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의 베트남 세 왕녀가 맺어준 800년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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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베트남 세 왕녀가 맺어준 800년의 인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3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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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의 여왕 昭皇…비운의 왕비 陳氏容…운명을 바꾼 順天

 

올해로 한·베트남 수교 25주년을 맞는다. 면밀히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는 1956년 베트남 공화국(월남)과 수교했지만,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됐고, 지금의 베트남(당시 월맹으로 불렀다)과는 1992년 재수교한 것이다.

수교 25주년을 맞아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는 무용극이 있다. 바로 ‘800년의 약속’이라는 음악 무용극이다.

이 무용극은 한국, 베트남, 독일의 세나라 사람들의 하모니로 만들어졌다. 한국인으론 베트남에 살면서 한·베트남 문화교류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유오가 무용을 맡고, 정선구가 대본을 맡았다. 베트남인으로는 베트남과 중국, 이집트, 태국, 캄보디아 등지에서 활동한 배우 부이 녀 라이가 참여했고, 독일인 피터 신들러가 음악 작곡과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를 맡았다.

이 무용극은 2015년에 베트남에서 초연했고, 한·베트남 수교 25주년을 맞아 올들어 서울 강남구, 경기도 안산시, 충북 청주시에서 공연했다.

주제는 1226년 대월국(大越國, 따이비엣)의 왕자 리 롱 뜨엉(李龍祥)이 난을 피해 험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험하고 먼 바닷길을 헤치고 고려의 옹진 땅에 도착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후손들은 화산(花山) 이씨를 형성한다.

이 무용극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춤이 나를 부르고, 800년 전의 어떤 인연이 나를 부르고, 베트남과 고려 땅의 바닷길이 나를 불러 오른손 높이 들고 화답한다. 나비가 되어버린 찌에우 호앙의 날개짓과 함께"

 

▲ 음악무용극 '800년의 약속' 공연 모습 /유튜브

 

찌에우 호앙, 그는 누구인가.

베트남 리(李) 왕조(1010~1225)의 9대 마지막 왕인 소황제(昭皇帝)를 일컫는 말이다. 줄여서 소황, 그가 바로 베트남어로 찌에우 호앙이다.

소황은 한 많은 생을 살았다. 1218년 리(李) 왕조의 제8대 혜종의 둘째 공주로 태어났다. 이름은 불교식 팟킴(佛金)이다. 여섯 살에 왕으로 즉위하고, 이듬해 리 왕조를 무너뜨린 쩐(陳) 왕조의 초대 왕 태종(太宗)의 왕비가 된다. 공주였을때 작호는 소성공주(昭聖公主), 때론 폐후 이씨(李廢后)로 불릴 때도 있다.

그는 베트남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다. 재위 기간은 1224년 10월~1225년 12월(음력). 햇수로 2년이지만, 실재 재임기간은 1년을 갓 넘는다.

 

① 소황…여섯살, 베트남 유일의 여왕

 

소황의 기막힌 사연은 아버지 혜종(惠宗)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인 7대 고종(高宗) 때인 1208년, 반란군이 수도 탕 롱(昇龍, 하노이) 궁중에 난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종과 태자는 각기 다른 곳으로 피란을 떠났다. 태자 리 삼(李旵)은 홍 강 텔타 지역의 호족 쩐(陳)씨 가문에 몸을 의탁한다. 태자는 陳씨의 병력을 동원해 반란군을 진압하고 궁궐에 복귀했다. 이때 고종이 병사하고, 태자가 16세에 제위에 오르는데, 8대 혜종(1211-1224)이다.

혜종이 陳씨 근거지에 피난했을 때, 그 가문의 최고 실력자 쩐 리(陳李)의 딸 쩐 띠 둥(陳氏容, 이하 진씨용)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 그러자 진씨용의 오빠 쩐 뜨 카인(陳嗣慶)이 무력으로 황태후를 제압하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혜종은 병약했고, 나중엔 정신까지 이상해졌다. 권력은 혜종의 처형인 쩐 뜨 카인의 손에 넘어갔다.

