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삼척 출항의 재조명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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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삼척 출항의 재조명①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17.07.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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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웅 이사부기념사업회 기획이사(해양모험가)]

이사부 장군은 신라의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하여 육로로 진격하였고, 실직성을 탈환하여 지증왕 6년(505) 실직군주가 되었다.

실직군주로서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을 잠시 멈추고 실직에서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였다. 이사부 함대는 실직의 오십천 하류 정라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동해안 전체를 보아도 이만한 조건을 갖춘 자연항은 없었다.

정라진 건너불은 우산국과 거리가 가깝고 정동방향이며 송림으로 싸여있어 파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또한 인근에서 선박재료를 오십천 강물을 이용하여 쉽게 옮길 수 있으며 배후도시인 실직성과 실직 제일의 갑자평야가 있었다.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사부 장군은 북진정책을 잠시 멈추고 왜구의 피해를 막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산국 정벌을 먼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지증왕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이사부장군의 전략인지 알 수 없지만, 우산국을 복속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의 피해도 막을 수 있었으며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신라가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500년 전 울릉도로 간다는 것은 명령과 유망, 표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이사부가 지혜 많은 젊은이고, 우산국 정복이 신라의 숙원사업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하기 어렵지만, 과연 이사부 전선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선에는 돛을 달았을까? 이사부장군도 이 문제로 선박 기술자들과 많은 토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신라 전선은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사부 전선은 신라 전선 최초로 돛을 달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목우사자를 계획할 이사부 장군이라면 당연히 비밀병기인 전선 제작에 다른 나라의 최신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산국을 정벌하기 까지 6~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이사부 장군 영정 /강원도 삼척시 보관

 

이사부 장군은 실직에서 전선을 만든 후, 하슬라를 탈환하여 국경을 넓히고 하슬라 군주가 되었다. 그 후 군사와 군비를 보충하여 실직의 군사와 함께 512년 6월, 이사부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가서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은 우산국을 복속하여 공물을 얻는 것 보다,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들의 침략을 근절 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의 불패 신화와 거북선의 신화가 있다면, 동해의 이사부장군은 한 번의 승전으로 200년간 신라를 평온케 한 목우사자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현명한 판단과 지략이 오늘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와 함께 12해리의 영토와 200 해리의 경제수역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영토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1. 머리말

 

삼척(三陟)은 과거 ‘파사이사금 23년(102) 8월에 실직곡국(悉直谷國)과 음즘벌국(音汁伐國)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해 줄 것을 청하였다.

[중략...] 왕이 노하여 군사를 몰아 음즙벌국을 치니, 음즙벌주와 그 무리가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과 압독(押督)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이때부터 실직(悉直)은 사로국(신라)에 속하다가 고구려 장수왕 56년(468)에 빼앗긴 후, 이사부 장군이 실직성(悉直成)을 탈환하여 지증왕 6년(505) 실직군주(悉直軍主)가 되었다.

이사부장군은 신라의 선봉장이 되어 지증왕의 북진정책과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등 영토 확장과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였다. 특히, 신라는 수군이 취약한데도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이사부 장군의 지혜와 전술이라고 본다. 이사부는 진골 출신의 사내대장부요, 어린 시절 사부(師夫)로부터 고구려, 백제, 가야, 왜 등 주변국의 상황과 침범에 따른 피해를 잘 알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무술과 병법을 함께 공부하였을 것이다.

서기 500년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이사부는 젊은 나이에 변방의 관리로 있었지만, 옛 거도(居道)의 마숙(馬叔) 술책(術策)을 이용하여 가야를 점령하고 지증왕의 북진정책을 수행할 신라군의 선봉장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이사부는 특유의 전략과 전술로 북진하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신라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신라의 옛 영토인 실직성 까지 탈환하여 지증왕 5년 9월에 실직 이남의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게 되었고, 지증왕 6년 2월에 실직군주로 임명되어‘북진할 것인가? 동해바다의 우산국을 먼저 공격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실직항에서 이사부함대를 제작하여 우산국을 먼저 정복하였고 본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주변국들이 서로 영토전쟁을 하므로 전략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한지는 당시의 최고 지도자들만이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사부장군은 우산국을 먼저 복속시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왜(倭)로부터의 침범을 단절시키고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여 안정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필자는 삼척 정라진에서 자라면서 70년대 말 부터 향토사진을 기록하고 있으며, 향토지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이사부함대 출항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사부 전선(戰船)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으나 우산국을 정복하였을 시기인 1500년 전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아 당시의 전선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필자가 지난 십 수 년간 해양탐사선 코스모스호 및 소형보트 제작 경험과 탐사대활동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에서 하슬라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한 과정을 가설로 추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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