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섬③-탐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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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섬③-탐험이야기
  • 이섬
  • 승인 2015.11.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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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필자는 국내 최로로 1991년 겨울부터 약 3년 동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섬 446개를 직접 배를 타고 한 번 돌아본 경험이 있다.

그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96년도에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리고 항상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10년 만에 다시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가 2004년도 봄에 경남 장승포에서 4.5톤짜리 낚시어선을 하나 구입하여 가을에 두 번째 도전을 하였다.

사실 처음 도전은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고 모험이었다. 후원자, 글, 사진술, 항해술도 없었다. 리스크가 너무 큰일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처음과는 달리조건이 많이 좋아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다에 대한 항해의 노하우와 조건이 나아 진 것은 예전 등대호 2톤, 새로운 배인 등대 2호는 4.5톤 크기로 배가 더 커진 것이다. 안전에 많이 신경을 썼다.

다음은 예전의 해도와 달리 2004년도에는 칼라판 GPS가 배에 장착되면서 안전 항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해도는 바다의 깊이, 암초, 섬과 섬 사이의 거리, 야간항해, 안개가 자욱할 때 항해에 적합하였다. 그 대신 배가 커서 연료의 소모가 많았고, 속도는 12노트로 조금 느렸다. 이 배의 장점은 밤에 잠도 자고, 밥도 해 먹을 수 있는 정원 12명의 배였다.

단군 이래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그것은 땅에서가 아니라 바다를 달리며 전국의 유인도 총 447개를 탐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느 단체의 지원을 받으면 혹시 몰라도 또 다시 전국의 섬 탐사 진행은돈도 안 되는 일이요 무모한 짓이며 모험도 아주 위험한 모험에 속했다.

혹시 모르겠지만 25년 전에 누가 이런 영역에 도전하거나 생각했을지 몰라도 섬과 바다의 발전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도전을 주는 기회가 되기도하였다. 조건이 너무 열악했지만 처음 한 번의 경험을 살려서 시작했기 때문에 한결 가벼운 마음과 설레임이 있었다 .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번째 섬 순회 목적은 일반적인 책과 선교적인 책자를 펴내는 것이었다.

그때는 안익현 선생이라는 분이 조수로 왔고, 약간의 후원자도 있었고, 백야도교회라는 든든한 배경에 주업이 있었기 때문에 이 탐험은 부업으로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섬 탐험과 연구가 시작되었다.

만약에 여기에 목을 걸고 했으면 도중에 실패했을 것이다. 답사비가 나오지 않고, 배는 자주 고장이 나고, 연료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내 배를 가지고, 선장이 되어 배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예전에 관계했던 섬사람들의 인적인 인프라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첫 번째도 두 번째 순회도 일등 공신은 한국 교회이다. 미국과 한국 교회들이약간의 후원이 들어왔고, 섬 교회에 가면 거기서 먹고, 자고, 차도 빌려주고 재정 후원을 한다.

작년 가을에 범선을 타고 이사부 항로를 따라서 울릉도와 독도를 갔다. 그 당시 풍랑주의보에 붙잡혀 3박4일을 울릉도에서 보낼 때 거기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잠을 잤다. 울릉도 올 때마다 들려서 자는 곳이 있다. 거기서 차도 빌려주고 방도 하나 내 주어서 편안하게 지내다 왔다. 전국을 여러 번 탐험하다 보니 곳곳에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서 도움을 받곤 한다.

두 번째 탐사는 2004년도에 시작하여 2007년에 마치고 2008년도에 여행기식으로 책을 하나 펴냈다.

‘섬, 1박2일로 떠나는 웰빙여행’ 아름다운 사람들 출판사에서 자비 1,200만원을 들여서 만든 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여행기는 식상하다. 또 필자는 브랜드가 없다.

또 인터넷이나 여행기 책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있는데 아내가 반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획을 하였다. 부산에 사는 홍성권 작가가 저의 배를 한 번 타고 1박2일 여행을 했는데 그 여행기가 자기의 블로그에 나왔다.

