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1문단①…一析三極 無盡 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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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1문단①…一析三極 無盡 本
  • 주우(宙宇)
  • 승인 2018.02.0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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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析三極(일석삼극)한 탓에 無盡(무진)本(본)이 되는 걸 깨달을 때, 一積十鉅(일적십거)한 덕에 無匱(무궤)化三極(화삼극)이 된다.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천지에 알려지고 이에 따라 자신을 자각하도록 돕는 인간사가 펼쳐지는데, 이를 깨닫지 않으면 끊임없이 이 외부현상이 주는 메시지가 지속합니다. 하지만 이를 깨달아 각자의 존재상태가 수행을 통해서 한 걸음씩 단련되어 완전한 존재로 성장해간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명을 완수해냄으로써 결국 천지와 완벽하게 동조하는 존재로 승화합니다.

일(一), 즉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시차를 두고 천1극·지2극·인3극(天1極·地2極·人3極)으로 투사되어(析) 천일·지일·인일(天一·地一·人一)이라는 ‘반야(般若) 모드’가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無盡) 담마(本)가 제공된다.
하지만 이를 깨달아 일(一), 즉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완전한 10(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닦여가는(積) 덕택에, 빈틈없이 완수해냄으로써(無匱) 동시에 작동되는 완벽한 천3극·지3극·인3극(天3極·地3極·人3極)으로 승화되어(化) 천이·지이·인이(天二·地二·人二)라는 ‘협업(協業) 모드’가 된다.

앞쪽에서 언급했듯이 1문단을 다음처럼 갈라 보면,
一析Ⓐ 三極Ⓑ 無盡Ⓒ 本Ⓓ 一積Ⓔ 十鉅Ⓕ 無匱Ⓖ 化三極Ⓗ
각각의 구절이 ‘원인⇨결과’라는 Ⓐ⇨Ⓑ Ⓒ⇨Ⓓ Ⓔ⇨Ⓕ Ⓖ⇨Ⓗ 이런 구조가 됩니다.
각자의 존재됨됨이(一)가 투사(析)되므로 삼극(三極)으로 펼쳐지고, 끊임이 없으므로(無盡) 담마(本)가 제공되며, 그러나 이를 깨달아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닦여가므로(積) 완전한 10(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성장해가고, 빈틈없이 완수해내므로(無匱) 동시에 작동되는 완벽한 삼극(三極)으로 승화됩니다(化).

◎ 一析三極 無盡 本

나의 존재됨됨이가 삼극(三極, 天極·地極·人極)으로 투사되기(析) 때문에, 끊임없이(無盡) 담마(本)가 제공된다.
먼저 一析三極(일석삼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내용부터 소개하겠습니다.
통행본 노자(老子)에는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道生一(도생일) 一生二(일생이) 二生三(이생삼) 三生萬物(삼생만물)

道가 차례로 1天을, 2地를, 3人을, 만물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소강절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는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道生天地(도생천지) 天地生萬物(천지생만물 )

풀이해보면 道가 天地를 낳고, 天地가 萬物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통행본 노자에도 있습니다만, 죽간노자를 기반으로 하는 󰡔노자의 발견󰡕 1장에는 다음 구절과 설명이 있습니다.

人法地(인법지) 地法天(지법천)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도법자연)

‘人은 地를 따르고, 地는 天을 따르며, 天은 道를 따르고, 道는 自然을 따른다’는 의미인데 발생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道法自然 다음에 自然은 人을 따른다는 自然法人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순환구조를 이룹니다.

 

 

~~人⇨自然⇨道⇨天⇨地⇨人⇨自然⇨道~~ 이런 순환구조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自然이라는 말은 ‘스스로 自’와 ‘그러할 然’이므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발적인 정체성을 뜻합니다.
죽간노자에는 크게 무사(無事)·무위(無爲)·불욕(不欲)이라는 중요한 핵심 단어가 있는데, 그중에 無事는 ‘해야 할 일이 없다’ ‘자발적이다’는 의미로 自然의 ‘自’에 해당하고, ‘無爲’는 인위적이고 꾸며냄이 없이 자신의 존재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然’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自然이 정해지면, 즉 자신이 스스로 누구인지 정하면 이에 따라 道가 따르고, 그 道에 따라 天이 형성되며, 그 天에 따라 地가 형성되고, 그 地에 따라 人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人이란 인간사(人間事)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타자나 사건을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一’, 즉 자신의 존재됨됨이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정체성과 관련한 자기 내면의 실제 모습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自然입니다. 그러므로 노자 본문에서 생략된 自然法人에는 사람이 인간사를 통해서 스스로(사실상 자발적으로) 결정한 정체성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천부경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로 一析三極(일석삼극)이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一, 즉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三極으로 투사된다는 의미인데 三極인 天極·地極·人極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차례대로 형성됩니다. 天1⇨地2⇨人3 이런 순서입니다.

