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왕의 비극…고려로 망명한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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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왕의 비극…고려로 망명한 왕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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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전 역사의 뿌리를 연결하는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

 

1천년이나 되는 기나긴 중국의 지배를 끊고 베트남은 939년 응오 꾸엔(吳權)에 의해 독립 왕조를 열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베트남 정정은 지역별로 할거하던 지배자들에 의해 수시로 왕조가 명멸하는 혼란기가 지속되었다.

처음으로 안정된 왕조는 리(李) 왕조(1009-1225)였다. 이 태조인 리 꽁 우언(李公蘊)은 지금 하노이를 수도로 정하고, 탕 롱(昇龍)이라고 했다. 용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다. 용은 중국을 상징한다. 리 왕조가 인도차이나에 또다른 용이 탄생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중국과 각을 세운 것이다.

리 왕조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나라이름을 ‘다이 비엣’(大越)이라고 정했다. 그러자 당시 중국의 송(宋)나라가 출병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한때 베트남에게 광동, 광서지역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리 왕조는 9대, 216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북부 홍강 델타지역의 호족이던 쩐 투 도(陳守度)가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여제(女帝)인 찌에우 호앙(昭皇)에게서 강제로 양위를 받아 조카인 쩐 까인에게 제위에 오르게 했다. 이로서 이 왕조는 몰락하고, 쩐(陳, Tran) 왕조(1225~1400)가 시작된다.

 

① 베트남 최초의 여제 소황(昭皇)

 

베트남 리 왕조의 몰락은 드라마와 같다.

리 왕조의 6대 임금 영종(1138-1175)과 7대 왕 고종(1176-1210)은 모두 3세에 즉위했다. 권력은 외척과 권신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곳곳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고종 말엽인 1208년에 반란군이 궁중에 난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종과 황태자는 각기 다른 곳으로 피란을 떠났고, 피난중에 고종이 병사하고, 황태자가 16세에 제위에 오르는데, 8대 임금 혜종(1211-1224)이다.

나이 어린 혜종은 어머니와 정치를 함께 했는데, 피난 중에 쩐리(陳李)의 딸과 결혼을 했다. 모친이 반대했다. 그러자 쩐 리의 오빠 쩐 뜨 카인(陳嗣慶)이 무력으로 황태후를 제압하고 결혼시켰다. 혜종은 병약했고, 나중엔 정신까지 이상해졌다. 권력은 혜종의 장인인 쩐 뜨 카인의 손에 넘어갔고, 그가 사망하자 사촌 아우 쩐 투 도(陳守度)가 등장해 권력을 이어갔다.

1224년 혜종이 병세가 악화되자 들째 딸인 팟킴(佛金)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첫째 딸은 먼저 시집을 갔기 때문에 둘째 딸에게 제위를 잇게 한 것이다. 그 때 나이는 겨우 7세였다. 이 어린 공주가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여제(女帝)이며, 리 왕조 마지막 왕인 9대 찌에우 호앙(昭皇)이다.

당연히 권력은 쩐 투 도(陳守度)에게 돌아갔다. 쩐 투 도는 교묘하게 찬탈극을 벌였다. 8세의 조카 쩐 까인(陳煚)으로 하여금 여왕을 가까이 하며 같이 놀게 했다. 하루는 여왕이 반랑을 담은 수건을 쩐 까인에게 던지자 풍습에 따라 소황제와 쩐 까인을 결혼시켰다. 쩐씨들은 책략에 의해 부왕 혜종을 자살케 했다. 그리곤 여왕으로 하여금, 제위를 남편인 쩐 까인에게 넘기는 조칙을 내리게 했다. 형식은 평화적 정권교체이지만, 강요에 의한 것이다. 1225년의 일이다.

여왕에서 왕비로 바뀐 소황은 쩐 까인과의 사이에 자식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1237년 이혼을 당했다. 그리곤 이미 시집갔던 소황의 언니를 억지로 이혼시키고 새 황후로 맞게 했다. 소황은 베트남에서 폐후 이씨로 불린다. 자식이 없이 60살인 1278년까지 살았는데, 그의 죽음으로 베트남엔 이씨 왕조의 씨가 마르게 된다.

 

▲ 베트남 최초의 여제 찌에우 호앙(昭皇) 상상도

 

② 고려로 망명한 베트남 왕자 이용상(李龍祥)

 

왕위를 찬탈한 쩐 투 도는 구왕조였던 李씨 일족을 몰살시키려고 했다. 쩐 왕조는 홍강 델타 일대만 지배하고 외곽은 호족들에 의해 분권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언제 다시 李씨 일가가 복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1226년 쩐 왕조의 복수가 휘몰아치자 리(李)씨 일족들은 황급히 도망을 갔다. 리 왕조의 시조 리 꽁 우언의 7대손이자, 6대 황제 영종 리 티엔 도(李天祚)의 일곱 번째 아들인 리 롱 뜨엉(李龍祥)은 급히 배를 구해 일족을 이끌고 중국 송나라로 망명했다.

