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⑤…대량 살육 막내리고 소련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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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⑤…대량 살육 막내리고 소련 탄생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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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폴란드, 발트3국은 독립…카프카즈, 우크라이나, 벨루로시로 연방구성

 

1918~1920년 사이 대략 3년에 걸친 러시아내전은 이데올로기는 겉치레일 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회색분자는 존재할수 없었다.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한 사회혁명당(SR)은 백군에 붙었다, 적군에 붙었다 했다. 중간지대에 있는 농민은 백(白)이든, 적(赤)이든 어느 한편을 강요받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군이든, 백군이든 소모품을 끌려가 전쟁터에서 사라져갔다. 내전은 러시아 영토내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 어느날 백군이 들어닥치면 적군의 부역자들이 이유 없이 끌려가 처형되고, 거꾸로 적군이 밀려오면 그 반대편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테러는 양쪽이 모두 저질렀다. 적색 테러, 백색 테러라는 색깔 구분은 있었지만, 양태는 같았다.

1922년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톡에서 백군의 저항이 소멸될 때까지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소련 인구학자 보리스 우르라니스(Boris Urlanis)는 백군 17만5,500명, 적군 12만5,000명등 모두 30만명이 내전에서 죽었다고 추정했다. 내전이 종식된후 질병 등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4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학자와 전문가들에 따라 희생자의 숫자가 다르지만,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인가. 어제까지 함께 살던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어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렀다. 공산주의는 그런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세계 최대 영토를 보유한 러시아에 사상 최초로 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 적색테러 희생자(1918년 크림반도) /위키피디아
▲ 체코 군단에 의한 볼셰비키들의 죽음 (1918,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 /위키피디아

 

내전기간에 소비에트 정부는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등 대러시아 주요지역을 장악했을 뿐, 소수민족이 다수인 우크라이나, 북부 러시아, 카프카즈, 중앙아시아, 시베리아가 떨어져 나갔다. 차르(황제) 체제가 무너지자 비러시아 민족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지역에 독립정부를 세웠다.

 

①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혁명 직전에 차르군과 독일 동맹군의 전선이 펼쳐졌다. 황제는 우크라이나에 자치권을 주면서 전쟁을 독려했다. 자치권을 부여받은 우크라이나 라다(의회) 세력은 파벌 싸움으로 장악력을 잃었다. 혁명후 볼셰비키주의자들이 라다 세력과 권력을 공유하기도 했으나, 이내 갈라져 서로의 정부를 세웠다. 휴전 후에도 독일이 개입해 한때 독일 괴뢰정부가 들어서기도 했다.

독일이 물러나자 민족주의자들이 잠시 장악했다가 백군의 지배를 받았으며, 다시 볼셰비키에 권력을 뺏기는 진통을 겪었다. 1920년에는 새로 독립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개입해 서부 지역을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 1921년 10월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구성되면서 볼셰비키 주도권이 형성되었다.

 

②발트3국, 핀란드

내전 기간에 볼셰비키는 차르제국의 북서부 국경지역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일단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계 볼셰비키들을 부추겼다. 핀란드에서는 우익 구스타프 만너하임 장군이 독일군의 도움으로 볼셰비키의 개입을 물리쳤고, 그후 1939~1945년 두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독립을 유지했다.

차르 영토였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은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들 3개국엔 반러시아 민족주의 정서가 강했다. 독일군이 물러나자 레닌의 지시를 받은 일부 볼셰비키들의 준동이 있었지만, 민족주의자들이 힘을 얻어 1918년 독립을 쟁취했다. 이들 세 나라는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의 일방적 협정에 의해 소련에 편입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③ 코사크족, 카프카즈

러시아 남동부 지역에는 유목민족인 코사크족(Cossacks)이 소비에트 정부의 권위를 거부했다. 이들은 3개 분파를 형성하고, 추장인 아타만(Ataman)의 지휘 아래 거병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가난한 코사크들에게 급진주의 사상을 불러일으켜 내부 동요를 일으켰다. 1918년 1월 오렌부르크의 카자크 정부가 전복되고, 그해 2월 돈강의 카자크 지도부가 무너졌으며, 이어 3월에 쿠반의 카자크 집단이 차례로 붕괴했다. 하지만 코사크 잔당들은 곧이어 안톤 데니킨이 지도하는 백군에 합류해 볼셰비키에 저항했다. 동부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코사크들은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다.

카프카즈 산맥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 지역엔 러시아와 터키가 영토전쟁을 벌이던 지역이었고, 1차 대전 직후엔 영국군이 개입했다.

