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조선·항해 기술①-신라 시대
상태바
고대 조선·항해 기술①-신라 시대
  • 정채호
  • 승인 2015.12.03 13: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 채 호(코리아나호 선장)

▲ 코리아나호

신라 실직주(悉直州) 군주(軍主) 이사부는 512년 음력 6월에 우산국(于山國 )을 점령하였다.

우리는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어떻게 선단을 운영하여 해상진출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먼저 신라 시대의 항해와 조선술 해상교통에 대해 고찰해 본다.


삼국 중에서 해상교통과 무역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했던 나라가 신라였다. 삼국 중기까지는 백제가 발달했으나 신라는 6세기 들어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와 일본·신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6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삼한을 통일한 신라인들은 남해를 돌지 않고 서해의 직항로를 통해 중국과 무역은 물론 왕래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류는 항해술과 선박제조기술 발달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정식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13년(521)부터다.

 이 해에 신라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서해에 배를 띄워 당에 친교사신을 파견했고, 같은 해 울릉도를 병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보면 신라가 해상교통에 자신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의 배가 늘고 백성들의 해상교통이 왕성해지자 해상 운수를 통제하기 위한 선부(船府)가 제26대 진평왕 5년(583) 1월에 설치되었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해상교통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당나라 무덕왕 4년(621)이었다. 이때 신라와 당은 두 개의 서해항로를 이용했다.

 

신라에서 당으로 갈 때에는 한강 하구나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직항하거나 전남 영암부근에서 흑산도를 거쳐 상해 아래 항주만을 통해 갔다고 <조선통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당에서 신라나 일본으로 갈 때는 산동반도 해안을 타고 북상해 발해만을 거쳐 여순→대련→압록강 입구를 지나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남양만이나 당진부근에서 육로를 따라 신라의 경주로 들어가거나, 남양만을 지나 남하해 완도의 청해진을 거쳐 부산→경주로 들어갔고, 일본항로는 부산을 출발해 남지나해로부터 북상하는 흑조(黑潮)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향해 규슈→일본으로 이어졌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나라 이전의 중국과 신라의 해상교통은 어떤 루트로 이루어졌을까?

3세기후반 초기에는 요동반도 연안 항로를 개척해 왕래했다. 산동반도 북부해안의 봉래에서 요동반도의 남단 여순을 거쳐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북상, 압록강 입구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으로 오는 해로였다.

 

이때는 항해술과 배가 서해로 직항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주로 이 항로를 이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가 많아 어려운 항로였고 이에 따라 중국과의 원활한 교역을 위해서도 신라는 삼국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6세기 이후 고구려가 요동반도 연안해로를 본격적으로 막아 서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는 고구려의 봉쇄도 있었지만 그만큼 항해술과 배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한반도 서해의 남양만과 중국 산동반도를 직결하는 서해 직항로를 이용해 항해 시간과 경비를 절약했다.

서해 횡단항로는 4세기경 중국의 위나라가 개척해 사용했다. 원래는 육로를 통해 한반도 여러 나라들과 왕래했는데 4세기 초 요동반도를 공손씨 일파가 점령하고 세력을 키우면서 위와 한반도간의 육로를 막아서 할 수 없이 서해횡단 해로를 개척한 것이었고, 삼국시대에 와서는 고구려가 해로뿐만 아니라 당나라간의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신라는 위나라가 개척한 서해해로를 다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일본의 유명한 승려인 엔닌(圓仁, 794∼864)이 838년부터 847까지 9년 6개월 동안 당나라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에 신라의 해상교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겨 신라의 해상교류가 발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의 해상교통은 대개 세 시대로 나뉜다.

1) 신라건국부터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사신파견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고 세력을 강화하던 ‘견사 해운시대’가 처음이고,

2) 그 다음이 5세기 초부터 통일신라시대 동안 일본·중국과 무역이 왕성했던 ‘해상교역시대’다

3) 그리고 마지막이 신라 말기 해상왕 장보고가 동남아해상 교역을 장악하던 시기다.

결론적으로 이사부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할 시대는 신라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여 대항해시대 일본.중국 등 해외교역 시작으로 통일신라의 해상왕장보고를 탄생케 하였다


신라가 극동의 해상권을 최대로 장악한 시기는 통일신라말기였다.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라 내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왔고,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개인 활동이 자유로워진 백성들이 마음대로 해상으로 진출해 대한해협과 서해·동지나해를 무대로 일본·중국과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정치적으로 쇠퇴할 무렵이었지만 민간의 해상활동은 더욱 강해져 극동의 해상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 복원 가야선과 허황옥의 인도배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