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승절,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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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승절,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한다
  • 하종오 편집인
  • 승인 2015.09.0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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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聯美) 친중(親中) 통한(統韓) 용일(容日)의 힘과 지혜 필요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94년, 중국 땅의 동서남북을 약 2개월 동안 취재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가졌었다. 한중 수교 전인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취재 이후 3년반 만에 다시 가 본 중국은, 중국인들이 잘 쓰는 말로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그 사이에도 숨가쁘게 변하고 있었다.

벌써 2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들은 두 가지 이야기는 아직도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첫번째는 당시 취재팀을 가이드했던 런민르바오(人民日報)의 노기자(주필충 선생, 당시 70대였는데 아직 역강하신지 궁금하다)가 한 말이다.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조선족을 가장 두려워한다. 첫째 조선족이 누구보다 부지런하기 때문이고, 둘째 조선족이 가장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셋째 중국 바깥에 국가를 세운 소수민족은 조선족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나 되는 국가를.” 그 말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국가를 하나도 아닌 두 개씩이나 세웠다’는 그의 말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 중국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서 3일 오전 열린 전승절 행사를 참관하고 있는 박근혜(오른쪽에서 세번째)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에서 두번째) 러시아 대통령, 반기문(왼쪽에서 두번째) 유엔 사무총장. /연합뉴스

 

두번째는 시안의 진시황 병마용갱을 취재하러 갔을 때 들은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발굴 현장에서 안내인은 ‘병마용 발굴 작업은 언제까지로 예상하고 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략 100년 정도가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100년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난다. 대륙 기질 과시하나,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참았다. 그들의 시간 개념도 존중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중국이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 기념식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개최한 3일 이 두 가지 기억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00년은 아니지만 70년 만에 글로벌 리더가 됐음을 세계에 과시한 중국의 굴기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케 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세계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가 씌어진 날

2015년 9월 3일은 70년 동안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하던 중국이 더 이상 자신의 힘을 감추지 않고 글로벌 파워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날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시기 구분을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은 이날 이전과 이후로 2차대전 종전 후의 세계사를 시대구분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만큼 세계의 이목은 이날 중국의 전승절 행사, 특히 사상 최대 규모라는 군사 퍼레이드에 집중됐다.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대형 사진이 걸린 톈안먼 성루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박근혜 한국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등 각국의 정상급 외빈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 외교사절 50여 명이 올랐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 등 중국의 전 지도자들도 시진핑 주석 옆에 나란히 섰다.

 

▲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전승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중거리 탄도미사일 '둥펑-26'(DF-26)을 탑재한 차량이 톈안먼 앞 도로를 지나고 있다. '둥펑-26'은 사거리 3,000~4,000km로 태평양 괌의 미군기지를 타격할 수 있어 '괌 킬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핵심은 중국의 무력 공개였다.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둥펑(東風)-21D'와 '둥펑-26',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31A', 중국의 주력 전투기 ‘젠(殲)-10’ ‘젠-10A’ 등, 그리고 방공미사일 시스템 ‘훙치(紅旗) 6’와 대전차 미사일 시스템 '훙젠(紅箭)-10’ 등 500여 종의 무기가 잇달아 공개됐다. 당초 예상과 달리 중국은 차세대 전략미사일 '둥펑-31B'와 '둥펑-41', 중국판 스텔스 전투기로 알려진 ‘젠(殲)-20’과 ‘젠-31’ 등 최신 전략 무기는 공개하지 않았다. 공중에서는 첨단 군용기들의 에어쇼가 펼쳐졌다.

70분 동안 계속된 열병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자국산 최고급 승용차 훙치(紅旗) 무개차에 올라 엄숙한 표정으로 군인들을 사열했다. "동지들 안녕하세요, 수고 많습니다"라고 그가 인사하면 군인들이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답하는 모습은 중국 식의 색다른 열병이었다.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오전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행사에서 무개차를 타고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 주석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인민해방군 병력 30만명을 감축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중국은 평화발전의 길을 걸으며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같은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30만명을 감축해도 중국군은 200만명이 넘는다. 미국군은 약 140만명이다. 그는 또 기념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중국인이 겪은 피해와 희생을 부각시키면서도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자제했다. 병력 감축 선언으로 중국의 군사대국화를 우려하는 세계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항일 승전 기념일이지만 일본을 지나치게 자극할 필요도 없다는, 자부심에 찬 태도였다.

 

‘퍄오제’(朴姐·박근혜 누님)와 ‘시다다’(習大大·시진핑 아저씨)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행사장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이어 시진핑 주석의 오른쪽 두번째 자리에 섰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내외는 시 주석 오른편으로 다섯번째, 여섯번째 자리에 각각 자리했다. 반면 북한측 대표로 참석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앞줄의 오른쪽 맨 끝에 자리했다.

중국의 네티즌들이 이번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박 대통령을 환대하는 의미로 시 주석의 애칭 ‘시다다’(習大大·시진핑 아저씨)에 빗대 ‘퍄오제’(朴姐·박근혜 누님)라 불렀다는 사실은 두 나라 정상, 그리고 중국과 한국의 우호를 적절히 비유한 것이란 말도 나왔다.

