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⑪…칭기스칸의 개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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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⑪…칭기스칸의 개혁ⓑ (리더십)
  • 손봉균
  • 승인 2018.01.0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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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봉균씨

 

(3) 칭기스칸의 리더십

칭기스칸은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하였다. 당시 몽골인 병사 10만 명을 포함한 총 200만명도 안 되는 인구로 약 1억 인구를 장악했고 점령지도 알렉산더‧나폴레옹·히틀러가 점령한 땅을 합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리더십 요소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고 있다.

- 엄한 군율 아래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병사와의 동고동락,

- 가공할 기동력(機動力)과 스피드를 중시한 전략의 구사,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과 역참제의 구축‧활용으로 신속한 정보의 유통,

- 전과(戰果)의 공정한 분배,

- 효율적인 조직 구성과 체계적인 조직관리,

-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사,

- 이민족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 흡수

- 야전 지휘관에 대한 과감한 권한 위임,

- 점령지 자치권 보장,

- 기술자를 우대하고 과학기술을 장려,

-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 등)에 대한 존중,

- 그 바탕이 되는 신상필벌과 은원(恩怨)관계의 철저 확립 등 많은 것을 든다.

 

▲ 칭기스칸 초상화 /위키피디아

 

이러한 리더십의 하나하나는 모두가 몽골 제국건설에 기여한 바가 있는 것으로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각각의 리더십을 평면적으로 상세히 설명을 하더라도 칭기스칸이 그렇게 큰 영토를 점령하고 이를 150년간이나 유지하도록 기초를 닦은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산발적으로 하나하나를 설명하여 어느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인지 혼동이 올 우려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전체 리더십의 바탕이 되는 신상필벌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적은 인구의 몽골군이 더 큰 외부의 적군을 이기기 위하여는 군대 내부가 단합하고, 전투력이 우수하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군 내부를 결속시키고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하여는, 지도자는 공을 세운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필수적이라고 판단되었다. 부하들이 공을 세우고 보상을 받기 위하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금지하는 것을 하지 않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자연히 강한 군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상필벌의 효과는 지난 번 글(역사여행10)에서 올린 ‘상앙의 진나라 개혁’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래서 칭기스칸의 상을 주고 벌을 준 내용을 검토해 보니, 그 중요성과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방향을 바로 잡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칭기스칸이 몽고군을 강한 군대로 만들었던 신상필벌의 내용, 즉 상과 벌을 준 방법과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가) 칭기스칸은 잘못을 한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필벌(必罰)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칭기스칸은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유목민이었고, 전투방식, 점령지에 대한 처리 등에서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의 방식을 따랐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신속한 기동성을 확보하여 상대편이 예상하기 어려운 시간에 적을 공격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짖는 경우가 많다. 기동력을 앞세운 속도전,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전법, 정공법을 피하고 일단 적을 유인하여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우회공격술 등은 분명히 유목민이 다른 민족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따라서 신속한 기동성으로 적을 제압하는 전투는 칭기스칸만이 했던 것이 아니고 유목민 전체가 공통적으로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민들은 적국을 점령한 후에는 약탈과 살육으로 초토화하는 사냥 습성을 가졌다. 경제적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그들에게 전리품 획득은 전쟁의 주요 이유였고, 사냥물에 대한 처리는 살육이었다. 그들이 전쟁 승리 후 같은 행동방식을 취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칭기스칸은 적에게는 무자비하였다. 칭기스칸은 주변국을 확장해 나가면서 저항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다. 이는 결코 그가 개인적으로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줄 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몰이사냥에서 터득한 전술을 실제 전투에 적용하였다. 유럽인들에게 몽고인들은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국에서 붙여진 별명이 타르타르인(지옥)이라고 한다. 칭기스칸이 유목민의 사냥습관에 따라 점령지를 처리하면, 벌을 주는 일은 상당부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다만, 칭기스칸은 이런 유목민의 습성을 유리하게 적용하며 그만의 플러스알파를 더하여, 장점들을 최대화하였다는 것이다. 적의 저항의지를 미리 꺾는 이른 바 '의도중심 전략'을 구상하고, 항상 배우고 발전시켜 전투방식을 상황에 맞게 개선한 점 등이 많은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그만의 장점이라 하겠다.

