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의 통신보국②…합종과 연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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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의 통신보국②…합종과 연횡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0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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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 사업 초기에 선경과 합작하기로 진행하다 결렬

 

1991년초의 어느날에 있었던 일이다.

포철의 김권식(金權湜) 상무등 이동통신추진팀들이 미국의 팩텔(PACTEL)사 요원들과 함께 이 이동통신사업추진에 관한 업무제휴 협약을 체결키로 하고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신부는 90년8월 이미 공청회를 거쳐 통신사업 구조조정 기본방침을 확정, 이동통신분야는 점진적으로 경쟁을 허용하기로 공표해 놓고 있었다. 이동통신사업자 선정 스케줄은 92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었다. 정부의 방침이 확정되자 선경과 포철은 물론 코오롱, 동부, 동양, 쌍용등 대기업들이 이동통신사업에의 참여를 위해 외국의 유명통신회사들과 업무제휴를 추진해 나갔다.

협약서의 서명란은 3명의 사인을 위해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3명의 서명자는 팩텔과 포철, 그리고 선경의 대표자였다. 포철과 팩텔의 대표자들은 서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선경측 대표가 오기를 기다렸다. 선경측은 그동안 팩텔의 기술이전 조건이 불확실하다느니, 참요사의 지분율을 먼저 정하자느니 하면서 포철측과 다른 견해를 제시해왔으나 컨소시엄에 참여치 않겠다는 입장은 분명히 하질 않았다. 예정시각이 한참 지나도록 선경의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다. 포철측 사람들은 선경측이 협약서 서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판단, 팩텔측과 단독으로 협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91년4월20일 선경측의 서명란은 비워둔채 포철의 김권식 상무와 팩텔측의 아지즈 쿼러시 부사장은 이동통신사업추진을 위한 업무협조 기본협약서에 서명했다.

황경로 전 포철 회장은 선경과의 결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포철은 선경과 50대50의 비율로 이동통신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선경은 지분비율에는 호의적 반응이었지만, 경영권을 달라고 고집했어요. 따라서 더이상 선경에 내줄 수 없다고 판단해 독자적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경측은 다른 견해를 밝혔다.

“물론 선경이 컨소시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팩텔과 합작하기에 앞서 지분율과 기술이전 조건등을 우선 약속을 받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팩텔이나 포철이 명확히 하지 않은 채 합작계약만 먼저 체결하자는 겁니다.”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서 94년 1통과 2통의 사업자선정에 이르기까지 선경과 포철은 늘 경쟁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선경과 포철은 처음에는 하나의 컨소시엄을 형성, 함께 이동통신사업경쟁에 뛰어들기로 했던 사이 좋은 관계였다. 이동통신사업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이전, 막후에서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모색했던 숨은 사연이 있다.

그러나 외국참여회사인 미국 팩텔사와 마지막 협약서를 체결하는 순간 선경과 포철은 영영 결별하고 말았다.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외치며 일관된 산업영역에만 투자해온 유화재벌과 세계2위(당시는 3위)의 철강그룹은 결국 합쳐질 수 없었다.

만일 그 때 선경과 포철이 하나의 컨소시엄을 구성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과거의 사실을 가정으로 전제하고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으나, 선경과 포철측은 컨소시엄을 함께 했더라면 더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라는데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기술력, 자금력등에서 다른 컨소시엄보다 월등해 사업자로 선정될 것은 분명하나, 선경의 최종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사실에다 포철의 박태준 회장이 민자당 최고위원이라는 사실이 특혜의혹과 정치적 파장만 오히려 크게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결별 당시에는 이런 예측을 했던 것은 아니고 두 회사의 자사이기주의와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때 서로 결별한 것이 결국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는지, 새정부 출범후 우여곡절을 거쳐 선경은 1통을, 포철은 2통을 각각 지배하면서 경쟁하게 됐으니, 세월의 흐름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그러면 이동통신사업의 양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선경과 포철이 연형(連衡)과 합종(合縱)을 하게된 과정을 살펴보자.

포철측에 따르면 이 무렵 선경의 최 회장이 포철-팩텔의 연합팀에 합류하자고 제의해 왔다고 한다. 박태준 회장은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한동안 선경과 포철은 팩텔과 함께 회의도하는등 한팀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91년 4월 펙텔과의 기본협약 체결을 앞두고 선경과 포철은 갈라서고 만 것이다.

포철측은 “선경이 포철팀에 합류, 이동통신의 중요성을 깨달아 결별 전에도 미국 등지에 파트너를 구하러 다녔고, 결국은 딴 살림을 차렸다”고 서운해 했다. 반면 선경측은 “포철보다 앞서 86년부터 이동통신사업을 추진해왔으며, 92년 사업자선정직전에도 외국의 합작파트너를 교체할 정도로 외국회사와의 합작에는 줏대 있게 행동해 왔다”고 반박했다.

포철과 결별한 선경은 독자적으로 해외합작 파트너를 찾아 나섰다. 91년에는 미국의 테네시주에서 US셀룰러사와 함께 이동전화사업에 참여했다. 선경은 이어 미국의 벨사우스(Bell South)와 합작계약을 체결했으며 사업자 신청을 두달쯤 앞두고 벨사우스와 결별, 미국의 또다른 무선전화회사인 GTE사와 손잡는다. 선경은 “벨사우스가 지분및 기술이전문제에 대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92년 8월 이동통신사업권 반납으로 선경은 또다시 GTE사와 헤어져야 했다.

이동통신사업은 국내기업은 물론 외국기업까지 끼어들어 이리 붙고, 저리 붙을 정도로 큰 이권이 있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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