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1문단③…一析三極 無盡 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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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1문단③…一析三極 無盡 本
  • 주우(宙宇)
  • 승인 2018.02.0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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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상태가 ‘一’에서 ‘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못하고 단지 조금 변형된 一′가 되고, 이와 같은 과정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태어나기 전에 이번 생에서 터득하겠다고 기획한 삶(인생공부, 이데아)이 있는데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고, 깨달을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바로 無盡이라고 합니다.

 

무진장(無盡藏) 반복한다 할 때의 無盡이군요.

내 존재 상태에 의해 天地人 3極이 펼쳐준 내 현실인 외부현상에서 계속 나와 상관없다고 가르면 계속, 즉 무진장 반복한다. 그것도 점점 더 악화하는 현상으로라고요. 음! 어렵지만 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저에게 무진 반복되는 현상이 있어요. 그것도 최근에 집중적으로 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실로요.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는 거지다!’ 입니다.

두 달 전 아파트 분리수거 장소에서 옷을 주워 입고 음식을 주워 먹는 공공근로 하는 할머니를 만나 자식들 이야기며 박스를 주워 모은 돈 4,000만 원 넘게 있다는 등 이야기를 들었죠.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할머니를 흉보면서 집도, 모아놓은 돈도 있으며 때마다 노인 수당에다 공공근로 부업 등으로 돈이 들어오는 데도 아까워서 안 쓰고 그깟 몇 푼 아낀다고 거지처럼 주워 먹다니 쯧쯧 안쓰럽다는 생각에 혀를 찼어요.

어~ 그런데 우연은 없다는데 그 할머니가 왜 나타났을까? 고민했지만 잘 몰랐어요. 그리곤 며칠 후 그 할머니의 모습이 저의 그림자라는 피드백을 듣고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아~ 내게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거지다. 그럼 그 거지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건데, 에이 내가 무슨 거지야! 말도 안 돼. 바로 무시했죠.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요즘 내 앞에 돈과 음식에 관련한 거지들이 자주 나타났던 일들이 떠오르더군요. 지인이 영암에서 서울 가는 길에 들러서 얼굴 보고 간다지만 아침 8시에 온다기에 아침밥 얻어먹으러 오는 것임을 알겠더군요. 이가 아픈 언니가 통화하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하고 있으니 돈도 주고 밥도 달라고 외쳐댔고요, 동네에서 일주일새 세 번이나 보았기에 현미떡을 드리려 했던 거지 할아버지에다가, 급기야 쓰레기통에서 주워 먹고 사는 할머니까지 다양한 모습의 거지가 최근에 집중적으로 내 현실로 다가온 사실을 기억해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저는 닥친 현실을 처리하느라 바빴죠. 만날 때마다 우리가 밥 샀는데 드디어 집으로 아침밥까지 얻어먹으러 오는 밥거지야 밥거지라고 투덜대며 새벽밥 했고, 노골적으로 돈 밥 달라는 거지 언니 땜에 속상해서 씩씩대며 감정 추스르느라 힘들었고, 돈 있으면서도 주워 먹는 할머니에게 쯧쯧 안타까워하며 거지라고 욕했고요... 제 앞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거지 현실을 나의 존재상태와 연관 짓지 않고, 타자들만 탓하면서 말이죠. 이제는 더는 하기 싫은 반복된 치다꺼리에 울화통이 치솟고 돌아버릴 지경이어서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싶었어요.

 

천부경을 통해 내 삶의 반복은 내가 원인이고 내 존재 됨됨이가 펼친다고 이해되어 대입해 보니, 一이라는 내 존재상태인 ‘나는 거지이다’가 3極(天極·地極·人極)이라는 다양한 거지들을 내 삶에 펼쳐내는데(析), 내 모습을 비춰주는 人3極이라는 거지들만 탓했더니 무진(無盡)장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됩니다.

이렇게 반복되고 만왕만래하는 거지들로 펼쳐지는 내 현실 삶이 너무 괴롭고 비참해 이젠 제발 멈추고 싶어서 거지가 내 모습임을 드디어 인정하기 시작했죠.

아~ 그런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니 내가 거지라는 증거들이 마구 쏟아지는데 정말 기가 막혔어요. 무청 주워 시래기 말린다고 동네 밭들을 노다지 기웃거려서 주웠고, 참깨가 비싸니 안 사고는 거지처럼 누가 주겠지 하며 바랐으며, 된장 간장 돈 안 주고 거저 얻어먹으려고 아부하며 친한 척했고, 고추장 엿기름으로만 담은 거 친정 엄마가 줬다는 지인에게 나도 좀 달라고 했으며, 친환경 농사짓는 지인이 우거지 나오면 준다고 해 놓고 안 줬다고 뒷담화 했으며, 농사짓는 친구가 보내주리라고 기대했으며, 주렁주렁 열린 대추가 탐스러워 주인에게 갖은 찬사를 보냈으나 떨어진 대추도 줍지 못했으며….

