 인간사도 인因~연緣~과果 중 어디에선가 인과율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진행 중인 셈이다.

다만 연극이 3막으로 구성되듯이 인생도 3막인 원인 ‧ 과정 ‧ 결과로 구성된 프로젝트가 각각의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당히 복잡하게 작동한다. 이 복잡한 우주의 인과현상을 간결한 방식으로 설명한 분이 바로 붓다다.

업인業因과 과보果報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반야paññā般若이며, 특정 사건이나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사띠sati念고, 인과因果의 과정 중에서 우주가 인간에게 제시하는 조언이 담마dhamma法다. 이 인과因果의 과정에 제시되는 현상이 흘러가는 공식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인因~연緣~과果라는 기초를 제대로 잘 이해해야 붓다의 다양한 설명을 따라잡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 한 편마다 인과因果를 통으로 보여주는 이가 김기덕 감독이다. 끝을 알고 귀결을 봄으로써 인과 메커니즘이 보인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선택한 원인이 초래할 귀결을 맞닥뜨린다는 것은 의식적으로는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점을 터득하고자 이 세상에 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숙제를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는 인因~연緣도 하나의 인과因果로 연緣~과果도 하나의 인과因果로 볼 수도 있으나 인因~연緣~과果 이렇게 통으로 보아야 실수를 교정할 기회라는 선택의 메커니즘을 놓치지 않게 된다. 인과因果만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놓은 원인 그대로 주어질 결과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경(A3:99)에 “누가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면 청정하게 살아서 괴로움을 종식할 기회가 설정되지 않으나, ‘어떤 사람의 행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응한 귀결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면 청정하게 살아서 제대로 괴로움을 종식할 기회가 설정된다.”고 한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자신과 상대의 감정을 직면함으로써 개선할 기회를 맞이한다.

우주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벌주거나 잘했다고 상을 주지 않고 일정 유예기간을 두고서 잘못을 개선하고 선행을 유지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시세로만 주식의 가치가 평가되지 않듯이 사람도 한순간의 선택만으로 평가된다면 불합리하다. 이는 존재상태가 단기간에 파악되기 어렵고 장기간의 선택과정을 통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정을 통한 기회 제공이라는 인因~연緣~과果 메커니즘의 대표적 실례가 바로 연기緣起이다. 어쩌면 인과법칙에 의해 드러나는 현실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 다만 연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선 인과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인 세간을 지어내고 괴로움을 쌓아가는 것에서 시작해본다.

경(S12:39)에 ‘어떤 것이든지 생각하거나ceteti 생각하지 않든, 계획하거나pakappeti 계획하지 않을지라도 잠재시키는anuseti 이런 존재상태ārammaṇa는 식識이 머물게ṭhitiyā 하고, 이 상태에 있으므로 식識이 확립되게 한다. 그곳에 식識이 확립되어 증장virūlha할 때 명색名色이 전개하게avakkanti 된다.’고 한다. 여기서 존재상태란 의식해서 생각하거나 계획하는 외적 태도가 아니라 실제 되어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의식적인 계획보다 존재상태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현상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현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생각보다 존재상태(됨됨이)를 바꿔야 도움된다. 그럼에도 본질本質인 존재상태를 알아보려면 말단末端인 현상에서 도움받아야 한다.

 

▷ārammaṇa존재상태

존재됨됨이(beingness)를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모습이 대상을 통해 거울로 비춰줄 때, 대상에 의지攀緣해 나타나는 주체의 존재상태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학문이나 종교, 철학, 교육, 역사, 심리학, 도덕, 그리고 예술조차 외부의 현상인 연緣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존재상태인 인因을 바꾸라는 담마dhamma法가 들어있다. 대상(상대방)을 바꾸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하나(필요에 따라선 배후조종하기도 해야 하나) 자신을 바꾸려 한다면 자신만 결단해도 된다. 전자는 자기 뜻대로 하기 어려우나 후자는 뜻대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S12:44)에 ‘세간世間은 안眼{~심心}과 색色{~법法}을 조건으로paṭicca 안식眼識{~심식心識}이 펼쳐지고, 이 세 가지가 만나서saṅgati 촉觸이, 촉을 연緣한 수受, 수를 연緣한 애愛, 애를 연緣한 취取, 취를 연緣한 유有, 유를 연緣한 생生, 생을 연한 늙음 ‧ 죽음 슬픔 ‧ 비탄 ‧ 고통 ‧ 원망 ‧ 절망이 형성되는 것이 세간의 집기이다. 그리고 이런 애愛가 환멸해야 취取가 환멸하고, 취가 환멸해야 유有가 환멸하고, 유가 환멸해야 생生이 환멸하고, 생이 환멸해야 늙음 ‧ 죽음 슬픔 ‧ 비탄 ‧ 고통 ‧ 원망 ‧ 절망인 고온苦蘊이 환멸하며, 이것이 세간의 의역意易이다’고 한다.

