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이 이순신 되어 쓴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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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이 이순신 되어 쓴 난중일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27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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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이순신의 실존적 고뇌’…인간의 고뇌와 칼의 울음을 표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분이 너무나 나약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일기장은 자신의 기록이다. 후세가 성웅(聖雄)으로 받들던 분이 일기장에서 드러낸 모습은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속내들 들어내지 않았다. 늘 아프다. 어머니와 아들 생각에 젖어 있는, 주변에서 쉽게 보는 한사람의 가장이었다.

이 분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고, 이 민족을 구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을수 없던 차에, 김훈의 「칼의 노래」가 그 궁금증과 공백을 메워줬다.

「칼의 노래」는 김훈 자신이 이순신이 되어 쓴 일기장이다. 그래서 소설이다. 이순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터인데, 김훈은 아마도 이순신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소설에 드러냈다.

「칼의 노래」는 김훈이 언론사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때려 치우고 2001년에 쓴 소설이다. 출판사 ‘생각의나무’.

부제가 재미있다. ‘이순신,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고 김훈이 붙여놓았다. 이순신의 인간적 단순함과 칼을 써야 하는 애국심을 소설에 집약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터에 나가면 장군이나 졸병 모두가 살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김훈은 이순신이 죽기 위해 싸우는 것으로 그렸다. 작가는 이순신이 마지막 싸움터인 노량해전에 나가면서 죽기를 결심했다고 그렸다. 김훈이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적, 민족적 영웅이 죽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는 설정, 소설가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 김훈의 ‘칼의 노래’ 사진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연필을 엄청 꾹꾹 눌러 쓴 것 같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 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기라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 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소설은 이순신이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소임을 원균에게 넘겨 주고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정유년(1597) 4월 초하룻날 풀려나 백의종군을 하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원균의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고, 이순신이 삼도수군의 지휘권을 다시 잡는다. 이순신은 외로이 싸우다가 무술년(1598)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김훈은 그 싸움의 과정에 사무쳐 있는 칼의 고뇌와 울음을 현대적인 어휘로 표현했다. 날카로운 칼의 모습을 통해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무장으로서의 고뇌와 죽음에 대한 사유 등이 묻어 나온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게 흥미롭다. 김훈이 이순신의 생각 속에 들어가 스토리를 풀어나갔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김훈인지, 이순신인지 착각하게 된다. 1인칭 시점에서 전투 전후의 심정,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권력의 덧없음과 폭력성 등을 그려냈다.

 

책이 출판된 2001년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20세기 이후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만을 선정 출판하는 ‘전세계 문학총서’로 번역 소개되었다고 한다.

 

▲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문화재청

 

무장이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인간 이순신이 겪었을 인간적인 고뇌에 작가의 생각이 가 있다. 선조의 실정에 의한 불안, 강대국인 명의 비위를 맞추며 나라를 지켜내야 하는 약소국의 한계, 가장으로서 가족을 구하지 못한 슬픔 등이 세세하게 드러난다. 전쟁 서사는 아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무너지는 자신을 끝없이 일으켜 세워야만 했던 장군의 고독하고 불안한 내면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무장 이순신의 실존적 고뇌’로 집약된다.

 

▲ 이순신 관련 고문서-증직교지, 선조가 1604년 이순신을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1등으로 책봉한 교지. /문화재청

 

난세의 무장 이순신에게 칼이란 무엇인가. 이순신의 검명(劍名)은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다. ‘한 번 들어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의미다. 이 문장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탐관오리들, 정치적인 실리만을 구하고 전장을 외면한 명나라 장수들, 그리고 뒤엉켜 있는 세상과 자신을 옭죄고 있는 모든 상황을 벨 수 없어 속으로 울던 이순신의 칼이 향한 곳이 바로 적진이라고 작가는 해석했다.

죽을 곳을 찾아가는 영웅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구도는 마치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사즉생 생즉사)이라는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처럼 역설적이다.

 

▲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제113호) /문화재청

 

1598년 8월 17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왜놈들은 철군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달아나는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다.

이순신은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순국했다. (1598년 11월 19일)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했다. 향년 54세.

마지막 격전에서 일본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척만이 남해로 달아났다. 이로써 일본은 전의를 잃고 7년을 끈 왜란이 종식되었다. 이순신의 순국후 선조는 은공을 기려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했고,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 1576년 3월에 이순신이 무과 병과에 급제한 홍패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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