혜종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공주 둘을 낳았다. 큰 딸은 뚜앙 띠엥(順天, 이하 순천)이고, 둘째 딸은 찌에우 호앙(昭皇, 이하 소황)이었다. 두 딸의 나이 터울은 2살.

혜종은 진씨 가문의 압력에 못이겨 큰 딸 순천을 쩐 뜨 카인의 조카인 쩐 리에우(陳柳, 진류)에게 시집을 보냈다. 혜종은 왕비도 진씨, 사위도 진씨로, 진씨 세력에 포위되었다. 혜종의 왕비 진씨용의 입장에서 보면 친조카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위를 맞은 것이다.

쩐 뜨 카인이 사망하자 사촌 아우 쩐 투 도(陳守度, 이하 진수도)가 등장해 진씨 권력을 이어 받았다.

혜종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정신병은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 그는 욍위를 넘기기로 결심했다.

혜종은 둘째 딸 소황에게 왕위를 넘긴다. 소황의 나이는 여섯 살, 철부지였다. 큰딸 순천에게 왕위를 넘기자니 사돈 진씨 가문의 권력이 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배필이 없는 둘째 딸에게 왕위를 넘겼다. 1224년 10월(음력)의 일이다.

베트남 사학자 응오 씨 리엔(吳士連)은 “혜종이 스스로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며, “어린 딸이 아니라 가문의 유능한 인재를 후계자로 삼았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이 왕가에는 유력자들이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리 롱 뜨엉(李龍祥, 이하 이용상)이었다. 그는 고종의 동생이자, 혜종에게는 숙부다. 건평왕(建平王)의 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이용상은 평해공 이군필, 진일조(陳日照)과 함께 삼공(三公)이라 불리며 혜종 즉위 이후 국정을 도왔다.

하지만 혜종은 이씨 친척들을 믿지 못하고 대책없이 여섯 살 딸에게 대권을 물려주었다.

 

▲ 소황이 진경(태종)에게 빈랑 보자기를 주는 그림. /베트남 사이트

 

② 진수도의 왕위 찬탈극

 

陳씨의 실력자 진수도에겐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다. 그는 치밀하게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다.

진수도는 소황의 주변을 철저히 봉쇄하고, 진씨 아이들을 측근으로 붙였다. 그중 하나가 당질인 쩐 카인(陳煚, 진경)이었다. 소황과 진경은 1218년생 동갑이었다. 여섯 살짜리 어린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에게 여왕과 신하의 지엄한 관계는 무의미했고, 그저 소꿉친구일 뿐이었다.

진수도는 진경을 눈여겨 보았다. 어린 아이가 똑똑하고 야무진데가 있었다. 저 녀석이면 임금 자리를 꿰어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경에게 소황 주변에 붙어서 친하게 지내게 은근히 부추겼다.

어느날 진경은 진수도에게 소황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쩔시구, 진수도는 꾀를 냈다. 그는 빈랑(檳榔, 열대지방의 열매)을 보자기에 담아 진경에게 주고 소황과 가지고 놀라고 했다. 두 소년·소녀는 그 보따리를 가지고 놀았다.

소황은 빈랑이 든 보따리를 진경에게 던졌고, 진경이 그것을 받았다. 베트남에서는 옛날에 미혼 여성이 빈랑을 넣은 보따리를 미혼 남성에게 던져 배우자를 선택하는 풍습이 있었다.

 

▲ 열대성 열매 '빈랑'

빈랑은 아열대 지방인 동남아에서 자라는 나무로 씹으면 환각 작용이 있다. ‘씹는 각성제’로 알려져 있다.