톈안먼 성루는 1954년 10월 1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마오쩌둥 중국 주석과 함께 중국 건국 5주년 기념 열병식을 참관했던 장소였다. 61년 전 김일성, 마오쩌둥 주석이 한국전쟁 휴전 직후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혈맹국임을 과시했던 바로 그 자리에, 한국의 박 대통령과 중국의 시 주석이 다시 서서 나란히 중국군의 열병식을 지켜본 것이다. 한중 관계와 북중 관계의 변화, 동북아의 역학관계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 장면이다.

 

▲ 박근혜(왼쪽) 대통령이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과 톈안먼 성루에 서 있다(위 사진). 1954년 10월 1일 김일성(왼쪽) 전 북한 주석이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과 함께 톈안먼 성루에서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아래 사진). /연합뉴스

 

미국 뉴욕타임스의 베이징 지국장 에드워드 왕은 이날 "박근혜 한국 대통령이 눈에 띄는 노란색 옷을 입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곁을 걸어가는 풍경이 한국과 중국의 밀착을 상징했다"며 "그런데 북한과 '소년 왕'(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오바마 성명 "美日은 과거의 적에서 견고한 동맹이 되었다" 

같은 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태평양전쟁 종전 70주년 기념일’을 맞아 미·일 관계를 "화해의 힘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이 열병식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행보를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을 적극적으로 껴안겠다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일본이 태평양전쟁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한 9월 2일을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일 즉 대일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다음날인 9월 3일을 대일 전승 기념일로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성명에서 "태평양전쟁의 종전은 미·일 관계의 새로운 장이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며 "이후 70년을 거쳐온 미·일 관계는 화해의 힘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밝혔다. 특히 "과거의 적이 견고한 동맹이 되어서 아시아와 글로벌 무대에서 공통의 이해와 보편적 가치를 증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70년 전만해도 이같은 동반자 관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이같은 관계는 오늘날 우리의 공통된 이해와 능력,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며 나는 앞으로 수십년간 계속 깊어질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는 대신 중국이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 등을 전승절 행사에 초청한 것을 비판했다. 바시르 대통령은 대량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주도 아래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지명수배된 인물이다. 역시 중국이 초청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온 반미주의자다.

아베 총리는 물론 주중 대사도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일본에서는 아베 현 정권에 비판적인 무라야마 전 총리가 참석했다.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필리핀도 중국의 초청을 거절했으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중국이 이들을 전승절 행사에 초청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의도에다름아니다. 서방 언론들은 이날 열병식 행사를 '호화 퍼레이드'  '화려한 축제' 등으로 묘사하며 국제사회에 중국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와 영국의 대표적 신문 가디언은 홈페이지에 실시간 속보 난까지 만들어 전승절 행사와 열병식 장면을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중국이 열병식에서 입증하려는 것은 최근 이뤄낸 국제사회에서의 성취 과시"라며 "특히 군사력을 거창하게 보여주려고 기획된 행사"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전승절이 한국에 던진 난제

이제 중국의 전승절을 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다. 한 국제정치 전문가는 중국이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을 그토록 극진하게 환대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만큼 중요한 동맹이 없다, 그리고 한국도 굉장히 중요한 동맹이다, 그런데 한국의 박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에 참석하려 하니 대미 관계를 고려할 때 엄청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중국과 시진핑 주석도 잘 알고 있다, 박 대통령이 그런 고민 끝에 참석했으니 환대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논리다. 적확한 분석이다.

한국이 중국의 전승절에서 환대받은 것을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중국의 굴기를 독자적이고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의 세력균형,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고려할 때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바로 그 문제다. 한국의 어쩔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구한말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 평자는 보수극우로 평가되는 산케이신문 2일자에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기만’이라고 비난하며 “중국과 한국은 '준(準) 동맹' 관계다. 미국과 일본이 이런 중한 관계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칼럼을 쓰기까지 했다.

중국이 70년 만에 미국과 대립하는 글로벌 파워로 부상하면서 세계의 세력균형이 바뀌려 하고 있다. 일본과는 센카쿠 열도 문제, 과거사 문제 등을 표면적으로 물 밑에서는 동북아 패권 다툼이 격렬해지고 있다. 북한이 중국과도 소원해지면서 고립이 심화될 경우 한반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쉽게 예측하기도 어렵다. 올해는 종전 70년이자 우리에게는 광복 70년, 그리고 분단 70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미(聯美) 친중(親中) 통한(統韓) 용일(容日)의 힘과 지혜가 필요하다. 우방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고, 중국과도 보다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 가운데서 70년 분단을 끝낼 남북 관계의 도약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을 포용하면서 동북아에서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중국의 전승절은 이런 국제정세에서 한국에 난제를 던진 행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떠한 힘과 지혜를 발휘해 지금까지의 70년을 넘어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난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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