그 분은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글을 쓴다. 홍작가의 글은 지리를 잘 안내하는 특징이 있어서 내 책에 30-40% 정도 가져와 내 글과 합쳐지면 이상적인책이 될 것을 예상하였다. 그 분과 협상하여 어느 정도 원고료를 드리고 모든 경비는 필자가 대고, 홍작가는 지적인 재산을 얻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전국의 섬을순회하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좋은 책, 독자들을 위하여, 섬 문화 발전을 위하여 부득이 한 결단이요 조치였다.

그리고 내가 사는 여수부터 순회하면서 가장 먼저 여수를 돌아보고 책 이름도 한국의 ‘ 섬’으로 바꾸어서 2010년도에 여수편을 출간하였다.

2011년 완도편을 내고 계속 전국의 섬 순회는 계속되었다. 그 뒤에 출판사가 바꾸어지고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후원사가 되고, 목포대학 초빙으로 연구원이 되면서 2009년 백야교회를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섬 탐험에 뛰어들게 되었다.

25년째 이 길을 가다보니 이제야 그 결과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국의 섬 책 9권 (8권이 더 나옴)과, 서울의 3개 지상파와 메이저 신문들 인물을 소개, 지난 10월에 아들이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영광도 누렸다.

아들을 소개한 이유는 아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부도 날 뻔 했다. 아들은 공군통역 장교로 근무하면서 월급 보너스 퇴직금 몽땅 보내 주었고, 인류 번역가인데번역을 잘하여 저의 하는 일을 도왔다. (2015년 10월 0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아마도 전국을 3번이나 순회하면서 몇 번이나 파선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가정이 파산되기 직전에 몰리기도 했다. 그런데 용케도 살아남아 이런 자리에 왔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라고 한다. 기독교인 저는 신의 축복이라고 말 할 수있다.

여수에 오문수 선생은 기자이다. 그 분이 엄홍길, 이효웅, 이재언 이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모험가라고 말한다. 오늘 오실 채바다 선생이 바로이런 사람 속에 들어간다. 이사부, 장보고, 채바다, 엄홍길, 이효웅, 전국의 수많은 여객선들은 바다를 달려서 그냥 지나만 간다. 객선도 자기의 코스만 시내버스처럼 오고 간다.

삼척의 이효웅 선생은 자기가 만든 1인용 자작보트로 우리나라의 먼 섬을 대부분 다녀봤다. 독도, 마라도, 가거도, 격렬비열도, 백령도 등 무수히 많은 섬을 다니면서 동호인들을 결성하고 청소년들에게 모험심과 해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바다를 상대로 배를 타고 다니는 채바다, 이효웅, 하멜, 이사부, 장보고, 외항선, 국내의 여객선 선사의 선원들은 섬과 바다를 그대로 지나만 간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위험하고, 지루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면서도 대단한 일이다.

제가 하는 일도 그냥 섬들을 배로 돌아보고 가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고 타고 간배를 섬마다 일일이 선착장에 대고 내려서 자료조사와 답사, 사진 촬영, 주민들과의 만남 등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 같은 경우는 서로 임무를 나누어서 선장이 배를 관리하며 배에 대기해 있고저는 답사만 하면 되는데 제가 혼자서 선장, 기관장, 답사, 사진 촬영, 해경에 신고 잠자리 식사까지 , , 모든 일을 하다 보니 여간 힘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 한 번도 아니고 전국을 세 번씩이나 순회하는 경험을 했으니 내가 즐기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명감이라고 할까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그런 것이 내가 있었다.

 

2. 섬 탐험의 동기 부여

제가 25년 동안 섬을 연구하면서 섬에 대한 종합적인 섬 전문가가 된 동기에 대하여 잠시 설명하면 더 섬과 바다에 대하여 친근감과 깊은 이해가 있을 것이다.