대만에서는 빈랑 열매를 후추 잎에 식용 석회와 함께 씹고, 중국에서는 열매 그대로 씹는다고 한다. 빈랑은 씹을수록 각석효과가 높아지며 약간의 환각 효과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마약이라면 관대함이 조금도 없는 중국과 대만에서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빈랑의 판매나 소비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진수도는 李 왕조를 무너뜨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소황이 빈랑 보따리를 진경에게 던졌으니, 전통 풍습에 의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수도는 陳씨 가문을 모두 불러 놓고 두 아이의 결혼을 선언했다. 이때 李 왕실의 사람은 소황 이외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물론 상국(上國)인 중국 송(宋)나라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송나라는 몽골에서 발원한 원(元)의 포위 공격에 시달리는 통에 베트남 왕조의 권력 다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소황과 진경은 결혼했다. 진수도는 한발 더 나가 소황이 여자이므로, 국권을 통수할 능력이 모자란다며 남편인 진경에게 왕위를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철 없는 소황은 남편 진경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조칙을 내린다. 1225년 12월 31일, 진경이 왕위에 오르니, 베트남 쩐(陳)조의 초대왕 태종(太宗)이다. 이로써 李 왕조는 126년만에 막을 내리고, 역성(易姓)의 陳 왕조가 시작된다.

 

③ 비운의 혜종비 진씨용

 

진수도는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상왕격인 태사(太師) 자리에 오른다. 형식적으로는 진경(태종)의 아버지이자, 사촌 형인 쩐 뚜아(陳承)로 하여금 섭정 역할을 맡겼지만, 실권은 진수도가 쥐고 있었다.

진수도는 李 왕조의 혜종보다 영리했다. 혜종은 종씨 중에 아무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왕조의 붕괴를 초래했지만, 진수도는 조카를 왕위에 올려 놓고 자신이 실권을 쥐며 가문의 권력을 이어 나가도록 했다.

진수도에게 최대 적은 李 왕실 잔당들이었다. 특히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혜종은 李 왕가의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그는 李씨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혜종은 정신이 가끔 들었을 때 상황을 파악해 보니, 진수도가 모든 권력을 장악해 있었다. 그는 중이 되었다. 하지만 진수도는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1226년 10월 8일(음력) 진수도는 혜종에게 자결을 명했다.

이어 진수도는 남편 혜종을 잃은 왕비 진씨용을 아내로 맞았다. 반인륜적 범죄요, 짐승 같은 일이다.

 

④ 순천, 동생 밀어내고 왕비에 오르다

 

쩐 띠 둥(陳氏容). 남편 혜종을 죽인 진수도에게 다시 결혼한 이 여인의 운명은 기구하다. 혜종과의 사이에 낳은 첫째 딸 순천은 조카인 진류에게 보내고, 둘째 딸 소황은 왕위를 내놓은 후 陳 왕조 태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소황이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혼한지 8년, 나이 15세에 간신히 아들을 낳는다. 이름은 쩐 찐(陳鄭). 하지만 이 아이는 태어나 얼마 못가 요절했다.

진수도는 걱정이 됐다. 그는 李 왕조의 혜종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을 이용해 왕위를 찬탈하고 역성혁명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조카 태종이 아들을 갖지 못한다면 왕조의 운명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진수도는 엉뚱한 계략을 꾸몄다. 진수도는 태종의 형인 진류에게 부인 순천과 이혼하라고 명령했다. 또 태종에게도 소황과 이혼하고 순천과 결혼하라고 했다. 그대 순천은 진류의 아이를 임신한지 3개월째였다.

조카들이 반발했다. 진류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진수도는 진류의 반란을 쉽게 평정하고 반란에 가담한 군인 전원을 죽였다. 진수도가 진류마저 죽이려 하자 동생인 태종이 진수도에게 사형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태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다. 당숙의 개입으로 여자 문제가 얽히고, 형이 죽게 되자 중이 되겠다고 위협했다.

임금이 아들 없이 중이 되면 陳 왕조는 끝나게 된다. 그러자 진수도는 조카를 설득했다. 그래도 태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때 진류와 동생 진경(태종)의 형제 사이를 오가며 화해를 시킨 사람이 진씨용이다. 그녀는 이제 진수도의 부인이었다. 진씨용의 설득으로, 태종은 왕실로 복귀했고, 진수도는 진류에 대한 사형집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李씨 가문의 순천과 소황의 운명은 진수도의 뜻대로 된다.