 

칭기스칸은 유목민들의 사냥습관에 다음의 2가지의 개인적인 성향이 더하여져서 잘못된 일을 한 자에게는 보다 철저하게 벌을 주었다..

첫 번째는 칭기스칸은 반역과 배신을 보인자는 바로 처단하였다. 칭기스칸이 어릴 적에 어려운 환경에 처하였을 때부터 종족 간 모반과 배신을 여러 차례 경험하였다. 그것 때문에 집안이 몰살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배신자를 아주 혐오하였고, 자신에 대한 배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군주를 배신할 경우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의 ‘아내 찾아주기’ 연합국의 동맹이었던 자모카와 몽골의 통일전쟁에서 적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세가 불리하였던 자모카의 부하들이 자모카를 배신하고 자모카를 잡아서 칭기스칸에게 항복한다. 적장을 잡아 왔으니 살려줄 만도 한데 배신한 부하들을 모두 처형한다. 대신 비록 적일지라도 자신의 군주나 군을 위해서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충성심이나 용맹성을 높이 평가하여 대우했다.

두 번째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스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아울러 칭기스칸은 벌을 주어야 할 때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호라즘의 술탄이 전쟁에 지고 북쪽으로 도망가자, 칭기스칸의 명을 받은 두 장군 제베와 수베에테이는 함께 무하마드를 추격했다. 추격전은 1만 킬로미터 가까이 계속됐다. 지구 둘레가 4만 킬로미터이니 지구의 4분의 1바퀴를 돈 셈이다. 술탄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는다. 이 소름 끼치는 추격전에 유럽 전체가 경악했다.

이러한 철저함이 적에게 더욱 공포심을 가지게 하였다. 수베에테이가 제베와 함께 술탄 무하마드를 추격한 이야기는 몽골의 복수가 어디까지 이어지는 가를 보여주는 전설로 남아 있다.

 

▲ 칭기스칸이 몽골의 칸 제위에 오르는 모습. 15세기 자미 알타와르키 그림. /위키피디아

 

(나) 그러나 칭기스칸의 진정한 장점은 인재를 중시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면서 부하들을 통솔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점령지를 초토화하여 적을 처벌하는 것은 유목민의 사냥습관에 따라 행동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으나, 공을 세운 자를 찾아내어 반드시 상을 주는 일은 유목민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칭기스칸은 이를 잘 하였다는 것이다.

칭기스칸의 성격은 간단히 말해서 적에게는 무자비하였으나, 자신의 부하와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자비로웠다.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이라고 하여 베푸는 걸 즐겼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향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노획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배분 한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칭기스칸은 실력과 충성심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칭기스칸은 전쟁에서 비록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항복한 사람들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평등하게 높은 자리도 주었다. 당시의 그림에 보면 흑인, 백인, 황인종 등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군대로 나온다. 그리고 칭기스칸의 가장 뛰어난 장수들이 칭기스칸이 부르기 전에는 평범한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다.

칭기스칸의 인재중시는 공정한 인사로 연결되었다. 더 나아가 능력 있는 인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였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사회 행정조직인 천호제를 도입하였다. 이 천호제의 도입으로 몽골인들은 노예도 능력이 있으면 리더가 될 수 있게 하였다. 모두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가 된 것이다.

당시 몽골사회는 씨족 단위로 편제된 봉건사회였다. 김씨는 김씨끼리, 이씨는 이씨끼리 모여 살았다. 징기스칸은 씨족 사회를 10진법으로 와해했다. 씨족과 관계없이 가까운 10가구가 모여 살고, 다시 100가구, 1,000가구, 10,000가구로 모여 살게 했다. 지역과 학연은 무시 됐다. 각 단위조직의 리더, 즉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은 조직원들 스스로 뽑도록 했다. 그리고 리더의 능력이 부족하면 조직원들 스스로 결정해 교체할 수 있게 했다.

