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⑪…칭기스칸의 개혁ⓐ (대외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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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⑪…칭기스칸의 개혁ⓐ (대외정벌)
  • 손봉균
  • 승인 2017.12.3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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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20년이라는 단기간에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상앙의 신상필벌 개혁을 설명하였다. 이 번 글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하고 150여 년간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칭기스칸의 신상필벌 개혁을 소개하겠다>

 

▲ 손봉균씨

 

칭기스칸(1,162년〜1,227년)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영토의 2배이며, 로마가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훨씬 많은 땅을 20여년 만에 정복한 것이다. 그러면 칭기스칸이 이렇게 넓은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1) 칭기스칸의 생애

칭기스칸은 오늘 날 몽골 동부의 오논 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키야트 부르지긴 씨족의 씨족장인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오랜 숙적인 타타르 부족과의 전투에서 적장을 죽이고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예수게이는 자기가 죽인 적장의 이름을 따 테무친으로 지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칭기스칸이 된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몰락한 부족인 몽골 울루스(할아버지가 만든 부족)를 부흥시키려는 야심찬 꿈을 지니고 있었다. 다섯 유목세력(몽골부, 메르키트부, 게레이크부, 나이만부, 타타르부)의 통일을 시도하다가 견제 세력에게 독살 당한다.

칭기스칸의 고난과 역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칭기스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나이 어린 칭기스칸은 소년가장처럼 살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살벌한 내전상황,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친척들도 칭기스칸을 무시하거나 경계하였다. 때로는 붙잡혀 투옥되고 때로 도망 다니며 모진 학대와 고난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칭기스칸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평생 동안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면서 점차 현명해 진 것이다.

어느 날 그의 아내 버르테가 납치된다. 아내를 찾아 올 만 한 군대가 없었던 칭기스칸은 아버지와 동맹을 맺었던 옹 칸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자모카를 찾아가 부탁하여, 아내를 찾기 위한 연합군을 편성한다. 이 연합군은 전쟁의 명분과 목표가 칭기스칸의 ‘아내 찾아주기’였으므로 군사작전 지휘권은 사실상 칭기스칸에게 있었다. 아내 탈환전쟁에서 연합군은 찬란한 승리를 거둔다.

칭기스칸은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은 몽땅 동맹군에게 나눠준다. 대신 전쟁의 승리와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되찾은 아내 버르테는 이미 만삭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적장의 아들이 조치다. '나그네‘ 또는 ’손님‘이라는 뜻으로 조치라 이름 붙이면서도, 그를 기꺼이 장남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제국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후계구도에서 장남을 배제시킨다.

연합국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은 칭기스칸은 이를 시작으로 많은 노력을 하여 몽골 내부의 다섯 부족을 1206년에 통일한다. 칭기스칸의 나이 44살 때였다. 이 통일전쟁 과정에서는 칭기스칸의 ‘아내 찾아주기’ 연합군의 동맹이었던 옹 칸과 자모카도 모두 적군이었다. 이들을 모두 죽이고 통일을 이룬다. 1206년 통일 후 몽골족의 최고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칭기스칸' 이란 칭호를 받는다. '칭기스' 는 '하늘의 아들' 이란 뜻이고 칸(汗)이란 왕이라는 뜻이다.

 

▲ 칭기스칸 초상화 /위키피디아

 

(2) 대외전쟁(영토 확장 과정)

몽고고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은 외부로 시야를 넓혀 대외정복에 나선다.

칭기스칸이 대외정복을 시작한 이유는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몽고고원지대에서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정복이 아닌 교역을 원활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울러 조상을 죽인 원수의 나라인 금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금나라를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의 최대국가인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유목민들에게 낮 설기만 한 성곽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몰랐다.

 

(가) 서하원정

금나라를 정벌할 힘이 없었던 칭기스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 족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대외 정복을 시작하였다. 교역로를 닦으려는 목적이었지만 서하에 칭기스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 족의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은 3차례에 걸친 전쟁동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일삼아 서하인에게는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하의 수도를 공략하는 데는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수도가 포위당한 상태가 계속되자 서하국왕은 칭기스칸에게 항복하였다.