1237년, 태종은 소황과 이혼하고, 그녀의 언니인 순천과 결혼한다.

막장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래픽=김송현

 

⑤ 소황의 재혼

 

1258년 소황의 나이 40살 되던 해, 전남편 태종이 몽골(元)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레 푸 쩐(黎輔陳)에게 소황을 시집보낸다. 아이를 낳지 못해 구박받던 소황은 중년의 나이에 재혼해 1남 1녀의 자식을 얻는다. 소황은 천수를 누리다 1278년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소황의 친모 진씨용은 쩐씨 가문의 화평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아 국모(靈慈國母)로 추앙받았다.

소황의 언니 순천은 진류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고, 태종과의 사이에 또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陳씨 가문의 형제를 바꿔가며 많은 아들을 낳아준 것이다. 태종과 재혼하기 직전에 임신한 진류의 아들 쩐 꾸오 캉(陳國康)은 태종의 아들로 입적시킨다. 태종과 낳은 두 아들 가운데 큰 왕자가 陳조 2대 왕인 성종(聖宗)이다.

소황과 순천의 죽음으로 베트남에선 이씨 왕실의 씨가 마른다. 베트남에 남은 이씨들은 살해되거나 살아남은 사람은 응우옌(阮)씨등 다른 성씨로 개명했다. 고려가 망하고 왕(王)씨들이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는 얘기는 베트남 李씨 왕실에서 선례를 찾을수 있다.

다만 고려에서 베트남 李 왕가의 후손이 남는다. 진씨의 왕위 찬탈을 피해 고려로 도망온 이용상과 그에 앞서 고려에 입국한 이양혼(李陽焜, 정선 이씨 시조)이 그들이다.

 

⑥ 고려로 망명한 베트남 李 왕족

 

이 막장드라마의 와중에 베트남을 탈출한 사람이 李 왕조의 실력자 이용상이었다. 그가 측근들과 베트남을 탈출하는데는 몇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혜종의 장례식에 종친들과 왕족들이 다 모였을 때, 진수도가 李 왕족을 도륙했다. 이용상은 이 위기를 예견하고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다가 배를 타고 최측근과 함께 도피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진씨 일족이 이용상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 했고, 이를 눈치 챈 이용상이 난을 피해 왔다는 이야기다.

이용상과 그 일행은 1226년 배에 올라 험한 파도에 몸을 내맡겼다. 며칠이나 되었을까, 그들이 뭍을 발견했는데, 고려 황해도 옹진반도였다. 그 곳에 상륙하기 전에 해적떼를 만났는데, 그 해적들은 옹진에 사는 고려인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이용상 일행은 해적을 내쫓고 고려인들을 구해주었다.

옹진 현령이 이용상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옹진 현령은 안남국의 황손이라는 사람이 멀리서 배를 타고 도적을 퇴치했다는 상소문을 써서 고종에게 상주하고 그의 일행을 받아주기를 청원했다. 고종은 그의 처지를 가련히 여겨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이용상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아 본관을 화산으로 했으니, 화산 이씨가 이렇게 형성됐다.

 

⑦ 사돈의 나라

 

수교 25년이 지나면서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돈의 나라'로 부른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을 포함해 한국에 체류하는 베트남인은 13만명이나 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88만명 가운데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다.

800년의 인연. 나비가 되어버린 찌에우 호앙의 날개짓은 800년후 한국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있다.

무용극 『800년의 약속』에는 한국 가요 ‘한오백년’의 노래자락이 흐른다. 무용가 전유오는 한국과 베트남 양국이 과거의 아픔, 현재의 공존, 미래의 행복을 함께 나누길 몸으로 노래한다.

스크린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잘가요. 찌에우 호앙"라는 자막이 날개짓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게 장르와 국가를 초월한 '800년의 약속'은 막을 내린다.

폐위 당한 찌에우 호앙(소황)을 끝내 돌보지 못하고, 무너진 李 왕조를 지키지 못한 약속은 800년이 지나 후손들에 의해 새로운 희망으로 자라고 있다.

 

▲ /홍보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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