카프카즈 북부는 코사크족 반란이 진압되면서 일찌감치 볼셰비키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산맥 중심부에는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와 터키계 이슬람 사이에는 이념보다는 민족적, 종교적 색채가 강한 대립이 혁명 이전부터 유혈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석유가 생산되는 카스피해 연안 바쿠에는 일찍부터 볼셰비키들에 의해 코뮌이 형성되었다가 곧이어 영국이 잠시 점령한 후 터키에 넘어갔다. 이 와중에 4,000여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바쿠(아제르바이잔)은 일시적으로 연방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연방을 해체하고 각각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1921년 볼셰비키군이 침공하면서 카프카즈 소수민족의 국가들은 와해되었다.

 

④ 중앙아시아

짜르의 영토였던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볼셰비키와 현지 투르크족의 이슬람세력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볼셰비키는 타슈켄트와 철로 주변의 도시를 장악하며 소비에트를 건설했고,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은 농촌을 장악했다.

투르계 민족들은 분열되었다. 1918년 2월 볼셰비키는 코칸트의 자치정부를 짓밟았다. 이슬람들은 흩어져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독립국을 세우지는 못했다.

 

▲ 폴란드의 영토변화 /위키피디아

 

⑤ 폴란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등 주변 강국에 의해 여러 차례 분할되었던 폴란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패전하고 러시아가 내전에 휩쓸리는 힘의 공백기를 틈타 1918년 독립을 얻었다. 신생 폴란드는 16세기 번영기 때 대폴란드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쪽으로 팽창해 내전중인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1919년 내내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국경선이 수시로 변경되었다. 처음엔 폴란드가 우세했다. 내전에 몰두했던 볼셰비키는 폴란드와 전쟁할 여력이 없었다. 1920년 여름, 내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볼셰비키는 폴란드와의 전선에 병력을 집중 투입해 바르샤바를 압박했다. 이에 폴란드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러시아를 역습했다.

두 나라는 1921년 9월 리가(Riga) 조약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400만명의 우크라아니인과 100만명의 벨라루스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획득했다. 1939년 스탈린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러시아에 유리한 국경을 새로 그었다.

 

⑥ 시베리아에서 백군의 마지막 저항

볼셰비카의 통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역이 시베리아였다.

옴스크를 중심으로 한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정부가 붕괴되었지만, 그리고리 세묘노프(Grigory Semyonov)의 트란스바이칼 공화국이 일본군의 지원을 얻어 시베리아 동토를 지켰다. 세묘노프는 몽골족의 갈래인 브라야트의 피가 흐르는 인물로, 몽골어와 브리야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 러시아의 만주주둔군으로 백군을 조직했다. 1918년 여름, 세묘노프의 백군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바이칼 지역 요충인 치타(Chita)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후 치타는 2년 동안 일본군 제5군단의 사령부가 위치하게 된다.

세묘노프는 이어 트란스바이칼 공화국을 수립하고 자신이 우두머리에 앉았다. 그리고 유대인을 포함하는 거국적인 내각을 결성하고 시베리아에서 준동하는 빨치산과 적군에 대항했다. 그는 일본의 도움으로 시베리아 지역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시베리아에서 백군을 몰아내면서 1920년 4월 극동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일명 치타공화국(Chita Rupublic)으로 불리는 이 나라는 겉으로는 독립국 행세를 했지만, 실제는 일본이 시베리아에 군사력을 증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1920년 들어 시베리아에서도 상황은 적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은 러시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일본만이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에 7만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도 더 이상 빨치산의 저항을 받아 군대 주둔이 어려워지자 철군을 시작하고 1922년말에 블라디보스톡에 완전 철수했다.

앞서 1921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일본 지원을 받은 백군들이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했지만, 곧 붕괴되었다. 치타의 극동공화국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함으로써 백군 세력을 러시아 영토 끝에서 뿌리를 뽑았다.

곧이어 1922년 11월 15일 극동공화국은 모스크바에 청원을 넣어 소비에트에 합병되었다.

 

▲ 1922 소련 /위키피디아
▲ 1950년 소련 /위키피디아

 

⑦ 소비에트연방 구성

1922년 12월 23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제10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 벨로루시 공화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으로 통합키로 하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했다. (중앙아시아는 이때 러시아의 속령이었다.)

이로써 4개의 공화국은 연방을 형성했으니, 옛 차르의 러시아 영토는 소련(USSR: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의 이름으로 다시 결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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