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눈물…목간에 드러난 신라의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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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눈물…목간에 드러난 신라의 억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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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엄격한 지배·조세 체계 드러나…경주 출신 왕경인이 지배

가야는 기원전후부터 서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는 소국들의 연맹체였다. 그중 전기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경남 김해)는 529년(법흥 16년)에 신라 이사부 장군의 공격으로 와해됐고, 마지막 구해왕이 532년(법흥 19년)에 나라를 들어 신라에 바쳤다. 남은 가야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로 해 존속했는데, 이 대가야도 서기 562년 9월 (진흥 23)에 이사부 장군의 침공에 의해 신라에 병합됐다.
가야 소국 가운데 경남 함안에는 아라가야가 있었다. 이 아라가야도 금관가야와 대가야 멸망 시기 중간에 신라에 병합됐다. 역사학자들은 대가야 멸망 직전인 559년에 아라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 /문화재청

우라나라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흐릿하게 나오고, 일본서기에도 언급되는 함안의 아라가야가 신라에 넘어간후 어떻게 통치됐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는 함안 성산산성 17차 발굴조사(2014~2016년)에서 출토된 23점의 목간(木簡)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그 내용을 공개했다.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신라가 함안의 가야소국을 어떻게 지배하고, 세금을 물렸는지에 대해 구명하고 있다.

* 목간(木簡):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다듬어진 나무 조각에 글자를 쓴 것
*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에서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여, 총 308점의 목간이 출토됨

 

목간에는 진내멸(眞乃滅) 지방의 촌주(村主)가 신라(경주) 출신 관리에게 보고서를 올리면서,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 그 잘못을 두려워하며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목간의 중심시기인 6세기 중반경에 신라가 가야 지방까지 문서로 행정을 움직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6세기 중반의 신라 시대 법률인 율령(律令)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목간에서 ‘□법 30대(□法卅代)’, ‘60일대(日代)’ 등의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해 놓은 법률 용어로, 이를 통해 당시 신라는 율령을 통한 엄격한 지방 지배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신라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경위(京位) 관등명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는 신라 지방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외위(外位) 관등명만 확인되었는데, 이번에 출토된 목간에서 경위(京位) 중 12등급인 ‘대사(大舍)’라는 관등명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함안 성산산성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급벌척(及伐尺)’이라는 외위 관등명이 새롭게 등장한 것도 흥미롭다.

* 경위(京位): 신라 왕경인(王京人)을 대상으로 하는 관등체계로 17등급으로 구분됨
* 외위(外位): 신라의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관등체계로 11등급으로 구분됨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 주목되는 것은 4면에 모두 글자가 기재되어 있는 사면목간 1점이다. 이 목간은 소나무를 폭이 좁은 사각형(細長方形)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길이 34.4㎝, 두께 1.0~1.8㎝에 총 56글자가 쓰여 있다.
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출토된 함안 성산산성 목간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집대성하는 『韓國의 古代木簡 Ⅱ- 함안 성산산성(가제)』책자를 올해 발간, 우리나라 고대 목간 연구를 더욱 활성화해 나갈 계획이다.

▲ 함안 성산산성 출토 사면목간 /문화재청
□ 목간 원문
1면: 三月中眞乃滅村主憹怖白(삼월중진내멸촌주농포백)
2면: 伊他罹及伐尺寀言□法卅代告今卅日食去白之
     (이타리급벌척채언□법삼십대고금삼십일식거백지)
3면: 卽白先節日代法稚然(즉백선절육십일대법치연)
4면: □城在弥卽尒智大舍下智前去白之(□성재미즉이지대사하지전거백지)

 

□ 해석
1면: 3월에 진내멸촌주(眞乃滅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룁니다.
2면: 이타리(伊他罹) 급벌척(及伐尺)이 □법에 따라 30대라고 고하여 지금 30일을 먹고 가버렸다고 아뢰었습니다.
3면: 앞선 때에는 60일을 대법(代法)으로 하였었는데,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룁니다.
4면: □성(□城)에 계신 미즉이지(弥卽尒智)대사(大舍)와 하지(下智) 앞에 나아가 아룁니다.

 

아라가야(阿羅伽倻)
「삼국유사」 기이편에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혹은 아나가야(阿那加耶),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등 다양한 명칭으로 전한다. 음운상 모두 비슷하다. 변한 12국의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으로 경남 함안군으로 비정된다.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 널무덤군(토광묘)은 아라가야 초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아라가야는 4세기 말경까지 금관가야와 함께 전기 가야연맹의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고령지역 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된 후기가야에도 아라가야는 구성원이 되어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아라가야는 559년경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 되었다.
함안 일대에는 말산리 고분군을 비롯, 여러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후기 가야 시기 아라가야의 세력 정도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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