저는 원래 섬에서 태어나서 공부를 하다가 섬이 싫어서 섬을 버린 사람이다. 6.25 전쟁 중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 시절은 다 가난했다. 고향 완도 노화도에는 전기, 수도, 교통, 교육, 중학교, 물 사정, 선착장, 의료, 식량난 등 아주 가난한 섬이었다. (지금은 전복의 고장으로 부자 섬임) 동력선이 막 나오면서 풍선과 노젖는 배가 같이 다니던 시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사랑한다. 어느 누구 보다도 내 고향을 사랑한 나도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도를 사랑했지만 어릴 때 그 고향을 버리고 말았다. 한번은 배를 타고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밤에 목포에 들어갔다가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고 그만 고향이 등지고 말았다.

목포 유달산의 전깃불, 자동차, 기차, 마차, 건물, 음식, 잘 만들어진 길 등 내가 사는 가난한 동네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도시를 동경한 나머지 첫 번째 가출을 하였다.

맨 처음에는 목포 경찰서 근처의 봉래관이란 중국집 보이로 취직하여 자장면을 배달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 달 후에 형님이 찾아와서 그만 본의 아니게 고향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년 넘게 다니다가 이번에는 영영 멀리멀리 서울로 돈을 훔쳐 두 번째로 가출을 시도하였다. 1965년 당시 국가적으로 산업 시설이 전무하여 모두 배고픔에 허덕이며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은 먼저 간 마을 친구들을 따라서 명동과 충무로에서 구두를 닦는 일이었다. 중부경찰서 앞 수향다방에서 구두를 닦던 중에 이 경찰서의 소년계 주국진, 이영자 순경님의 배려로 중부 직업소년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는 신문을 팔고 신문을 배달하면서 직업소년 학교에서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나 혼자서 학비도 벌고 . 신문 보급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들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가 미션 스쿨로 교회를 다니면서 고난과 유혹을 이기며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갔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는데 운 좋게 불도저를 운전하는 공병대에 근무하다 3년 후에 제대했다. 넥타이 매고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직장이 적성이 맞지않는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죽음을 가까이 한 채 일하는 강원도 황지의 한성 광업소에서 1년 간 수천 미터굴속에 들어가서 돈을 벌면서 탄을 파기 시작했다. 다시 서울로 와서 이번에는 트럭을 운전하면서 수도권 일원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적성에 맞았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둘이나 생기면서 어느 날 뜻한바가 있어 신학교에 다니면서바나바선교회 소속 섬 선교사로 1989년 11월에 고향 노화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노화도 근처에 교회가 없는 조그만 섬이 모두 14개가 있었는데 그 섬에 등대호를 타고 선교 목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면서 섬 사랑에 빠진 1년 동안 열악한 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전기가 없고, 선착장 시설, 물 사정, 교육, 의료, 교통, 문화 등이 낙후하여 이번에는 선교와 복지 사업을 하면서 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는 3,400여 개의 섬이 있다.

그중 유인도는 약 447개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유인도 중에는 지금도 무인도로 변해가는 섬이 있는가 하면, 섬이 비교적 커서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섬도 많이 있다.

또 예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서 전국 곳곳의 섬을 방문 한다는 것은 국가도 하지 않는데 후원도 없이 일개 개인이 시도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섬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인 그 당시 처음에는 섬에 대한 관심이 선교 목적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하고 소외된 섬마을에 복지사업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점차 그들의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이름난 섬이 아닌 보통의 섬에 관하여 일반적인 자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금까지의 그런 무관심이 나의 감성을 흔들고 있었다. 그짜디짠 눈물 속에서 체계적인 조사와 정리 그리고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의 섬을 탐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섬을 사랑했고,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섬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고, 새로운 길을 가는 이들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게 되었다.

▲ 2013 가거도 탐사

 

3. 1991년 1차 최초의 섬 탐사 시작

1990년도 여름에 건조된 2톤의 등대호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노화도 주변의 14개 섬을 다닌 경험이 전국 섬을 순회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은 이 배가 몇 달도 안 되어 파선 할 것이라고 말 할 정도로 위험의 경고를 보냈다. 그것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배를 건조해 주고 후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시작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큰 사고가 한번 날 뻔 했는데 어느 배가 우리 배를 충돌하여 거의 넘어질 뻔한 일이 있다. 배에 있는 물건들이 바다로 빠질 정도 기울었는데 극적으로 복원되어 배는 침몰 위기에서 살아났다.

