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조선·항해 기술③-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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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조선·항해 기술③-발해
  • 정채호
  • 승인 2015.12.0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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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채 호(코리아나호 선장)

 

 발해는 고구려 왕족 출신 대조영이 서기 698년 세운 나라다. 당나라는 대조영의 세력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대조영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발해는 정치·경제적으로 당의 속국 형태로 발전했고 전성기인 9세기 때는 고구려보다 더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 발해의 일본행 항로도

 

▲ 발해의 해양선
▲ 일본의 견당사 선박

 

 

가. 발해의 해상 교통


발해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당나라와 벌인 조공(朝貢) 교역이나 동해를 오가며 일본과 활발하게 벌인 교역에는 바닷길 두 곳이 주로 쓰이고 발달했다. 이들은 각각 조공도(朝貢道), 일본도(日本道)로 불린다.
첫째 해로인 조공도는 당나라를 왕래하는 길이다. 육로를 거쳐 압록강 어귀로 나와 배를 타고 중국의 황해 연안을 따라 산동반도의 등주까지 가는 뱃길인데, 등주에서는 육로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게 된다. 이 항로는 중국대륙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해로였다.

 

발해는 개국한 뒤 229년 동안 당나라에 조공과 문물 교류를 위해 몇 십 명에서 120여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143회나 파견했다. 따라서 초기부터 줄곧 이용했던 이 해상교통로는 수많은 내왕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가장 안전했던 바닷길이었다.
하지만 둘째 해로인 일본으로 가는 길은 당나라 항로보다 훨씬 어렵고 험했다. 일본으로 가는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성(훈춘) 근처의 염주에서 배를 타고서 해류가 험하고 복잡한 동해를 횡단해야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 해로보다는 더욱 뛰어난 항해기술이 필요했다. 발해는 초기부터 무수한 고난과 모험을 감수하며 수십 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면서 항해기술의 경험을 축적했다. 결국 발해의 뛰어난 항해기술은 이처럼 일본과 교류하느라 자주 동해를 횡단하면서 얻은 셈이다.


건국에서 멸망할 때까지 229년 동안 문물 교류와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발해의 사절단은 동해를 건너 34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는 발해 사절단은 적으면 100명, 가장 많을 때는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발해의 항해술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해에 관한 당나라 사기나 삼국사기 기록을 찾아보면, 당나라로 내왕하는 해로에서는 일본항로에서처럼 길을 잃어 표류하거나 험한 파도 때문에 난파당한 기록이 없다. 즉 일본 해로보다 비교적 개척이 쉬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본 사기와 삼국사기를 보면 발해가 일본 해로를 개척할 초기 표류하거나 거센 파도에 난파당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발해는 이렇게 어려웠던 초기의 일본 해로 개척에서 얻은 경험으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달시켰고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부터는 염주와 함흥 일대의 동해안 북부에서 동해를 따라 남하해,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거처 일본으로 들어가는 비교적 안전한 해로를 개척, 왕래했다.


발해가 본격적으로 일본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제3대 문왕 때부터다. 일본사기를 보면, 776년 문왕인 대흠무는 일본 왕 조견을 위해 사도몽을 인솔자로 167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이 일행은 동해를 건너다 조난을 당해 사도몽을 포함한 46명만 살아 일본에 도착했다.

 또 이로부터 2년 후인 778년 일본의 사신 일행이 동해를 건너 발해로 가다가 험한 파도와 폭풍우 때문에 배가 파손되어 발해의 염주(크라스키노)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사실도 <속 일본기> 중 ‘광인천황’편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초기 일본항로 개척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발해는 일본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했던 초기(727~819년) 항해기술이 미숙하고 경험이 적어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동해를 건너다 폭풍과 거센 파도 등으로 표류하거나 배가 난파당하곤 했다. 50년쯤 되는 초기 해상교통 경험은 발해의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을 놀랍게 발전시켰다.

 

일본으로 가는 안전한 해로의 개척에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더욱 빠르고 튼튼한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도 발달했다.

해류를 이용해 일본으로 진출한 것은 고조선시대가 처음이다. 고조선 후기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이용한 해류는 흑조(黑潮)였다.

 

고조선 사람들은 한반도 서해쪽으로 흐르는 흑조와 한류를 타고 한반도 서해안으로 내려와 남해쪽을 지나 대마도를 거쳐 다시 일본 동해안으로 흐르는 흑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발해도 물론 고조선시대부터 개척한 해류항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해의 계절풍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항해기술 개척은 발해가 처음인 것 같다.

 

초기에는 발해 내륙의 각 성에서 일본도의 관문인 용원부의 동경(훈춘)으로 나와 이곳서 가까운 동해안의 항구인 조구위 또는 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직접 횡단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항해 기술의 부족으로 표류, 난파 등의 어려움이 많았고 일본 동해안 북부지역의 야마가타 또는 아키타 해안에 구사일생으로 도착하는 일도 잦았다.


이후 발해는 동해를 건너다니며 해류는 물론 계절풍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 새로운 일본행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으로 갈 때는 9월에서 12월 사이 겨울철에 출발했다. 해마다 이 무렵에 대륙에서 대양으로 부는 북서풍과 남하하는 차가운 한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발해 2차탐사대 뗏목(2005)

 모구위에서 배를 띄워 신라를 피해 멀찌감치 한반도 동해를 따라 남하해 울릉도 부근에서 큰 어려움 없이 일본 동해안 중부의 이시가와나 후쿠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일본에서 발해로 갈 때는 여름인 6~8 사이에 출발했다. 이것도 해마다 이 시기에 대양에서 대륙으로 부는 동남 계절풍과 북상하는 해류인 흑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이런 계절풍을 이용하는 항해술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810년경이었는데, 이런 항해술을 익히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린 셈이다.