 

▷atthaṅgama의역意易

환멸nirodha처럼 현상에서 의미를 얻으면 현상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attha意+gama去로 ‘의미가 가므로 의미가 바뀐다’로 보아서 의역이라고 하겠다.

 

자신의 외부에 나타난 대상에 대해 자신과 관련짓지 않는다면, 연기緣起에서는 대상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명색 상태라고 한다. 이런 존재상태라면 연기에서는 자신이 명색名色의 조건인 식識에 관련해서 문제가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식과 명색 사이를 살펴볼 수 있는 제식연기齊識緣起를 알아본다.

경(S12:59)에 ‘족쇄saṁyojana가 되는 현상에서 유혹을 본다면 식識이 전개되고 식을 연緣하여 명색이 육장六場⇒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슬픔 ‧ 비탄 ‧ 고통 ‧ 원망 ‧ 절망이 형성되고, 이 모든 고온이 집기集起한다. 그러나 그 현상에서 위험을 본다면 식識이 전개되지 않고 결국 고온苦蘊이 환멸還滅하게 된다’고 한다.

경(S12:65)에 “내가 깨닫기 전에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태어나 늙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이런 괴로움에서 팔정도를 통해서 벗어날 수 있음을 반야로써 보지 못한다. 명색名色⇒식識⇒명색名色⇒육장六場⇒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슬픔 ‧ 비탄 ‧ 고통 ‧ 원망 ‧ 절망이란 고온苦蘊이 집기 ‧ 환멸하며, 이 식識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는 명색을 넘어가지 못한다.’”며 제식연기에 대해서 언급한다.

경(S12:67)에 ‘명색名色과 식識의 관계를 서로 의존하는 두 개의 갈대 다발을 비유하면서, 이 둘은 자신이 만드는 것도 남이 만드는 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도 아니며 서로 조건으로 해서 생긴다’고 하고, 경(D15)에서 ‘식과 명색은 서로 원인 ‧ 인연 ‧ 집기 ‧ 조건이다’고 한다.

먼저 여기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에 주목해보면, ‘명색名色⦶⇒식識⇒명색名色⦷’이라는 제식연기는 붓다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던 관점이고, ‘무명無明⇒위爲⇒식識⇒명색名色’이라는 12연기는 깨달았을 때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제식연기의 명색名色⦶은 12연기의 ‘무명無明+위爲’에 해당한다. 즉 명색名色⦶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지한 무명상태에서 의식하지 못하고 지어낸爲 상황이므로 자신과 상황을 연결해서 자신이 이 상황을 만들어냈는지를 깨닫기가 어렵다.

경(A3:61)에 ‘6계界에 집착할 때 입태入胎가 있고, 입태가 있을 때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을 연緣한 6장場이, 6장을 연緣한 6촉장觸場이, 6촉장을 연緣한 수受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 ‧ 공간空 ‧ 식識인 6계가 명색⦶에, 입태入胎가 식識에 해당한다. ‘6계界에의 집착’ = ‘무명無明+위爲’ = ‘명색名色⦶’ 이다.

 

깨닫지 못했을 때: 오로誤路, 무의식의 삶, 제식연기의 일체유심조

깨닫게 되었을 때: 정로正路, 의식하는 삶, 십이연기의 사성제四聖諦

 

20쪽의 도표를 참고해보면,

 

 

위의 도표에서 A의 과정이 왜 벌어지는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흐름이 ‘제식연기’이지만, 그 이유를 통찰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흐름이 12연기이다. 즉 깨달은 수행자는 12연기의 무명상태 때문에 위爲를 거쳐서 식識에 의해 명색상태가 주어진다는 점을 알지만, 일반 사람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자신이 과거에 선택한 원인hetu因에 의해서 주어진 현재의 존재상태 때문에 펼쳐지고, 그 현상이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기회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식識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는 명색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도, 펼쳐진 현상이 깨달은 이의 안목에선 명백히 명색을 넘어서 무명 때문에 위爲(12연기의 두 번째)가 지어내서 식識이 따른 현상임을 알아보지만, 깨닫지 못한 눈으로는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상에서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고 현상에만 집착해서 묶여있는 범부의 모습을 일러준다. 즉 보통 사람은 현상과 현실을 접해도 자신과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명색名色⇨식識⇨명색名色⇨육장六場⇨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제식연기를 도식화하면,

 

 

이 도표와 앞의 도표를 합해서 명색名色과 식識 사이를 설명해본다면,

 

 

씨앗을 뿌려야 줄기와 잎이 나오듯이, 원인이 있어야 과정이 있듯이, 보이지 않는 존재상태에서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듯이 실상에서는 ‘A’가 선행하는 것이 사실이나 우리는 현상을 인지하는 ‘P’에 주로 매몰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것은 외부 세계는 자신의 해석(‘P’)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믿음에 따라 외부 세계를 구성(‘A’)한다는 의미에서 소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일체유심조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해석에 따라서 개인의 진실이 되고, 또 그것이 시차를 두고 외부 상황을 구성한다’는 양면성을 지닌 말이다.