서하정벌 후 어려움이 많았던 성을 공격하는 데 대한 연구와 노력을 많이 하였다. 공성무기를 만드는 기술과 그 무기를 다루는 전술을 개발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익혔다.

 

(나) 금나라 원정

서하정벌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스칸은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던 금나라 침공을 감행하였다.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스칸의 증조부를 사로잡아 죽인 원수의 나라였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침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성을 공략하는 훈련을 많이 하였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마침내 칭기스칸은 만리장성의 거용관을 뚫고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금나라 내부문제도 생겨 금나라 선종은 칭기스칸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마침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스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챙겨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으로 옮기자 칭기스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왔다.

이 무렵에 칭기스칸은 당시 요나라 왕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로 몽골제국의 내정을 다듬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살아 생전에 금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다. 칭기스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1234년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다.

 

(다) 서요 원정

이후 칭기스칸은 서하국의 서쪽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서요로 진격한다. 서요에는 몽고 다섯 부족중 하나인 나이만의 왕자인 쿠출루크가 도망가 있어 이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서요의 마지막 황제인 야율직로고가 쿠출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 등 환대하였다. 그러나 쿠출루크는 야율직로고가 해외원정을 간 사이 쿠테타를 일으켜 서요를 장악하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배은망덕한 행위를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 학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다.

칭기스칸이 대군을 동원해 서요를 침공하자 쿠출루크의 학정에 지친 백성들이 침략자인 칭기스칸을 반갑게 맞았다.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이기고 쿠출로크를 잡아 죽였다. 거란족의 마지막 왕국 서요는 끝내 멸망한다.

 

(라) 호라즘 원정

그 후 칭기스칸은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왕국(지금의 아프카니스탄-우즈베키스탄-이란-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 일부지역에 세워진 이슬람국가)과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칭기스칸은 백성들이 좀 더 편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할 목적으로 페르시아와 교류를 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뺐기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과의 관계가 험악해 졌다. 칭기스칸은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이 국왕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과를 받으러 갔던 전령들이 수염이 깍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에 격노한 칭기스칸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도시)는 1년 안에는 누구도 함락할 수 없다던 도시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군대는 단 사흘 만에 끝장내 버렸다.

전쟁에서 참패한 호라즘의 국왕인 술탄 무하마드는 북으로 달아났다. 칭기스칸의 명을 받은 두 장군 제베와 수베에테이는 함께 무하마드를 추격했다. 추격전은 1만 킬로미터 가까이 계속됐다. 지구 둘레가 4만 킬로미터이니 지구의 4분의 1바퀴를 돈 셈이다. 술탄 무하마드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죽는다. 이 소름 끼치는 추격전에 유럽 전체가 경악했다.

 

▲ 칭기스칸 시대의 정벌도 /위키피디아

 

(마) 칭기스칸의 사후 자손들의 정복 전쟁

칭기스칸이 1227년 65세의 나이로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은 칭기스칸이 정복한 영토를 2배 이상 늘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제국을 이루게 된다. 그의 아들들은 4개의 한국(장남의 아들 바투가 유럽과 러시아를 정복해 세운 킵차크 한국, 차남 차가타이가 세운 차가타이 한국, 손자 홀레구가 페르시아를 정복해 세운 일한국, 오고타이가 중국에 세운 오고타이 한국-나중에 원나라가 됨)을 만들어 넓은 영토를 통치한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의 아들 바투는 칭기스칸이 죽은 후 1231부터 유럽과 러시아를 정벌하여 킵차크 한국을 세운다. 이 때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나중에 실패한 겨울철 모스크바 정복을 한다. 몽고는 겨울철에 모스크바를 정복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된다. 이 후 킵차크 한국은 240년간 러시아 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손봉균의 역사기행 「칭기스칸의 개혁」 편은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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