한번은 횡간도 라는 조그만 섬에 사는 전도사 부부를 저녁에 여객선이 없어서 우리 배로 싣고 가던 중에 안개를 만나서 하루 밤을 김양식 부표를 붙들고 보낸적이 있다.

이때 해경에 신고하고 찾고 난리가 났지만 아침에 들어오는 바람에 동네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안개이다. 안개가 끼면 육지도 마찬가지로 까막눈이 된다.

고속도로 특히 서해대교의 사고는 대부분 안개 때문에 수십 충돌로 인해 사망과 부상자가 속출한다.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바다에서 안개로 가장 많은 사고가 난다.

이런 저런 경험을 2년 동안 하면서 섬의 어려운 점들을 하나씩 알고 섬에 대한 책자를 남기고 싶었다. 전국의 섬 순회는 모두 반대했지만 어릴 때부터 배를 타고 다니면서 바다에 익숙하고, 2년 정도 등대호를 타고 다니면서 실질적인 항해술을 익혔다.

1991년 겨울부터 조도 지방을 시작으로 등대호 타고서 혼자서 전국의 섬을 순회하였다. 그때 풍랑주의보에 걸려서 3박4일 조도에 잡혀있었다. 그 당시 가족은 물론 저의 소속 단체도 다 반대하였지만 이 일은 반드시 누군가가 한번쯤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혼자서 배를 타고 다녔다.

먼 바다에 있는 섬들은 객선을 타고 다녔다. 울릉도와 제주도외의 부속섬들, 흑산도와 전북의 어청도, 충남의 외연도, 강화군의 민통선에 있는 보름도 등은 객선을 타고 갔다.

혼자서 배를 타고 섬에 배를 대고 섬사람들을 만난다. 그때 만난 사람은 주로 일반 주민들과 교인들을 만난다. 섬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을만나서 섬에 대한 상황을 물어본다.

가장 기초적인 전기, 물 사정, 학교, 보건소, 여객선, 인물, 교회와 사찰, 주업, 당산제 등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물어보면서 그 지역을 답사한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을 보통 제가 배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를 하였다.

경비는 아주 극히 일부분이 보조금으로 들어오고 방문하는 교회에서 식사와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그 분들이 단군 이래로 전국 섬을 순회하면서 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섬의 책을 만들어 한 권씩 나누어 주려고 계획을 하였는데 그 분들이 봉투를 주며 많은 격려을 받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스크류에 줄이 자주 감기는 것이었다. 또 혼자 다니기에 두려움이 조금 있었다. 그 당시는 해도만 존재하여 바다 속에 숨은 암초를 만나면 배가 파선되어 배를 잃고 목숨도 위험에 빠진다.

지금은 GPS가 나와서 해도가 필요 없지만 그 당시에 해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해는 바다가 깊어 가는 방향을 알려주지만 서남해는 섬들이 많고 수심이 얕고 갯벌들이 많아서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차 탐사 때 대모도 섬을 돌아보고 오던 중에 큰 사고가 날뻔 하였다.

소안도 근처의 암초가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여기에서 해도를 보면서 아슬아슬하게 배가 달려오다가 그만 멸치잡이 그물인 난장만 그물을 올라가서 그물을 스크류에 감아버렸다.

어렵게 낮으로 짤라 내고 오는데 그물이 감기면 속도는 절반 이하로 줄어버린다. 1시간 거리를 두 시간 걸려서 천천히 오는데 며칠 전에 왔던 그 길에 바다의 암초가 막 물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깜짝 놀랐는데 만약에 그 자리를 빠른 속도로 달려왔으면 그 암초위에 올라가서 배가 파선 되었을 것이다. 이건 거의 100%였다.