이제 통행본노자, 황극경세서, 죽간노자 그리고 천부경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비슷하나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天極·地極·人極 설명은 앞을 참고하세요.)
통행본노자는 道, 황극경세서는 道, 죽간노자는 自然, 천부경은 一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죽간노자의 自然과 천부경의 一은 똑같은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간노자에서는 自然 다음에 道가 있고 天地가 뒤를 잇는데, 이는 통행본노자와 황극경세서도 같은 구조입니다.

 

통행본노자

 

 

天1

地2

人3 ⇨

萬物

황극경세서

 

 

萬物

 

죽간노자

自然

 

천부경

天極

地極

人極

 

 

천부경에서 죽간노자로 넘어갈 때는 같은 구조이지만, 죽간노자를 본뜬 통행본노자나 황극경세서는 죽간노자의 自然이라는 개념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道에서 시작하는 오류에 빠져서 우주론으로 전도된 겁니다. 그러므로 죽간노자의 道法自然(도법자연)의 참뜻을 알지 못한 이후의 사상체계는 엉터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 꿰어진 첫 단추 이후에 장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펼쳤던 논리들마저 엉터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주의 비밀을 엿봄으로써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의존을 부추기는 종교문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一析三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수행론이 아닌 道生天地라는 우주론으로 변질함으로써 관념적 이론이 난무하고 말았습니다.

아~ 내면을 성찰해서 자신만의 담마를 구하기보다 외부를 커닝해서 우주의 진리를 한방에 얻어내려 하다 보니 죽간노자 이후에는 자기 정체성인 自然이 사라지고 샛길로 빠진 비리가 드러나는 순간이군요.