아~ 부끄럽지만 나의 거지 됨됨이의 증거들은 무궁무진해서 쥐구멍을 찾아야 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을 잃고서 나 사람 맞나? 싶어 솟아오르는 거지 증거들을 틀어막아야 했어요. 그러는 그 와중에도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장면이 비집고 떠올랐어요.

후아~ 제가 7~8세 때 김장철에 통배추를 살 형편이 아니었던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시장에 푸른 배추겉잎을 쓰레기로 쌓아 놓은 더미로 가서 배추 우거지를 주우셨어요. 창피해서 저는 할머니가 다 줍고 나면 들고만 가야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죠. 그런데 멀리서 봐도 내게는 한눈에 꼭대기에 말짱한 배춧잎이 다 보이는데 할머니는 아래서 지저분한 잎만 줍는 거예요.

아는 아줌마도 보이고 친구들이 볼 수도 있기에 주변 눈치만 보다가 좋은 것이 많은 꼭대기는 가지 않는 할머니가 하도 답답해서 에잇 창피한 것 팽개치고는 힘껏 달려 배춧잎 더미 위로 기어 올라갔어요. 말짱한 푸른 잎을 마구마구 주워 할머니 옆에 갖다 쌓으며 할머니 가만 계시라고 내가 다 가져오겠다며 배춧잎 더미를 오르내렸죠. 그리곤 배추 우거지를 한가득 가슴에 안은 저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는 신 나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저는 어릴 적에도 주워 먹었군요….

그런데 가난해서 거지처럼 주워 먹고 산 걸 저는 무척 창피해했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가난하지 않은 척 있어 보이려 꾸며댔고, 부자인 척하며 속여왔군요. 이렇듯 나의 가난한 상태를 창피해하니 빛 좋은 개살구로 결국엔 거지로까지 악화해있네요. 돈이 있더라도 안 쓰며 갖은 수단으로 공짜로 거저먹으려 눈이 벌게진 진짜 속 빈 거지 말이에요. 이런 모습을 어찌해서든 자각하게 도와주시려고 신은 거지 모습을 제 현실에 만왕만래로 무진장 반복해서 펼쳐주신 거고요.

오 이런 세상에…. 그 어린 나날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그 많은 날에 수만 번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저는 그 오랫동안 너무 창피해 숨기며 수도 없이 아닌 척 외면하고 수만 번 배신하였는데 신이시여, 이 무한한 사랑은 어찌 된 것인가요. 아 아아아아!

 

진정성 있는 가슴속 사연 잘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처럼 심각한 숙제들이 몇 개 있기 마련입니다. 삶에 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여 저서 기쁘네요.

사실 저도 거의 각설이로 살았네요. 거지 생활이 ‘기대’에서 졸업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매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답니다. 예수님과 붓다께서도 사실상 떠돌아다니고 탁발하는 인간말종의 생활을 했죠. 먹는 것에 관련해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에게 내맡김으로써 신을 알아보고 신의 도움을 받는 데 유리한 면이 많습니다.

이렇듯 거지 같은 생활이 나쁘다는 판단이 문제일 뿐이지 타인보다 아래(under)에 섬(stand)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under-stand)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타인의 심리를 알기 위해 돈을 주고도 배운다고 하는데, 거지 생활은 저절로 의식이 깨어있게 해줍니다. 그런 환경 덕택에 흰빛님도 눈치 100단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거지가 되라는 의도로 하늘 나는 새를 보고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고 했다고 봅니다.

 

이제 아주 중요하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本’이 나왔네요. 사람들은 대부분 ‘一’을 어떤 대우주의 법칙이나 道로 생각해왔는데, 알고 보면 바로 이 ‘本’이 道이고, 붓다가 설하신 담마(dhamma法)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붓다의 원음인 니까야를 번역해서 재구성한 󰡔붓다의 발견󰡕을 보면 붓다께서는 담마를 두 가지 의미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각자에게 제시되는 현상인 메신저, 또 하나는 그 현상에서 주어진 메시지를 말합니다. 나한테 제시되는 현상 그리고 그 현상을 통해 나한테 주어지는 천명(天命)이나 소명(召命)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담마인 ‘本’이 대응되는 구절 ‘本心 本太陽’에서 ‘本心’이 내면 메시지를 의미하고, ‘本太陽’이 외부 메신저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本이 중요하다고 한 이유가 나왔군요. 천부경에서 本은 도(道), 담마(法 dhamma), 즉 나의 천명(天命) 또는 거부할 수 없는 숙제라는 거군요.

