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 주의로 중국을 제패한 홍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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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주의로 중국을 제패한 홍타이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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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대국에 겁내는 조선, 당당한 여진족

 

우리 역사책을 읽다가 외국의 침략을 당할 때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당대의 지도자들이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때 그랬고, 병자호란때도 그랬다. 실패는 한번이면 족하다. 두 번의 실패는 파멸을 가져 온다. 왜란, 호란을 거치면서 구한말에는 또다사 열강들의 침략을 받아 결국 나라를 빼앗겼다. 지금 또 그럴 위기에 놓여 있다.

임진왜란의 굴욕을 당한지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임금이나, 신하 모두가 무능했다.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했고, 국가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실용은 팽개치고 이념 논쟁에 빠졌다. 2천년전에 죽은 공자와 맹자를 읊어대며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졌고, 한족왕국을 하늘처럼 모셨다. 외적이 침입하면 상국이 막아주겠지 하는 생각에 군사력을 키우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웃 민족은 밀려오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재화를 쌓아 무장력을 키우고 만만한 반도를 길목삼아 침공했다. 그런 모습은 500년전이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KBS 기자 출신의 장한식씨가 쓴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2015년, 산수야 출판)는 책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 책 표지/촬영

우선 기자가 본업의 바쁜 와중에서 역사 서적을 썼다는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베이징 특파원을 하면서도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참고한 사료들이 상당하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주제 선정과 시각이 신선했다. 홍타이지라는 조선왕국을 침공한 적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고, 우리입장이 아니라 만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소아병에 걸려 있는 우리 역사물들에 새로움을 던져 주었다. 게다가 명청 교체기의 15~16세기의 상황을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도되고 있지만,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제 도입단계에 있는 경제적 관점으로 과감하게 논리를 전개한 것은 흥미로웠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북쪽 사람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아주 잘 견딘다. 행군할 적에도 쌀가루만 물에 타서 마시는데 6~7일 동안 먹는 식량이 쌀 4~5되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람이 불건 비가 오건 눈서리가 내리건 밤새도록 한 데서 거처한다…”

1619년 후금과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조선 관리가 쓴 건주문견록의 내용이다.

 

척박한 땅에서 소수의 인구로 중국 대륙을 정복한 만주 후금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한 시작이었다.

1234년 금(金)나라가 몽골(元)에 망한 이후 여진족은 나라가 없는 상태였다. 원(元)과 명(明)의 통치 술책에 휘말려 소규모 부락단위로 갈래갈래 찢어져 살면서 수백 년 간 조선과 명의 변경을 약탈하거나 원조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던 여진족이 17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을 석권해 대륙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이 책은 풀어나갔다.

 

저자는 책의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만주족의 성공 이야기는 소국이 대국을 어떻게 다루고 대할 지에 대한 교훈을 준다. 대국이라고 겁내고 머리를 조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오랑캐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 인구 100만~150만의 만주족이 1억~1억5천만의 대국 명나라를 정복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명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 만주족에 망한 것이 아니다. 만주족의 집요하고 치밀한 공략이 주효한 결과다. […] 만주족은 특히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도 정복했다. 우리의 과거 실패를 이해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만주족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성은 다분하다.”

 

▲ 홍타이지 시대 동북아 /위키피디아(중국판)

 

그러면 작가 장한식이 홍타이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동기는 무엇일까.

그의 의문은 1600년까지만 해도 조선에 비해 인구수나 생산력, 문화전통에서 한참 뒤졌던 가난한 만주족이 불과 한 세대 뒤에 한민족을 무릎 꿇리고 주인 노릇을 하게 된 사실, 더 나아가 드넓은 중원의 패권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장한식은 그 배경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16세기 은(銀)이 일으킨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을 만주족은 잘 활용한 반면에 조선은 상공업을 억압하고 세계사적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문주족의 경제사회체제가 은이 준 기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었다면, 조선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에 갇혀 은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집단사유(集團思惟)의 차이다. 저자는 이 대목을 강조했다.

조선의 지배층이 즐거이 명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면 만주의 지도부는 반대로 명을 정벌하고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조선은 중국을 ‘하늘(天)’로 보고 섬기려 한 반면 만주족은 정복할 ‘땅(地)’으로, 지배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충효의 유교이념이 구현되는 예의지국을 건설함으로써 ‘작은 중화’(小中華)가 되기를 희망했던 조선은 오랑캐이면서도 오랑캐 근성을 버린 이른바 순이(順夷), ‘착한 오랑캐’였다.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에 가뒀던 탓에 조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잠재능력 이하로 작아지고 약해져갔다.

하지만 만주족은 100배가 넘는 인구에다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하던 명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격차에 기가 죽지도 않았다. 역이(逆夷), ‘나쁜 오랑캐’를 자처했던 만주족은 스스로를 작지만 강한 족속으로 단련시켰던 까닭에 어느 순간 조선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존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두려워할 만한 상대를 겁내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바로 ‘나쁜 오랑캐 정신’이다.

 

▲ 홍타이지(청 태종) /위키피디아(중국판)

 

홍타이지(愛新覺羅 皇太極, 애신각라 황태극 1592~1643)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들판에서 조선 왕 인조를 무릎 꿇린 인물이다. 그 결과 홍타이지는 ‘한반도 정복자’라는,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인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저자는 홍타이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한반도와 악연으로 맺어진 홍타이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홍타이지의 ‘오랑캐 정신’을 높게 평가했다. 당시 조선보다 가난하고 약했던 만주족이었지만, ‘오랑캐 전략’을 자신들의 강점으로 잘 살렸다는 것이다.

오랑캐 전략의 핵심은 ‘허리를 굽혀 살지 않겠다’는 굳센 자존심과 투지, 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칠줄 모르는 정력, 수렵민족 특유의 발 빠른 지략, 호화사치를 배격하는 내핍의 검약 기풍, 명분보다 실질 중시, 개인보다 조직 우선 등으로 요약된다. 집단 사냥으로 먹고 사는 늑대 무리의 습성과 유사하다고 할까. 춥고 배고픈데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 싸인 최악의 환경에서 발전시킨 극한의 생존전략이다. 적은 인구에 생산력도 보잘 것 없었지만 오랑캐 전략으로 날을 세운 만주의 집요한 공세에 중국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책 속의 책>

저자 장한식은 ‘책 속의 책’이라는 부록을 추가했다. 이 책의 주제의식은 홍타이지가 이끈 만주국이 천하를 제패할수 있었던 성공비결과 조선이 오랑캐에 무릎 꿇은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있었다. 만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중국의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했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병자호란(조만전쟁)을 다룬 것이 부록이다.

그는 조선이 만주(후금, 청)를 연구하고 조금만 유연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충분히 전쟁을 피할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이 없는 법.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그것을 거울삼아 또다른 실패를 막는 것이 중요할 분이다.

 

<저자 : 장한식(張漢植)>

서울대학교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고,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귀국 후 뉴스제작부장과 경제부장, 사회부장, 해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통로로 만주족을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의 역사와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아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1999 풀빛),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2009 행복한나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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