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⑭…진나라 왕전장군의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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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⑭…진나라 왕전장군의 처세
  • 손봉균
  • 승인 2018.01.2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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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전국시대 말기 진왕 정(통일 후 진시황이 됨)을 도와 조나라와 초나라를 멸망시켜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군사적 공을 세운 장군 왕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왕전 장군은 의심이 많은 진왕 정에게 많은 재산을 줄 것을 요청하여 진왕 정의 의심을 풀게 함으로써 소신껏 전쟁을 할 수 있었다.>

 

▲ 손봉균씨

 

전국시대 말기, 기원전 225년경, 진왕 정(진시황) 시대.

왕전(王翦) 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하였다. 그는 어른이 되자 진나라의 진왕 정에게 중용되었으며, 진왕 정11년(기원전 236년)에 조나라 군을 격파하고 아홉 개의 군․읍을 빼앗았다. 7년 뒤에 다시 조나라로 쳐들어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모두 진나라에 편입시겼다.

아울러 진왕 정은 한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진나라와 인접하고 있는 삼진(三晋: 한․조․위)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북지대에 있는 연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연나라 왕을 변경으로 패주시켰다.

이제 실질적으로 남은 나라는 초나라와 제나라뿐이었다. 진왕 정은 남방의 큰 나라인 초나라를 격파하면 중국 전체를 통일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보고, 먼저 초나라를 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진왕 정은 먼저 젊은 장수인 이신(李信)을 불러 물었다.

“장군이 초나라를 친다면 얼마나 군사가 필요하겠소?”

대장 이신이 대답한다.

“20만 명만 있으면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진왕 정이 은퇴하여서 고향인 영양 땅에서 쉬고 있는 왕전을 불러 물었다.

“장군이 초나라를 칠려면 대개 어느 정도의 군사가 필요하겠소?”

왕전이 대답한다.

이신이 군사 20만 명으로 초나라를 친다면 반드시 패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 의하면 적어도 군사 60만 명은 있어야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진왕 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전은 늙어서 겁이 많구나! 그렇다면 차라리 젊고 씩씩한 이신에게 이 일을 맡겨야겠다’

 

이신은 마침내 대장이 되고 몽무는 부장이 되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초나라를 쳤다.

이신은 평여 땅을 쳐서 함몰시키고, 부장 몽무는 침구 땅을 쳐서 파죽지세로 초나라로 쳐들어갔다.

이에 초왕은 항연(항연의 아들이 초패왕 항우의 숙부인 항량임)을 대장으로 삼고 군사 20만을 주어 초나라를 막게 하였다.

젊은 장수 이신은 성급하게 초나라를 치다가 초나라 대장 항연의 매복작전에 속아서 점령한 땅도 다시 빼앗기고 크게 패하였다. 그래서 초나라를 평정하려던 진왕 정의 계획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진왕 정은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로하였다. 즉시 이신의 모든 벼슬과 봉읍을 삭탈했다. 그리고 진왕 정은 어가를 타고 직접 왕전이 은거하고 있는 영양땅으로 갔다.

 

진왕 정이 왕전에게 청한다.

“지난 날 장군이 말하기를 이신이 20만 명의 군사로 초나라를 치면 반드시 패하리라고 하더니 과연 우리나라 군사는 싸움에 패했소. 장군이 비록 늙었지만 과인을 위해서 초나라를 쳐 주오”

왕전이 재배하고 사양한다.

“노신은 이제 늙어서 심신이 다 쇠약했습니다. 대왕은 다른 유능한 장수를 골라서 이 일을 맡기십시오.”

진왕 정이 굳이 청한다.

“아니오. 이 일은 장군이 아니면 아무도 감당할 사람이 없소. 장군이 우리 진나라를 위해서 싸워 주시오.”

그제야 왕전이 재배하고 조건을 내 세운다.

“대왕께서 꼭 노신을 필요로 하신다면 적어도 군사 60만은 주셔야 초나라를 칠 수 있겠습니다.”

한 참 만에 진왕 정이 대답한다.