이 ‘A’의 메커니즘을 심리학에서는 ‘투사投射’projection라고 하고,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노자의 발견 1장 참고)이라고 해서 자신의 됨됨이(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가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했으며, 칸트는 외부의 경험을 인간의 이성이 구성한다고 했고, 수운水雲 선생은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했으며,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대상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고, 자기성취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한다. 이 메커니즘은 ‘같은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며, 현상으로 드러나기 전에 마음속에서 먼저 구성된다는 ‘모든 것이 두 번 구성된다’는 원리고, ‘입살이 보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며, 소위 끌어들임의 법칙이다.

그래서 ‘존재상태’에서 ‘현상’으로 즉 식識에서 명색상태를 탄생시키는 ‘A’의 메커니즘 그리고 ‘현상’에서 고착된 ‘현실’로 즉 유有에서 생生을 낳는 ‘B’의 메커니즘은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게 하는 일종의 재생연결paṭisandhi인 셈이다.

‘존재상태’는 특정 상황 때문에 성질난 상태고, ‘현상’은 특정 계기를 통해 성질내는 상태며, 전화기를 부순 ‘현실’은 원하지 않았던 특정 상황으로 귀결된 상태다. 즉 상대방이 자신으로 하여금 성질 내도록 하는 것은, 이전에 벌어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성질나 있는 자신의 상태’ 때문에 펼쳐진다.

 

현상은 이전의 자기 존재상태를 원인으로 펼쳐진다.

 

이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체득해야 일반인에서 수행자로 가기 위한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또 현실 생활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인 사념처 ‧ 사성제 ‧ 연기가 이해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저런 지식으로 머리만 무거워지고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용하지 못한 40년 불교학자뿐만 아니라 박식하나 투사投射를 실생활에 이끌어내지 못한 심리학자도 배우자 덕에 고통받는다.

우리는 자신이 접하는 세간에서 (변화의 여지가 있는 과정인) 현상과 (변화의 여지가 없도록 고착된) 현실을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밥을 짓는 것으로 비유해본다면, 쌀을 씻고 밥솥에 넣어 물을 조절하며 불을 켠 다음 물이 끓으면 불의 세기를 조절해서 넘치지 않도록 하고 적절한 때에 이르러 뜸을 들이는 것이 바로 과정이라는 현상인 셈이다. 그리고 밥이 다 된 것이 결과라는 현실이다. 물론 결과를 좌우하는 요인인 쌀 ‧ 솥 ‧ 불 ‧ 물의 상태(원인)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묵은 쌀인지 햅쌀인지 혹 현미나 햇빛에 말린 쌀인지도(이런 경우는 몇 시간 불려서 해야 함) 고려해야 하고, 솥(가마솥, 양은, 전기밥솥, 압력솥,,,)과 불(가스, 연탄불, 장작, 풍로, 인덕션렌지,,,)의 상태도 참작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인이나 과정은 선택할 수 있으나 일단 결과가 주어지면 어찌해보기가 어렵다. 정리해보면 쌀과 물, 불, 솥의 상태가 ㊀, 물과 불 시간의 조절과정이 ㊁, 밥이 되어버린 결과가 ㊂이다. 우리의 인생살이인 이것이 연기緣起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산길을 가던 나그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여인이 홀로 사는 산중의 낡은 절 옆집에 묵게 되었다. 잠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서 “나는 얼마 전 너의 화살에 죽은 뱀의 아내다”며 원수를 갚으려고 나그네를 공격하면서 “이 절의 종이 울리면 널 살려주겠다”고 한다. 그때 그는 꿩을 공격하는 구렁이를 활로 쏴죽여서 구해주었던㊀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었던 그는 목숨을 포기㊁했는데, 돌연 종이 두 번이나 울리자 뱀은 사라지고 난 다음 그곳에 가보니 꿩 두 마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출가㊂하게 된 절이 바로 상원사다. 그 뒤로는 꿩 치雉의 치악산雉岳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의 업이나 자신의 서원誓願㊀에 의해서 현재의 현상㊁이 벌어지며, 그것에 대한 반응㊁에 따라 현실㊂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소한 선행{악행}일지라도 그 활동에서 곧바로 대가를 기대하기보다 지금보다 상승{하락}한 존재상태가 될 기회를 맞이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칸트가 말한 바로는 우리는 세상을 손수 만들어내는 창조자가 아니라 창조된 것들을 재료로 현실을 구성해가는 건축가이다.

다만 점점 고통스러운 세상을 구성해가는 오로micchāpaṭipadā誤路도 있으며, 점점 아름다운 세상을 구성하는 정로sammāpaṭipadā正路도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