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①] 공격받은 미국,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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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①] 공격받은 미국, 선전포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0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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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 ‘악의축’과의 전쟁 선포…문명과 야만의 충돌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서 한 블록 건너 편에 세인트 폴 성당이 우뚝 서 있다. 빌딩 숲에 묻혀 왜소하게 보이던 이 성당이 테러 이후 새로이 부각된 것은 110층짜리 건물 두 동이 사라져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230여년 역사의 이 성당이 건재했다는 사실이 미국의 정신이 살아있고,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미국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세인트 폴 성당은 1766년 건축돼 ‘하느님의 전당’으로 봉헌된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789년 조지 워싱턴 장군은 독립전쟁을 승리하고, 뉴욕 연방청사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후 의원들과 함께 ‘신이 미국을 가호하기를’(God Bless America) 기원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공격으로 미국 경제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두 동이 무너졌을 때 주변에 있던 10여 동의 현대식 건물들이 무너지거나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지척에 있던 세인트 폴 성당은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유리창 한 장도 깨지지 않았다.

 

테러와 전쟁, 경기침체로 얼룩진 2001년, 미국인들 마음 속엔 좌절과 허탈, 분노와 공포가 교차되고, 경제가 단층처럼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9·11 테러후 미국은 두가지 도전에 직면했다. 그 첫째는 테러에 앞서 2001년 3월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것이요, 둘째는 국제 테러 집단의 보복을 극복하고 이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세계무역센터와 금융중심지 월 스트리트 사이에 또 다른 성당이 있으니, 그것은 트리니티 성당이다. 트리니티 성당과 세인트 폴 성당은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지만, 현대식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세인트 폴 성당은 21세기 첫 전쟁의 기념비적 장소로 새롭게 각인된 반면에, 트리니티 성당은 미국 금융심장부가 다시 박동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테러 직후 당시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성당이 전쟁의 폐허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뉴욕 시민과 미국인들의 강함과 재기를 웅변하는 메시지”라고 강조한 바 있다. 사상 초유의 재난을 당하면서도 건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두 신의 제전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새해에 어떤 어려움과 도전이 닥쳐오더라고 강인하게 일어설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테러 1주년을 맞을 때 필자는 세인트 폴 성당과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참사의 현장은 원자폭탄이 터진 것처럼 커다란 웅덩이가 패였고, 철조망 여기저기에 희생자를 기리는 꽃이 꽂혀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에는 “우리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테러의 잔해는 완전히 제거됐지만, 미국인들 마음의 응어리는 굳어지고 있음을 읽을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구소련 와해 이후 해이해졌던 잠자는 사자 미국은 수천명의 죄없는 사람이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죽어간 사건을 계기로 무섭게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 맨해튼 남단 세인트 폴 성당의 옛모습과 지금의 모습 /트리니티 성당 홈페이지

 

야만과의 전쟁 선포

 

중앙아시아가 이처럼 미국의 언론에 각광을 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9·11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집단이 은신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그 이웃나라인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지도가 연일 신문과 TV에 나오고, 그곳 정부와 주민의 동정이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호텔에는 전세계에서 기자들이 몰려 하루 숙박비가 엄청나게 뛰어올랐다고 한다.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초원과 넓게 펼쳐진 사막과 고원지대로 구성돼 있다. 중앙아시아는 몽골고원에서 파미르 고원, 헝가리 초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을 포괄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거의 소외지대나 다름없었다. 역사학자들이 동양사와 서양사로 구분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거의 연구하지 않았던 것도 그곳에 산 사람들이 문명 세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혹심한 추위와 타는 듯한 더위, 고원지대의 매서운 바람,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의 극도로 험한 조건에서 생존했다. 야만 생활에 젖어있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추위와 목마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역사 과정에서 문명세계 주위를 배회하다가 풍부한 농작물, 도시의 호사스러움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 문명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이 역사의 그물을 찟고 등장할때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중국 한나라와 로마제국을 괴롭혔던 훈(흉노)족, 징기스칸의 몽골족, 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 제국이 바로 그것이다.

5세기 중엽, 로마제국은 러시아 초원을 건너 파죽지세로 달려온 훈족의 앗틸라 추장의 공격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앗틸라는 로마 제국 변방에 포진했던 게르만족을 압박했고, 게르만의 부족들은 로마 영내로 들어갔다. 앗틸라는 다뉴브 강을 건너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진군했다. 그들은 어느 지역을 점령하면 식민화하지 않고 파괴해 버렸다. 그들은 동양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 하북(河北) 지방을 교란하다가 한 무제의 반격으로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2세기 동안 초원을 전전하다가 유럽 문명을 공격했던 것이다.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징기스칸 역시 중앙아시아의 야만성을 또한번 인류 역사에 드러냈다. 몽골군은 문명의 파괴자였고, 학살자였다. 그들은 도시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초원을 만들었고, 지금의 인도 국경지역을 공격할때는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고 사서에 나올 정도로 생명을 모두 죽였다. 약탈자는 중국의 남송을 멸망시키고, 유럽의 당시 최대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영지(헝가리)까지 침공, 파괴를 일삼았다.

 

문명 세계를 질시하고 파괴하고, 무차별 죽음을 초래한 그 야만성이 또다시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인류 역사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혹자는 9·11 테러참사를 새무엘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 이론에 대입,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의 분쟁으로 보기도 하지만, 헌팅턴 교수는 세계무역센터 붕괴후 자신의 저술이 테러를 의미하지 않았다고 밝혀 섣부른 해석에 쐐기를 박았다.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훈족이나, 몽골족은 문명을 파괴했지만, 결국 문명에 동화되거나 멸망하고 말았다. 문명이 야만의 폭력성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역사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9·11 테러 사건을 계기로 역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형성했다. 서양사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기 앞서 앗틸라의 공격이 있었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징기스칸의 침략이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테러 참사를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은 9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세계 도처에 불확실성의 먹구름이 뒤덮혀 있지만, 인류 역사에 큰 소용돌이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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