“과인이 듣건대 옛날엔 큰 나라라야 3군(三軍)을 뒀으며, 그보다 작은 나라는 2군(二軍)을 뒀으며, 아주 조그만 나라는 1군(一軍)을 뒀다고 하오. 그리고 전쟁이 나도 군사를 다 내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군사가 남아 돌아 갔다고 합니다. 또 다섯 나라 패후(覇候)는 천하패권(覇權)을 잡는 데도 병차 천승(千乘)만으로 충분했다고 하오. 병차 1승(一乘)에 75명씩 배치한다고 해도 천승이라야 불과 10만명도 못 되오. 그런데 이제 장군은 초나라를 치는 데 60만명이 필요하다고 하니 이는 고금(古今)에 없던 일이요."

왕전이 설명한다.

“옛날과 오늘 날은 싸우는 방법이 다릅니다. 옛날엔 반드시 싸울 날짜를 통지하고 나서 서로 진을 쳤고, 싸우되 반드시 진 앞에서만 싸웠고, 달아나고 뒤 쫓는 데도 규칙이 있었고, 적을 무기로 치되 되도록 중상을 입히지 않는 걸로써 명예를 삼았고, 그 죄를 꾸짖고 항복만 받으면 그만이지 오늘 날처럼 땅을 빼앗진 않았고, 비록 칼과 창으로 싸울지라도 어디까지나 예의로써 대하며 비겁한 수단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옛 제왕들은 싸우되 많은 군사를 쓰지 않았으며, 제환공(齊桓公)이 천하패권(覇權)을 잡았을 때만 해도 군사 3만 명으로 충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은 어떻습니까! 오늘 날 모든 나라는 예의로서 싸우지 않고, 다만 힘으로써 약한 자를 무찌르는 시대입니다. 즉, 수효가 많은 군사로써 수효가 적은 상대방 군사를 덮어 누르는 시대입니다. 만나면 반드시 서로 죽이고 공격하면 반드시 그 땅을 빼앗는 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세(近世)에 가까워질수록 상대방 나라의 성을 포위하면 군사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몇 해고 간에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오늘 날은 농사치는 농부들까지 다 무기를 잡으며, 어린 동자 아이들까지도 병적에 올라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도 변했고, 세상도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수효가 적은 군사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초나라는 동남 일대를 다 차지하고 있는 큰 나라입니다. 한 번 명령만 내리면 그들은 즉시 백만 명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이 청하는 60만 명의 군사로는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운 그런 정도의 대군(大軍)입니다. 그러하거늘 60만 명도 못 되는 군사로써 어찌 초나라를 칠 수 있습니까.”

진왕 정이 머리를 끄떡이면서 탄식한다.

“장군이 전장에서 늙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듯 사세를 투철히 판단하리오. 과인은 장군의 청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소.”

 

▲ 진나라 왕전 장군 초상화 /위키피디아

 

진왕 정은 마침내 어가 뒷수레에다 왕전을 태워가지고 함양성으로 돌아왔다. 그날로 왕전은 대장이 되고 60만 대군을 받고 몽무로 부장을 삼았다.

진왕 정이 친히 교외까지 나가서 주연(酒宴)을 펴고 떠나는 60만 대군을 전송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대장 왕전이 술을 가득 부어 진왕 정에게 잔을 바치고 말한다.

“대왕은 이 잔을 받으십시오. 떠나는 이 자리에서 대왕께 청할 말이 있습니다.‘

진왕 정은 단숨에 술을 마시고 잔을 놓고 묻는다.

“장군은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소?”

왕전은 소매 속에서 준비해 온 목록을 내 놓았다. 그 목록엔 수도인 함양 땅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밭들과 훌륭한 저택들만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왕전은 요청한다.

“여기에 적혀 있는 밭과 저택을 신에게 다 주시기 바랍니다.

진왕 정이 대답한다.

“장군이 초나라를 완전히 무찌르고 돌아오면 과인은 장군과 함께 부귀를 누릴 작정이오. 장군은 장차 가난 할 까봐 걱정할 건 없소”

왕전이 다시 청한다.

“신은 이제 늙었습니다. 비록 초나라를 치고 돌아와서 아무리 높은 벼슬을 받는 다 할지라도 그 부귀영화를 오래도록 누리진 못 할 것입니다. 바람 속에 촛불이 빛난 들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늙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이 죽을 지라도 이 좋은 밭들과 저택들 만은 자손에게 넘겨 줄 수 있습니다. 대왕의 은혜를 입어 자손 대대(子孫代代)에게까지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진왕 정이 크게 웃고 대답한다.