그 암초 위에서 00년 전에 장을 보러 왔다가 가면서 이곳에 부딪쳐서 그때 00명이 죽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순간을 그때 한 번 당한 일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물 임자를 찾아서 그물 값을 물어주어야 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도망가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렵게 주인을 찾았는데 그물값으로 100만원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어렵게 사정하고 아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 당시에 60만원에 합의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그물에 걸린 탓에 배가 파선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전화위복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2차 사고는 1993년 여름 신안군 하의도에서 스크류 고장으로 사리 때인 일곱물에 하루 밤을 세우면서 바다에서 밀려다니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신안군 장산도에서 목포 쪽으로 밀려가는데 시야도 등대위까지 밀려갔다. 다시밀려 내려오는데 진도 울둘목 방향으로 배를 조정하였다. 율도란 섬에 도착하여 배를 걸려서 다시 순수 수리를 하고 무사히 일을 마치다.

혼자서 다니기에 두려움과 식사는 육지에서 하기 때문에 이 때 배고픔에 시달리며 배에는 아무 준비 없이 다니는 무모한 나의 모습에 원망스러웠다.

배에는 야간 항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 불도 없어서 지나가는 배에 충돌 위험이 많았는데 그때 수없이 지나가는 배들이 저의 배를 비켜가기에 그 이유를 잘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레이다에 나타난 저의 배를 보고 피해 갔다.

3차 사고는 충남 안면도 영목항 앞에 원산도라는 큰 섬이 있는데 순회 중에 해도 를 잘못보고 그만 암초 위로 올라가서 다시 한 번 스크류가 상하고 사우드가 굽어버렸다. 아주 천천히 배를 몰고 영목항에 들어와 밤 물에 배를 육지로 걸고 오전에 스크류와 사우드를 빼서 차를 빌려 태안읍으로 가서 수리하고 다시 하고 인천으로 올라 간 적이 있다.

4차 사고는 인천의 소이작도 해군 부대시설에 배를 몰고 들어가서 부대에 불려가서 혼이 난 일이 있다. 모르고 들어간 것이다. 그 지역에 살지 않으니 그 지역 사정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1993년도 초에 다시 여수로 와서 여수 주위에 14개 섬을 순화하였다. 여기서는 추도라는 작은 섬에 사는 조종남씨의 가족을 만나게 해준 일이 생생하다. 전국 순회를 마치고 나서 후원자를 만나지 못하고 출판이 지연되다가 1996년도에 ‘낙도선교’ 라는 책이 나왔다. 2판까지 나왔다가 지금은 절판되었다.

이 책은 1. 섬의 개괄. 2 유래와 실태. 3. 선교적 상황 순서로 역었다. 이 책은시중에도 나왔으며 전국의 섬 교회에 약 한 권씩 보내 주었다.

 

4. 2004년부터 2차 전국 탐사

그 뒤에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10년 후에 재판을 준비하면서 일반적인 책자도 만들자고 마음을 먹었다.

2004년에 2차 순회를 앞두고 개인 사비를 들여서 4.5톤 배를 마련하고 조수도 한 사람 데리고 그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섬 답사를 2차로 시작하였다. 2004년부터 올해까지 섬답사는 계속되었다.

2009년도에 목포대학 초빙을 받았고 2013년도에 포털 사이트 네이버를 만나 후원을 받게 되었다. 2009년도에 말에 교회를 사임하고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섬 연구만 전문적으로 하면서 발전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 2차 섬 탐험 중에 가장 인상이 남았던 일

① 2004년도 가을 진도의 송도란 2가구 사는 섬에 이승호(32)란 발달 장애인이 10년 동안 종살이 하였는데 구해 주어서 충남 부여군 두투마리 담배 집에 귀환하게 하였다. 그때 마을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 일이 있다. 그 매형이 육군대령인데 이 일을 나의 신분 때문에 숨기고 고소를 못하게 하였는데 얼마나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한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한다.

② 2008년 연초부터 6월까지 MBC 공익프로인 ‘느낌표’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남희석, 이윤석, 박정아 씨와 함께 전국의 소외된 섬들을 찾아다니며 보람을 느꼈다. 그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인 소외된 섬 마을 찾아서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베풀었다.