하늘의 명령인 천명(天命)이라고 하니 듣는 순간 엄숙해집니다.

 

그래서 먼저 도(道)나 천명(天命)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바로잡는 게 도움됩니다. 죽간노자에서는 도(道)를 ‘천하모(天下母)의 별칭’이며, ‘이름 없는 무명의 마부요 무녀(巫女)’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 그대로 도(道)가 ‘앞에서 말을 끌어주는 마부’나 ‘길을 일러주는 무녀’처럼 도우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명(天命)도 하늘의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귀담아들어야 할 조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합니다.

 

죽간노자에서는 천하모(天下母)의 별칭이며, ‘이름 없는 마부요 무녀’인 도(道)가 사람들로 하여금 실력 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바지하는 도우미 역할을 하듯이, 천명(天命)도 하늘의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각자에게 잘되도록 주어지는 조언이다! 우와~ 엄숙해진 제 태도가 싹 사라지며, 도(道)에 천명(天命)에 귀 기울일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本은 글자 형태로 보면 뿌리 모양입니다. 우리가 나무를 땅 위에서 보면 뿌리는 보이지 않듯이 ‘本’은 삶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숙명입니다. 숙명(宿命)의 숙이 ‘잘 宿(숙)’이거든요. 잠잘 때 활동하듯이 무의식에서 작동되는 숙명은 의식해서 바꾸려고 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근저에서 작동하므로 󰡔신나이󰡕는 ‘뒷받침(Sponsoring)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해도 지속해서 나한테 주어지는 천명, 그런데다가 행위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바로 ‘本’이라고 합니다.

또 뿌리가 물과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를 튼튼하게 자라게 하듯이, ‘本’도 각자가 자각해서 성장하도록 도우려고 다양한 방식으로 담마를 제공합니다. 각자에게 적합한 이 맞춤식 담마는, 양심이 있다면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됩니다. 각자가 견뎌낼 수 있는 고난을 주듯이 어느 정도 노력하면 풀 수 있는 형태로 언제나 누구에게나 담마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해답 또한 각자에게 있습니다. 외부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정답이 없으므로 오히려 보편적 답을 추구하는 것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각자마다 답이 다르다는 거죠. 해답을 찾으려면 외부로 가지 말고 내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스스로 터득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에게 도움되는 本(담마)이 언제나 제공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것은 신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에게 우연히 벌어지는 현상은 없으며, 三極을 통해서 제공되는 本(담마)이 자신을 도와서 성장하고 잘되게 해주리라는 신뢰를 말합니다.

그래서 無盡本은 끊임없이 제공되는 담마(천명)가 됩니다. 즉, 하늘의 명이라는 건데, 왜 천명이 끊임없이 반복될까요? 상황이 제시되는데도 자각하지 않으니 하늘이 계속 나한테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사기꾼을 통해서 제공하기도 하고, 가까운 친구의 입을 통해서 제공하기도 하며, 어느 날 연속극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통해서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뿌리가 나무를 튼튼히 하려고 영양을 찾아가듯이, 本도 자각을 도우려고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서 각자에게 제공한다니 놀랍습니다. 그러니 각자에게 적합한 이 맞춤식 담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비록 외부 상황이 우연하게 벌어지는 듯이 보일지라도 자신에게 제시된 외부현상과 그 현상이 주는 메시지(本)가 자신을 잘되게 돕는다고 신뢰하라는 거군요.

 

정리해보면, 一析三極 無盡本은 ‘一’, 즉 나의 존재 상태가 三極인 天1極 地2極 人3極으로 시차를 두면서 펼쳐지고, 각자에게 제공된 현상과 메시지라는 本(담마)이 그 펼쳐진 현실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창조한 외부 현실에서 교훈을 알아보고 극복해내지 못하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특정 상황이 영원히 반복한다는 이런 측면을 니체는 앞서 얘기했듯이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 했습니다. 삶이 각자에게 제공하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면 같은 상황이 영원히 반복되고 되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이는 “지금 상황이 반복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극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으로 점점 악화 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감기 몸살을 제때 약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주사가 동원되고 입원이 필요해지며 심하면 수술까지 갈지도 모르듯이, 제공되는 담마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상황이 점점 악화하고 반복되리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이것이 바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게 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자신이 창조한 외부 현실에 만족한다면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외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 내면을 반영해주는 외부의 人3極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상태를 질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면 혼란이 더욱더 가중되고 말 겁니다.

이를테면 가정에서 남편 부인 자녀 나아가 직장 상사, 모임의 장, 시장,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런 외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해 보라는 겁니다. 수행인이라면 촛불을 켜서 외부의 악마를 쫓아낼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악마, 즉 어두운 그림자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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