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기운 제압한 삼성산 호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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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기운 제압한 삼성산 호압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3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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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풍수지리설에 의해 건축…절 마당엔 600년 느티나무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앞서 한양의 지세를 파악했다.

한양은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두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사산(內四山)은 북쪽에 백악산(북악산), 남의 남산, 동의 낙산, 서의 인왕산으로 그 곳에 한양도성을 축조했다. 한양 외곽에는 북으로 북한산(삼각산), 남으로 관악산, 동으로 용마산, 서로 덕양산의 외사산(外四山)이 둘러싸고 있다. 이 외사산의 남쪽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두 봉우리가 붙어 있다.

조선은 개국후 한양에 궁궐을 건립할 때 풍수지리에 민감했다. 남쪽에 우뚝선 관악산과 삼성산의 두 봉우리에서 미칠 화를 염려했다. 관악산은 불(火)의 기운이 넘치고, 삼성산은 호랑이(虎)의 기운이 궁궐로 다가온다는 게 풍수전문가들의 해석이었다.

삼성산의 화기는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만들고 남대문 앞에 연못(南池)을 만들어 막기로 했는데,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은 어떻게 막아야 할까. 해결 방도는 그 곳에 절을 지어 호(虎)의 기운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 절이 호압사(虎壓寺)다.

 

▲ 삼성산에서 내려다본 호압사 /사진=김인영

 

서울 금천구 시흥동 삼성산 자락에 있는 호압사는 조선초기 태종 7년(1407년)에 건립되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주산이며, 숲보다 바위가 많고 그 바위들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호암산(虎巖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사는 봉은사다. 태종 임금이 호압이라는 현액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 호압사 표지판 /사진=김인영

하지만 창건연대는 이보다 훨씬 앞선다는 기록들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호암산의 지세가 워낙 크기 때문에 이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 이성계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이를 누르기 위해 호압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조선 개국시기인 1392~1394년 사이에 창건되었다는 추정이 나온다. 이 추정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에 궁궐을 짓기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이란 관청을 설치했는데, 호압사도 이 무렵에 창건되었다고 본다.

신동국여지승람 금천조에는 시흥군 현금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풍수지리설 간룡법에서 금천의 동쪽의 산세가 호랑이가 걸어다니는 것과 같고, 그 중에 험하고 위태로운 바위를 범바위라고 불렀다. 무학대사가 이것을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고, 그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것에 궁교(弓橋)를 만들고 또 북쪽으로 10리즘 되는 곳에 사자암(獅子庵)을 지었다. 모두 호암산을 호랑이 형상으로 본 것이며, 범이 달려가는 형세를 누르려고 한 것이다.

땅의 기운이 쇠락한 곳에 사찰을 세워 재난을 방지하고 안락을 기원하는 도참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호압사는 풍수지리학에서 호랑이 심장에 해당한다. 꼬리에 해당하는 시흥3동 부근에 탑을 세운 것,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석구(石狗)를 세운 것 등이 모두 도참사상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호압사는 조선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쇄락했다가 1921년 약사전 6칸을 다시 지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1994년 주지로 부임한 원욱(元旭) 스님에 의해 10여년에 걸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압사 한가운데 수령 600년된 느티나무가 두 그루가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느끼게 한다.

 

▲ 호압사 약사전 /사진=김인영
▲ 호압사 마당의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 /사진=김인영
▲ 호압사 가람 배치도 /호압사 홈피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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