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한국화가 박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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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한국화가 박노수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1.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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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은 간결하고 여백의 미를 살린 화가다.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2013년 2월 25일 별세.

조모와 부친으로부터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고,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5년에 충청북도 청주상업학교를 졸업. 이즈음부터 그림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고 상경하여 청전 이상범을 사사했다. 이듬해인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제1회화과의 첫 입학생이 되었고 재학 중에 김용준(金瑢俊), 이상범, 노수현(盧壽鉉), 장우성(張遇聖)에게 배웠다. 1952년에 부산 피난지에서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으로 출품했던 작품 「실내」는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49년에 해방 후 처음 열린 국전(國展)에 「청추(晴秋)」를 출품하여 입선한 이후 제30회(1981) 마지막 국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제2회 국전(1953)에 「청상부(淸想賦)」로 특선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제3회(1954)~5회(1956)까지 「아(雅)」, 「선소운(仙簫韻)」, 「월향(月響)」으로 연이어 특선을 받았다. 특히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仙簫韻)」으로 동양화부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의 주목받는 신예작가로 부상했다. 1957년 제6회 국전 때에는 30세의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춘곡 고희동(高羲東)에게서 들었던 ‘고예독왕(孤詣獨往)’이라는 글귀는 평생의 지침이 되었고, 외롭고 고독한 예술가로서의 그의 끝없는 도전과 탈속한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해주는 말이 되었다.

29세 때인 1956년에 이화여대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모교인 서울대 교수가 되어 20년간 근무하다가 1982년에 정년보다 10년 일찍 퇴직한 후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초기의 대표작인 「선소운」(1955)과 「월향(月響)」(1956)에서 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간결하고 선적(禪的)인 분위기의 화풍을 보여주었지만 1957년 즈음부터 대담한 구도와 독특한 준법의 추상적 회화를 시도하여 실험적이고 독자적인 화격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년, 말, 사슴, 그리고 강, 수목 등을 모티브로 한 ‘남정화(藍丁畵)’는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다양한 실험을 통해 모색되었으며 동양적인 선묘(線描)를 잃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색채감각과 격조 높은 정신세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작품론을 가장 많이 썼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구성력’, ‘색채감’, ‘정신내용’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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