이용상과 그 일행을 실은 배는 송나라로 가는 도중에 바다에서 표류했다. 계절풍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도착한 곳이 한반도 서해안 옹진반도의 창린도(猖麟島)였다. 베트남에서 한반도까지의 거리는 3,600여km, 지금 비행기로 5시간의 거리를 표류했으니, 이들의 탈출은 필사적이었다. 얼마나 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죽느냐, 사느냐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구사일생으로 한반도의 어느 바닷가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베트남 보트피플이다. 베트남 난민들은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로 옮겨 거주했다.

당시 한반도의 지배자는 고려였고, 임금은 고종(재위 1213년∼1259년)이었다. 고려 조정이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용상이 필담을 통해 한자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고려는 안남국 왕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곧이어 몽골(元)이 침략하자 베트남 이주민들은 전투에 참가해 몽골군을 무찔렀고, 이에 고려는 이용상을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여인과 결혼시키고, 일대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며 정착하도록 도왔다. 고려는 그들이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李씨의 본관을 화산으로 삼게 했다. 화산 이씨의 스토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옹진에 정착한 이용상은 북면(北面) 봉소리(鳳所里) 동쪽 원추형 산위에 쌓은 화산성(花山城)에 올라가 망국단(望國壇)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도 황해도 옹진군 화산 인근에 이용상 왕자의 행적을 전하는 유적이 있다고 한다. 몽골군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과 망국단, 리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와 베트남의 중국식 명칭(交趾)을 딴 교지리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이용상 왕자의 일가는 고려에서 걸출한 인물도 여럿 배출했다고 한다. 화산 이씨 종친회 운영위원인 이상준 브릿지 증권사장(36세손)이 2005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한 내용에 따르면, 이용상의 장남은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고 차남은 안동부사를 지냈으며, 6세손 맹운은 공민왕 때 호조전서를 역임하다 국운이 기울자 고향에 은거하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 화산 이씨 종문

이상준 사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 간부들이 선조가 한국으로 망명한 지 780년 만에 베트남을 찾았는데, 당시 도 무오이 당서기장 겸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했을 정도입니다. 요즘도 베트남대사관에서 주한교민 모임이 있을 때는 화산 이씨도 교민으로 간주하고 초대합니다. 화산 이씨가 베트남에서 살기를 희망할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주고요.”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종친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한다. 2002년 12월 베트남의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 왕자의 일대기를 공연하기도 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230여 가구, 1,7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이 있는 황해도의 집성촌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④ 또다른 베트남 귀화성, 정선 이씨

 

정선 이씨도 베트남에서 온 귀화성씨다.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李陽焜, 리 즈엉 꼰)은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보다 먼저 고려에 입국했다.

이양흔은 베트남 리 왕조의 4대 인종(李乾德, 재위 : 1072년 ~ 1128년)의 셋째 아들이자, 제5대 황제 신종(李陽煥, 재위 : 1128년 ~ 1138년)의 동생이다. 이양흔은 형과 왕위를 다투다가 송나라로 망명했고, 송나라 문하시중이었던 진(陳)씨의 딸과 결혼했다. 그후 송 휘종 때 금나라가 송을 공격하자 전란을 피해 1127년에 고려로 망명해 경주에 정착했다.

정선 이씨들은 고려 무신란의 주역인 이의민(李義旼)이 이양흔의 6세손이라고 주장한다.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장수인 이선(李善)이며 어머니는 영일현 옥령사의 종이었다. 이의민은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였다. 큰 키만큼 힘이 장사였던 이의민은 젊은 시절 고향에서 나쁜 짓만 일삼던 건달이었다고 한다. 이의민은 안찰사 김자양의 추천으로 경군에 발탁됐다.

경군에 들어간 이의민은 수박희(手搏戱)를 특히 잘해 의종(毅宗, 1127~1173)의 눈에 띄었고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정중부의 난에 가담한 공으로 중랑장 지위에 올랐으며 그 뒤 조위총의 난 때도 전공을 세워 상장군까지 뛰어올랐다.

무신란 3인방 중의 한 사람인 이의민은 자신을 총애한 의종을 살해하는 일을 한 것으로 역사에 기술된다. 이의민은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를 꺾어 죽였는데 힘센 그의 손이 닿자 의종의 등뼈는 뚝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이 소리를 들은 이의민은 껄껄대며 웃었다고 한다. 그는 의종을 죽인 다음 시체를 이불에 둘둘 말아 가마솥 두 개 사이에 끼운 채로 연못에 내다 버리는 비정함까지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이의민은 의종을 죽인 공으로 당대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의민이 또다른 무신 최충헌(崔忠獻)에게 화를 입게 되었고, 그의 후손중 9세손 이우원(李遇元)이 강원도 정선으로 낙향해 가문을 이루어 본관을 정선으로 했다고 한다.

정선 이씨들도 1995년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왕손들을 초청했을 때 대표단을 파견하여 화산 이씨 대표단과 함께 베트남을 찾아갔다. 도무오이 당서기장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들을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 및 왕손 인정 등의 만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정선이씨는 1,121가구 총 3,65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베트남 리 왕조의 태조 리 꽁 우언(李公蘊)의 동상. 하노이.

 

④ 베트남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인정된 화산·정선 이씨

 

쩐 왕조 때 전조인 리 왕조의 지배층을 몰살했기 때문에 리 왕조의 후손은 현지 베트남에는 남아있지 않고 한국에만 남아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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