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들’의 절규를 잊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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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딸들’의 절규를 잊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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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0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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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의 딸들’의 절규를 잊었는가? >>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7월 5일 베를린 교외에 묻힌 작곡가 윤이상의 묘를 참배하고 윤 씨의 고향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신문기사는 전하고 있다. 김여사는 ‘윤 선생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선생의 마음이 풀리시길 바란다.’는 감상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윤이상은 1984년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공작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했고, 김일성의 75회 생일을 기념해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곡을 바쳤다. 평양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음악당이 있다. 그러나 윤이상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따로 있다. 그는 한 유학생을 북한으로 유인하여 그의 가정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재독 유학생 오길남씨는 파독 간호원이었던 신숙자씨와 1972년 결혼하여 두 딸 혜원 규원을 두고 있었다. 1985년 오길남 씨는 유학 15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윤이상은 오길남 박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한다. 이제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북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써달라.’고 말했다.

오길남 박사는 1985년 겨울 윤이상의 회유와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북한 요원의 말을 믿고 월북한다. 아내 신수자씨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거기가 대체 어디인데 가려고 하느냐고? 그러나 이미 북한도 조국이며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젖어있던 오박사는 황소고집으로 자신의 가족을 영원한 지옥으로 몰아넣은 결정을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아내 신숙자 씨는 당신의 이 결정이 크나큰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처럼 말하였다. 잘못된 결정을 알게 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85년 12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던 순간에 이미 오박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12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는데 그 추운 날씨에 비쩍 마른 화동들이 색동저고리에 스타킹 차림으로 꽃을 건네더라. 그 순간 아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들에게서 우리 애들의 장래를 본 것이다. 가슴이 섬뜩했다." 북한에 도착하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으며 오길남 박사는 평양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매일 13분씩 방송을 했다. 기가 막혔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당의 호출을 받았다. 그에게 임무가 하달됐다. "유럽으로 가 남한 유학생 2명을 포섭, 입북시켜라." 경제학자에서 대남방송 요원으로, 다시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로 가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은 11세, 규원은 9세였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 씨는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달라.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 도망쳐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한 남자에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 얼마나 진실로 위대한 여인인가? 비록 자신과 사랑하는 두 딸이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극한의 고통을 겪을지언정 또 다른 가족을 이 지옥으로 데려오는 범죄에 가담하여서는 안 된다고 남편에게 탈출을 권한 여인, 신숙자 씨는 바로 1942년 통영에서 태어나고 통영에서 자랐으며 통영초등(45회) 통영여중(9회)을 졸업한 ‘통영의 딸’이었다. 2011년 5월 통영에서는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을 구출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요덕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오길남 박사가 귀국한 후 조선일보 최장원 기자는 1992년 10월 초 그와 인터뷰를 처음 가졌다. 그리고 1993년 월간조선 1월호에 '귀향한 자수간첩 오길남의 절규'라는 제목으로 남과 북을 오간 한 이상주의자의 파괴된 삶과 북한에 인질로 잡힌 세 가족을 돌려달라는 그의 호소를 전한 적이 있다.―당신은 유인 납북됐다고 말하지만, 북한에 대한 환상에 젖어 가족을 끌고 간 장본인이다. 그리고는 비겁하게 가족을 팽개치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다. 가족을 구해 달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나는 바보였다.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내 삶은 1986년 가족과 헤어진 날로 끝났다. 가족을 붙잡고 용서를 빌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제발 죽지만 말고 살아 있어 주기를 소원한다.”

오길남 박사는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인권단체에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간청은 묵살당했다. 그토록 정의와 인권을 부르짖던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어찌하여 북한에 대하여는 이토록 무기력하며 침묵하는가? 2012년 북한 당국은 2012년 신숙자 씨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서한으로 유엔에 전달하였다.

대통령 영부인 김정숙 여사께서는 윤이상이라는 김일성 주의자를 위하여 울 것이 아니라 바로 북한에서 짐승이하의 고통을 겪고 있는 ‘통영의 딸’들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 김정숙 여사는 조국을 배신하고 한 유학생의 가정을 파괴한 인면수심의 공산주의자 윤이상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원할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랑하는 가족을 지옥에 두고서 폐인처럼 지나는 오길남 박사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7. 7. 7.) /공유한 글입니다.

 

▲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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