천호제는 칭기스칸 권력의 핵심이었다. 새 시스템에서 천호장에 올라 선 사람은 사회의 기둥이 됐다. 그 중엔 노예출신도 있었다고 한다(징기스칸의 최측근인 4준마 중의 한사람인 모칼리는 천민 출신이었다).

천호제는 군대 조직에서부터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이 올라가는 혁명을 몰고 왔다. 능력 있는 인재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일을 하면서 군대가 더욱 강해졌다. 기득권 세력이던 씨족장과 부족장들 사이에선 원성이 자자했다. 반면 일반백성과 병사들은 대환영이었다.

천호제는 경제 형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유목민들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천호제가 도입되자 주변의 초지상황에 따라 이동하는 아일식 유목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한 가구가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면적이 훨씬 넓어져서 생산성이 크게 증대된다. 적이 공격해 오면 천호조직을 가동해 방어했기 때문에 넓은 면적에 가축을 방목하더라도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천호제 실시로 몽골인들의 삶은 뿌리부터 달라지고 향상되었다.

칭기스칸은 군사들의 큰 힘이 되는 물질적인 것(전리품, 약탈 해온 물건 등)의 분배도 공평하게 했다. 이를 위하여 제도도 합리적으로 개선했다. 칭기스칸은 공정하게 상을 주는 것이 부하들이 열심히 일을 하도록 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유목민은 원래 일종의 선착순 약탈방식이 지배했다. 적이 달아난 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가축이든 여자든 취했다. 개인적 약탈이었던 셈이다. 이 방식에서는 맨 앞에서 싸우는 사람만 득을 볼 수 밖 에 없다. 뒤에 서거나 간접적으로 전투를 도움 사람, 다른 사정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게 없다.

칭기스칸은 이러한 개인적인 약탈을 금지하고, 앞에서 전쟁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뒤에서 전투력을 높이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예를 들면 말을 관리하는 사람 등)에게도 그 기여한 바에 따라 공정하게 상을 주도록 하였다. 공이 있는 자는 누구나 공평하게 물질적인 상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 개편은 유목민의 오랜 관행을 깨트리는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칭기스칸의 제도개선으로 선봉에 선 사람은 싸운 만큼 자기 몫을 차지하고 뒤에서 싸움을 도운 사람에게도 몫이 돌아간다. 즉 조직 전체의 전투력과 소속감을 높일 수 있었다.

몽골사회에는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다. 몽골에선 매년 7월이면 체력단련대회를 겸한 나담 축제가 열린다. 몽골씨름과 활쏘기, 말타기 경주가 열리는 데, 축제의 꽃은 역시 말타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주에서 우승하면 기수보다 말 조련사에 더 큰 포상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을 잘 아는 탓이다.

칭기스칸 자신은 물질적인 것의 소유에 큰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칭기스칸 아내 찾아주기’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칭기스칸은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은 몽땅 동맹군에게 나눠준다. 대신 전쟁의 승리와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칭기스칸의 소유에 대한 욕심이 적었던 점은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향과도 연결되어 부하들에게 노획물을 아낌없이 배분해 주었던 것이다.

아울러 칭기스칸은 국가를 위해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가족들까지도 잘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해 주었다.

몇 년 전 당시 국방대학교의 정효현 교수는 ‘칭기스칸 군대 용맹성의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사한 장졸들의 자녀들을 궁으로 데려와 짐의 자식과 똑같이 양육하라”는 칭기스칸 칙명이 용맹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전투에 나간 군인들에게 ‘내가 이 전투에서 죽고 나면, 내 자식들은 궁궐로 들어가 칸의 왕자 공주들과 어울려 먹고 입고 배우고 자란다. 그리고 장차 나라의 중책을 맡게 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줬고, 실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터에서 죽음에 직면한 장졸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가족인데, 그 가족을 국가가 최고 대우로 책임을 지면 두려움 없이 용감히 싸운다는 것이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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