“알겠소. 그럼 장군의 청대로 하겠소”

 

마침내 대장 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을 떠나 함곡관으로 나갔다. 왕전을 함곡관을 지나면서 수하 아장(牙將)을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왕에게 보냈다.

“그대는 곧 함양으로 돌아가서 대왕께 나의 말은 전하여라. 즉, ‘약간의 좋은 밭과 저택은 받았습니다만 기왕이면 좋은 동산과 좋은 못이 있는 보다 훌륭한 저택을 좀 더 많이 신에게 주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하고 나의 뜻을 아뢰어라”

부장 몽무가 대장 왕전에게 말한다.

“노장군께서는 대왕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청하십니다 그려”

그제야 대장 왕전이 빙그레 웃고 부장 몽무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진왕은 성미가 사납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요. 이번에 왕은 나에게 60만 대군(大軍)을 내 줬소.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군사라고 단 한명도 없소. ‘만일 왕전이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반역을 하는 날이면 어쩌나?’하고 진왕은 속으로 매우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자손을 위해서 많은 재산을 요청 하는 것은 반역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진왕에게 알려 진왕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요”

부장 몽무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면서 감탄한다.

“이제야 노장군의 높은 지견(知見)을 알겠습니다.”

 

대장 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도도히 초나라 경계안으로 쳐들어 갔다. 초나라에 들어간 왕전은 천중산에다 군사를 둔 쳤다.

초나라 대장 항연은 진나라 장군을 왕전으로 바꾸고 병력을 증강하여 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전국의 군사를 총 동원하여 이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왕전은 초나라군과 마주치면 견고한 보루를 쌓고 쉽게 싸우려하지 않았다. 초나라군이 자주 유인을 하더라도 왕전은 움직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왕전은 전 군사를 휴식시키고 충분한 식량을 지급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 돋우었다. 왕전 또한 군사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동고동락하였다. 군사들은 자기들과 똑 같이 침식을 하는 대장 왕전의 태도에 감격하였다. 병사들은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하니 진중에서 투석 놀이와 초거 놀이로 운동경기를 하고 지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대장 왕전은 ‘우리 군사는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고 하였다.

진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고 대치상태가 장기화 되자 초나라 군사는 동쪽으로 군사를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왕전은 그제서야 기회가 왔다는 듯이 전군을 풀어 방심하고 철수하는 초나라를 추격하였다. 손쉽게 초군을 대패시키고 초나라 장군 항연을 잡았다. 초나라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진나라군은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읍을 석권했다.

1년 쯤 뒤에 초나라 왕 부추를 사로잡고 초의 전 국토를 평정하여 진나라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초나라는 멸망하였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남쪽의 월나라 땅도 평정하였다.

한편 왕전의 아들 왕분도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했다. 이렇게 해서 진왕 정 26년(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드디어 중국 전체를 통일했다.

왕전 부자는 몽염과 함께 통일에 공이 가장 큰 장수로 인정받았다.

진왕 정은 통일 후 그의 칭호를 황제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진왕 정은 ‘중국 고대에 삼황과 5제가 있었으며, 우리 진나라는 삼황의 덕을 겸비하고 있으며, 나의 공로는 5제보다도 월등하다. 그러니 삼황(三皇)의 황자와 5제(五帝)의 제(帝)를 따서 황제라고 칭호하자’. 고 하면서 ‘내게서부터 황제란 명칭이 시작하니 나는 시황제(始皇帝)가 될 것이요, 나의 자손을 말할 때는 2세 황제(二世皇帝), 3세 황제(三世皇帝)라고 호칭하여 백천만세(百千萬世)에 이르도록 이 진나라를 영원무궁히 전하여라’고 하였다.

 

※ 참고: 몽염은 왕전 대장의 부장이었던 몽무의 아들이며, 진왕 정(政) 26년(기원전 221)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우고,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통일한 후 기원전 215년에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하남(河南) 땅을 수복하는 등 활약이 컸고, 이듬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했다. 북쪽 변경 상군(上郡)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경비하는 총사령관으로 있자 흉노가 두려워 얼씬도 하지 못했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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