통행본노자나 황극경세서는 무대장치로 비교되는 地極에서 만물을 장만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으며, 특히 통행본노자는 道에 관해서 오해했으므로 현학적 道可道非常道 같은 불명확한 구절을 끼워 넣어 모호하게 만든 것이죠. 또 황극경세서와는 달리 人3과 萬物의 관계도 혼선을 빚었네요.
비록 천부경만큼 명확하지 못하나 1,170자인 죽간노자 甲본은 대부분 3단논법으로 되어 있고 문장 구조도 대구·대응·대비 관계로 잘 짜여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대다수 죽간노자에 관한 주석에 불과한 내용이 통행본노자의 본문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2번이나 주먹구구로 첨가되다 보니 노자의 원뜻이 대다수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자(莊子)조차 죽간노자를 접하지 못하고 변질한 백서(帛書) 노자를 참고하고 인용했으므로 제대로 노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부분은 죽간노자에는 道에 앞서 自然이 있다는 점입니다. 죽간노자의 自然⇨道⇨天⇨地⇨人이라는 구조와 천부경의 一析三極 구조인 一⇨析⇨天極⇨地極⇨人極를 비교해본다면 상당한 공통점이 보입니다.
天과 天極, 地와 地極, 人과 人極은 같은 자리에 비슷한 글자이므로 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죽간노자와 천부경의 ‘自然’과 ‘一’ 그리고 ‘道’와 ‘析’도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노자의 발견󰡕을 쓸 때 필자는 노자보다 먼저 이렇듯 정확한 메커니즘을 제시한 천부경을 미처 몰랐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自然은 스스로(자발적으로) 결정한 정체성이라는 말이고, 一은 자신의 존재됨됨이인 내·외적 존재상태를 말하는데, 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自然에 무사(無事)와 무위(無爲)라는 양면성이 있음을 노자가 통찰했고, 정체성에 아함(ahaṁ)과 아라마나(ārammaṇa)라는 양면성이 있음을 붓다가 통찰했듯이 一에도 ‘자기 선택’과 ‘존재상태’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무사(無事) 그리고 ‘나’라는 정체성을 정한다는 아함(ahaṁ)은 같은 맥락이고, 심언행(心言行)을 일치해서 꾸며내지 않는다는 무위(無爲) 그리고 결과적으로 있는 그대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내적 존재상태인 아라마나(ārammaṇa)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발 왼발로 번갈아 걷는 걸음걸이처럼 작동되는 ‘자기 선택’과 ‘존재상태’라는 양면성은, 자신이 의식해서 외적으로 원할지라도 존재상태가 바뀌지도 않고, 외적으로 바라지 않을지라도 존재상태가 바뀌기도 합니다. 즉 존재상태란 것이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조차 품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돈을 원한다고 해서 풍요로운 존재상태가 된다는 법이 없듯이, 자신이 돈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풍요의 존재상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과 ‘풍요’에 관련해서 제대로 파악해서 특정 과정을 밟아가기 전에는 의식해서 자신의 존재상태를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붓다가 정견(正見)을 얻을 때처럼 노자도 무사(無事) 무위(無爲)라는 自然을 통해서 외부 정보를 참고하되 의존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의사를 결정함으로써 ‘무사(無事)’를 달성하고, 언제나 내면에서 담마(本)가 제공되고 있으므로 본심(本心)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무위(無爲)’를 달성하라는 취지의 당부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전환될 계기를 마련하려면 三極이라는 현실을 펼쳐내는 근원인 一, 즉 존재됨됨이(beingness)를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내적 존재상태인 존재됨됨이를 바꾸려고 한다면 노자(老子)의 놀라운 통찰인 무사(無事)와 무위(無爲)를 통해 自然을 바꾸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붓다의 발견󰡕을 쓸 당시에는 죽간노자가 주로 지도자를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보니(不然其然) 그곳에는 팔성도에 관련한 설명들이 들어있음을 알았습니다. 팔성도가 바른 견해·사유·언어·행위·생활·정진·사띠·삼매를 통해서 현실을 극복해가는 법을 제시하듯이 죽간노자도 무사(無事)·무위(無爲)·불욕(不欲)의 실천을 통해서 自然이라는 존재상태가 저절로 바뀜으로써 자연스럽게 현실이 바뀌게 합니다.
특히 의무감으로 해야 할 일은 없다는 무사(無事)는 억지로 일했던 자가 자신에게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는 핑계로 자기 책임을 회피하거나 외부를 탓하지 못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습니다. 󰡔노자의 발견󰡕 9장 과이비간(果而丕侃)에서 “리더는 원인을 놓은 대로 귀결을 겪게 하지 절대 짓밟지 않고, 군림해 교만해하지 않으며, 핍박하지도 않는데 이는 ‘귀결을 겪게 해서 크게 강직하게 한다.’는 뜻이다”고 합니다. 즉,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책임을 외부에 전가하지 않고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간노자는 무위(無爲)가 도(道)의 길이 아니라 인항무위(恒亡爲) 즉, ‘인간의 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道로 바뀌어서 ‘도항무위(道恒無爲)’로 잘못 알려진 ‘人+行’으로 된 ‘’이라는 글자는 맹자가 인간의 길이라고 한 義와 비슷합니다. 義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미워해서 자신을 옳게 하는 마음인데, 義라는 글자를 ‘美+我’로 본 茶山(다산) 선생님은 ‘자신(我)을 사랑(美)’하는 마음이라고 통찰했습니다. 그러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仁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義인 셈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무위(無爲)는 단기적 안목으로 심언행(心言行)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결과가 초래되므로(本心 本太陽) 의식해서 꾸며내거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으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결국 손해를 초래한다는 역사를 체험해봤으므로 뇌물을 주더라도 자신을 사랑해서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義’인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제나 누구든 자신의 존재됨됨이를 바꿀 기회를 맞이하고, 무사(無事) 무위(無爲)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상태인 ‘一’을 바꿔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 자신이 주변 삶을 펼쳐내는 행태를 알아보기 시작해서 결국 자신이 바뀌는 것(用變)이 효과적임을 깨닫고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담마에서 벗어나지 않고(不動本) 담마를 완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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