발해가 계절풍 항해술을 이용하기 전에는 동해 횡단 때 자주 일어나는 항해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발해와 일본 양국에서 사절단을 호송하는 호송사를 동행시켰다. 즉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하는 발해 사절단은 일본 호송선단이 발해 해안까지 따라갔고, 발해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일본 사절단도 발해 호송선의 보호를 받으며 동해를 건넜다.

  그러나 서기 810년 이후에는 발해나 일본에서 호송사와 호송선단을 파견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이때쯤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는 항해술이 발달하고, 그 뒤 조선기술도 함께 발달해 표류하거나 선박이 부서질 걱정 없이 마음대로 일본을 왕래하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 발해의 조선 기술

발해의 조선술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당나라와 일본의 발해 관련 기록이나 항해기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발해 건국 35년째인 733년, 제2대 왕 대무예(무왕)는 당나라를 공격하려고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해 건국 초기에 이미 조선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군선(軍船)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속 일본기>에는 778년 일본사신이 발해로 가다가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발해왕이 염주에서 배 두 척을 만들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전 염주 근방 연해주 남부 해안에서 발해의 조선소 유적지가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발해가 당나라로 파견한 사절단은 가장 많은 때에 128명이나 됐는데, 이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배는 대형 해양선이라야 했다. 또 험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갈 때에는 1천 명까지 한꺼번에 움직이기도 했는데, 이것도 거대한 원양 항해선박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일본의 당나라 유학 승려인 엔닌(圓仁)은 <입당구서순례행기>에서 그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 등주의 삼천포에서 발해의 무역선인 교관선(交關船)을 많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역선이 많다는 것은 당나라와 해상무역이 성행했고 아울러 조선술이 발달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다. 발해 배의 모양

발해의 배 모양과 크기는 그림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정크선이나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발해의 해양선은 초기부터 돛과 노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다녔다. <속 일본기>의 공인천황편에는 이를 뒷받침하듯 ‘776년 일본에 파견한 발해 사절단의 배가 대마도를 지나다가 폭풍을 만나 노가 부러지고 돛이 떨어져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이 당나라 임금에게 조공을 하고 귀국하는 발해 왕자를 환송하면서 읊은 시에도 돛이 나온다. 그는 시에서 ‘포구에 다다르니 가을 물결이 이별을 재촉하는데, 돛을 펴니 새벽노을이 깃 폭에 걸려’라고 표현했다.

 

김육불이 쓴 <발해국지장편>과 황유한이 쓴 <발해국기>에는 ‘서기 771년 발해왕 대흠무(무왕)가 대신인 일만복과 모항록을 포함한 일본파견 사절단 325명을 돛과 노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으로 가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배의 크기는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전기의 배는 30~40인승 돛배로 100톤급 일본 견당선과 비슷한데, 길이가 20m, 너비 6.5m, 높이는 1.5m쯤 이었다. 후기의 배는 한층 튼튼하고 크게 발전해 평균 100인승 돛배로서, 무게 200톤에 길이는 25m, 너비 7m, 높이는 1.7m쯤 되었다. 이는 전기의 견당선보다 용적이 두 배나 큰 것이다. 한편, 이 배는 갑판 위에 누각이 있는 누선(樓船)이었다.


발해의 배는 삼각형 돛보다 바람의 여러 형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튼튼한 직사각형 돛을 썼다. 그리고 수심이 깊고 해안선이 단조로우며 암초도 적은 동해에 맞게 평저선 보다는 속력이 빠른 첨저선(尖底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의 해양선이 일본의 견당선과 비슷할 것이라는 견해는 일본이 발해의 사신을 위해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증명할 옛 기록이 있다.


727년 10월 발해 무왕은 장군 고인의 인솔로 사절단 24명을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사절단은 염주를 출발해 동해를 횡단하다가 항해술 미숙으로 대마도 해류를 따라 떠내려가 일본 동해 중부해안 아키타 근방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장군 고인과 16명은 이 지역의 토호국인 데와국 왕 에조에게 붙들려 죽었고 8명만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들은 무왕의 국서와 선물인 담비가죽 3장을 가지고 일본의 왕도인 헤이조경으로 들어가 일본 왕에게 전했다.


그러나 배와 항해사를 잃은 발해사절단의 귀국길이 막히자 일본 왕은 새 배를 만들도록 했다. 발해사절 8명과 이들을 호송할 호송병사 62명을 태울 배 두 척은 1년 뒤에 건조되어, 사절단은 728년 5월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35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든 이 배는 그 무렵 일본의 견당선과 모양이 같은 매우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발해의 배들은 일본을 왕래할 때 대부분 염주나 북청 근방에서 직접 동해로 나가는 원양항해를 했다. 이것은 동해연안을 따라 남행할 때 신라의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원양항해에는 해류와 계절풍의 이용도 중요하지만 별을 보고 항로를 측정하는 천문항법도 중요했다. 따라서 이 방면에 경험과 기술이 숙달된 천문항법사도 필수적으로 함께 배를 타고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초 이후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술을 개발해 비교적 쉽게 일본을 오가던 880년경에도 발해사신의 배는 동해에서 종종 난파당해 일본에서 배를 만들어 주었고 특히 발해사절의 배는 좋은 나무로 만들도록 일본 왕이 배려했던 기록도 <일본삼대실록>에 나온다.

한편, 발해 사절단의 배가 만들어진 곳은 하쿠이산과 후쿠우라산 근처의 하쿠이 또는 후쿠이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해 후기 일본을 오간 발해 사절단들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주로 이 두 항구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 황포 돛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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