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도입부와 종결부②…일시무시(一始無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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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도입부와 종결부②…일시무시(一始無始)
  • 주우(宙宇)
  • 승인 2017.12.0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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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자기 정체성인 일(一)이 시작(始)하나 그 시작이 없다(無始).

 

一始無始는 말 그대로 ‘一’이 시작하기는 하는데 그 시작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구(對句)인 一終無終도 ‘一’이 끝나기는 하는데 그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펴보면 ‘일(一)이 시작한다’는 一始와 ‘그 시작이 없다’는 無始는 대구이고, 마찬가지로 ‘일(一)이 끝난다’는 一終과 ‘그 끝이 없다’는 無終도 대구입니다.

‘자기 선택’과 ‘존재상태’라는 양면성이 있는 一이 시작한다는 ‘一始’ 그리고 그런 시작이 없다는 ‘無始’는 상반된 의미이므로 함께 존립할 수 없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역설을 철학적으로 풀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율배반(二律背反)에 관해 다룹니다.

 

정립(定立):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며, 공간적으로도 한정되어 있다.

반정립(反定立):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도리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무한하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왔는데, 이에 대해 칸트는 이율배반에 빠진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율배반(antinomy)이란 정립 명제와 반정립 명제가 동시에 참이거나 동시에 거짓인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주가 무한한지 혹은 시초가 있는지는 인간의 경험에서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서 우주를 자체적으로 실존하는 전체라고 전제하여 양적인 규정을 부여하고자 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우주에는 시초가 있다’는 정립 명제와 ‘우주에는 시초가 없다’는 반정립 명제 둘 다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기에 인간 경험을 넘어서 있어서 양적 혹은 질적으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거짓이라고 합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인 이것을 칸트는 이성의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한계를 넘어선 우주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면 이율배반에 빠지고 맙니다.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작과 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자신과 관련된 우주의 부분 빼고는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쪽 참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一’ 자체도 우주의 원리가 아닌 각자의 정체성을 가리키므로 一始의 뜻도 우주의 시작이 아닌 각자의 ‘자기 정체성이 시작된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은 ‘자기 선택’이라는 의식적 부분과 ‘존재상태’라는 무의식적 부분으로 나뉩니다. 인간이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주어지는 전자는, 의식해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인간이 자의식을 갖기 전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속해왔고 앞으로도 지속해갈 후자는, 의식해서 선택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선택’이라는 인간의 단기적 관점으로 본다면 一始이지만, ‘존재상태’라는 영혼의 장기적 관점으로 본다면 無始이고 이번 삶이 전체 중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시작이 아니다’는 의미가 됩니다. 세간의 관점에서는 틀림없이 시작과 끝이 있지만, 출세간의 관점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고 삶이 영원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자기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정하는 아함(ahaṁ)일 때는 일시(一始)이지만, 무의식적 존재인 아따(atta 영혼)의 관점에서는 이번 삶이 전체 중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시작이 아니라는 무시(無始)이군요.

 

그리고 無始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바로 앞의 말대로 (영원한 영혼의 관점으로 보면) 이번이 전체 중 하나의 과정이라는 의미도 있고, 시작하는 시점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봄이 시작되었으나 시작이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매년 반복하는 봄이므로 올봄이라고 해서 시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고, 그다음 확실히 봄이 시작되기는 하나 딱 부러지게 특정할 시점이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날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나름대로 밝힌 분이 있습니다. 니까야에 보면 붓다께서 윤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이 갈애(愛, taṇha)에 묶여서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은 알려지지 않으나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고뇌·재앙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 쌍윳따니까야(S15:1~20)

 

우리 인간의 윤회에서 최초의 시작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령 과거 전생을 다 본다 하더라도 최초의 시작점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 언제 왔는지도 그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 세상에 와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간혹 한두 살 때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 예닐곱 살 때 자의식이 분명해지면서부터 기억이 뚜렷해집니다. 자의식이 생긴 시점이 ‘나’의 시작이지만,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죠.

그리고 우리가 이 삼계(욕계·색계·무색계)에 진입할 때도 미토콘드리아 같은 원시 구조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할 수 없는 시점에 진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一始無始는 각자의 자기 정체성이 시작하나 제각각 다르므로 일정하게 공통적인 시작점이 없고, 또한 우리가 그 시작점을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無終에도 끝나는 시점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특정하기 어려운 시점부터 자의식이 희미해지면서부터 기억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자의식이 사라지는 시점이 ‘나’의 끝이지만, 그 시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미래상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삶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친구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인류의 시원을 찾아 마추픽추에 다녀온다며 연락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모 단체에서도 인류의 시원을 찾아서 바이칼호수로 함께 할 여행객을 모집했습니다. 이게 다 각자가 자신의 시원을 찾겠다고 하는 것인데, 특정 시작점이 없다면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인류의 시원(始原)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제가 말릴 수 없으나, 다만 시원에 대해선 “연기에 관련해서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도 같지도 않다’는 통찰에 이르면 전생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붓다의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즉, 연기(緣起)를 체득하면 현재의 모습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과거 상(相 nimitta)과 미래 상(相)을 알아볼 수 있으므로 전생으로도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간의 시선으로는 펼쳐지는 현상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과거나 미래를 훔쳐본(커닝한)다 해도 손쉬운 길이 없고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실제로 우리가 자신의 전생이나 미래를 알아야만 만사가 해결되거나, 또한 이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곤란을 겪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현재에 과거와 미래의 정보가 다 들어 있고 지금의 선택으로 과거와 미래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되, 만일 정해져 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떠나버린 과거로 돌아가서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선택에 따른 귀결을 지금 겪고 있고, 미래를 좌우하는 지금의 선택이 무슨 일이 벌어지게 할지 예상해야 하지만, 완전히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에 특정 결과가 벌어지리라는 기대나 걱정은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실례를 든 친구분처럼 이국만리 자신의 시원을 찾아가는 외부여행보다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찾아가는 내면탐구가 도움됩니다. 끝이 있는 듯이 보이는 죽음에서 오히려 자신의 본향(本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특정 자격이 되면 일률적으로 입학하고 졸업하는 학교와 달리, 특정 시작점과 종결점이 없다는 것은 육체·생물학 중심의 관점을 넘어 정신·영혼 중심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이 때문에 각 존재가 합의로 계약해서 사실상 자발적으로 오고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부모가 실수로 나를 낳아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는 책임 회피성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각자 존재상태에 따라 시작과 끝 지점이 정해지니 숨김없이 그대로 말하면 제각각 수준에 맞는 부모가 정해질 것이므로 결국 자신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거군요.

음, 자신의 수준 탓이지 부모 탓이 아니다? 맞네요. 네, 드디어 이제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어 괴로울 때,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을 하게 만들었느냐고 아버지를 탓하고 엄마를 원망할 수조차 없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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