2009년도 11월에 신안군의 섬을 순회 중에 금요일 저녁 매화도, 병풍도 등을 답사한 후에 목포로 귀향 하던 중에 그만 물이 빠지고 있는 갯벌 위로 배가 올라가 버렸다. 그러면 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억지로 후진을 하다가 그만 키가 휘어지는 고장으로 꼼짝없이 기다리다가 새벽 1시에 배가 떴다.

주위에 마침 낚지잡이 하는 어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바로 앞에 있는 무안군 복길항으로 배가 견인되어 왔다. 그때 배를 선창 안쪽으로 데려다 주고 가야 하는데 외해 쪽으로 끌고 왔다가 가버렸다.

그 다음 날 일요일 목포 해경에서 전화가 왔는데 바람에 배가 침몰을 했다는 것이었다. 급히 저녁에 와서 달리 방법이 없어서 물속에 잠긴 배를 더 큰 배가 끌고 옆에 있는 조선소로 데리고 갔다.

그때 신분을 밝히고 배 수리를 부탁했는데 400만원을 달라고 하여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2주일 동안 조선소 앞 바다에 배가 잠겨 있었다.

그 당시 여수에서 목포에 와서 장도라는 조그만 섬에 답사를 갔다가 배를 폐선 처리하는 공장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배를 가지고 오면 경비를 받지 않고 고처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거기서 무료로 수리를 해 주었는데 그 회사 이름이 여천해철이며 이명수 사장인데 지금도 교제를 하고 있다. 그 분은 신이 나에게 보내준 천사이며 곳곳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고마운 분들을 많이만났다.

③ 2011년 5월 17일 신안군 수치도 선착장에 걸려 배가 넘어지는 대형 사고로 인해 해양경찰서 경비정이 1번이나 출동하였고, 저녁에 야간 항해를 하면서 여수를 가다가 GPS 고장으로 안개 속에 등대호가 조난당하여 완도해경이 출동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④ 2013년 8월 15일 일행들과 서해안 답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연속으로 발생하여 다시 한 번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천당으로 올라오는 체험을 하였다. 3주일 동안 저희 일행들이 다녔던 섬은 전북과 충남 그리고 인천 경기 섬등 총 52개 정도였다. 8월 15일 일행 5명과 저녁 7시 경 인천의 맨 바깥섬인 울도로 가던 중 울도 입구에서 60밀리 대형 밧줄이 스크루에 감겨서 해양경찰 516함정이 출동하고 다이버가 동원되어 줄을 자르는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다

무사히 울도에 입항하긴 했지만 이 일로 취약지구인 먼 섬 연평도와 우도에 가기 위해 인천해역방위사령부와 2함대사령부에 허락까지 받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취소하고 말았다. 징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를 한 것이다.

⑤ 다음날 옹진군의 지도 백아도 굴업도 선미도를 돌아보고 덕적도에서 1박을 하고 덕적도 북리에서 사진 촬영 중 카메라 가방을 분실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북리항에서 잃어버린 줄 알고 한참을 찾아 헤맸다. 결국 찾지 못하고. 말그대로 맨 붕이 되고 말았다.

이 가방에는 300밀리 렌즈와 최신형 스마트폰, 외장하드, 차키, 각종 카드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너무 실망하였지만 일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경찰과 통신사 등에 모든 조치를 취한 후 기분이 상하여 아침도 점심도 먹지않고 일정을 소화했다 . 그런데 신의 도움인지 저녁 5시 경 이작도를 답사할 때 연락이 왔다.

어느 여행객이 북리 해변에서 가방을 주워 인천으로 나가 연안파출소에 맡겨놓았다고 저희 연구원 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그때 정말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다.

⑥ 서해안을 따라서 내려오면서 19일에 군산 앞바다 섬들을 돌아보고 선유도에서 일박 후에 비안도를 들린 다음에 위도로 2시간 동안 항해했다. 위도는 아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기대를 했는데 그만 그 분들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차를 빌려야 되는데 급히 다음 카페의 '섬으로' 카페지기에게 연락했더니 '위도이야기' 운예님을 소개해주었다. 그 분 덕분에 일행 3명은 무사히 위도 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위도에 들어가는 시간이 마침 점심 식사 때라 운예님의아내 되는 '위도이야기' 펜션을 운영하시는 분의 인도로 생선회를 잘 대접받았다. 그리고 직접 자기 차로 가이드를 해주셔서 중요한 곳에 다니며 설명을들으면서 사진 촬영을 마쳤다.

펜션에서 차를 대접받고 떠날 때는 요즘 한창 나는 위도의 특산품인 게와 소라를 큰 박스에 선물로 주어서 제가 너무 당황하기까지 했다. 저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제가 하는 일을 귀하게 보시고 갑자기 들이닥친 무례한 저에게 대접한 것 같다.

⑦ 2011년 4월 17일 KBS 저녁 9시 뉴스에 내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이 뉴스를 보고 해양수산부에서 추천하여 바다의 날 산업포장 훈장과 여수시장상을 타게 되었다.

 

6. 벌금 못 내 교도소 경험까지

2013년 6월에는 23년 동안 섬 답사 중에 가장 큰 사고가 일어났다.

목포대학 교수와 그 외 사진작가 등 섬 여행자들 일행 6명이서 진도 팽목에서 만나 진도군 미역 섬 곽도와 신안군 흑산도에서 일박 후에 다물도와 위도면의 상왕등도 하왕등도를 거처서 전북 어청도에서 일박 후에 충남 외연도를 답사 한 다음태안의 맨 바깥에 섬인 등대가 있는 격렬비열도가 최종 목적지였다.

이렇게 멀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섬에 상륙하여 감격한 다음 사진 촬영을 마친 후에 드디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 군산에서 일행들이 내리고 다른 일행들이 올라왔는데, 4명이서 저녁 무렵에 신나게 달려가는데 목포에 거의 다 와서 그만 방심한 사이에 배가 그만 압해도 근처에서 마른 갯골에 올라가 버렸다.

마침 물이 빠지면서 배는 좌초하고 말았다. 육지 근처이기에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배를 바다에서 침몰 시키면 큰 과실로 친다. 그래서 목포 해경에 세 번불려갔고, 마침내 벌금이 300만원 나왔다.

주위에서 공익을 위한 일을 했는데 재판을 걸어 보라고 해서 1심에서 100만원을 깎아 주었다. 그 당시 낼 돈도 없고 시간을 끌기 위하여 2심에 갔지만 그대로 내라고 해서 다시 3심으로 갔다가 200만원 그대로 내라고 연락이 왔다.

얼마 후 순천 법원에서 독촉 전화가 오는데 나는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럴 때 일주일간만 감옥 체험을 하려고 기다렸다가 잡혀가서 5일간을 감옥에 살았다. 그 때 감방을 수리하면서 두 군데 감방에 머물렀는데 식사가 우리 집보다 더 잘 나와서 과연 우리나라는 복지 국가인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끼니마다 밥과 국과 반찬이 많이 남아돌아서 변기에 버리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형 형광등 3개가 24시간 켜 있었다. 감옥을 나와서 법무부 장관에서 두 가지 시정을 위하여 편지를 하였는데 식사량을 줄이고 형광등은 LED로 교체하겠다고 답이 왔다.

이북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에서는 날마다 먹지 못하여 굶어 죽어 가는데, 또 기름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인데 이런 것을 시정하게 하려고 내가 감옥에 갔나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재언(필명 이섬)
▲전남 여수시 ▲현) 국립 목포대학교 도서(섬) 문화연구원 ▲포털 사이트 네이버 재정 후원 작가 ▲ 전남일보 섬 전문 기자 ▲저서:‘한국의 섬’ 8권 출간, 2016년 5월까지 8권 출판 계획 ▲메 일: koreaisland34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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