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움베르트 에코, 풍자가 주는 청량감에 취하면 놓칠 수 있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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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움베르트 에코, 풍자가 주는 청량감에 취하면 놓칠 수 있는 현실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0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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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리뷰
▲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한국 사회 어두운 면을 풍자한 드라마들이 사람들 마음을 얻고 있다. 조금은 과하거나 부족한 인물들이 한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과 싸운다는 드라마가 그렇고, 무엇인가 욕망을 가진 의사들이 자기에게 닥친 음모를 새로운 음모로 맞서는 교도소 이야기가 그렇다.

두 드라마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 모습을 하고 있다. 부족하거나 상처 입은 주인공이 각성과 연단을 통해 자기를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한다는, 선과 악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덜 나쁜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을 응징하고 세상을 고친다는 구도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들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지 이런 성장 서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언젠가 뉴스에서 봄 직한 그래서 분노했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정치인, 경제인 등 특권층들이 비리를 통해 부를 쌓고 그들의 협조자들은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 먹는 모습을 풍자했다. 나아가 특권층들이 자기들의 권리와 생명은 일반인들의 그것보다 우선한다고 믿는 현실도 은유했다.

시청자들이 다분히 만화 같은 흐름에 끌리는 이유는 현실에서 맛본 박탈감을 드라마에서 시원하게 풀어주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최근 몇 년 동안 특권층이 벌인 범죄에 유독 관대했던 사례들을 많이 봐왔다. 그보다 가벼운 혐의를 가진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판결을 내린 사례도. 그러니 신뢰치 못할 공권력에 기대기보다는 직접 해결하는 주인공에게 대리만족할 수밖에.

반면, 이 드라마들을 싫어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가 속한 계층을 사회악으로 묘사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들이 가진 의혹이 뉴스나 탐사 보도 프로그램에 언급이 되었다면 법으로 해결하겠다고 엄포를 놓겠지만 패러디와 풍자라는 방식으로 재창조했으니 자기 이야기는 아니길 바라며 얼굴만 붉히지 않을까.

제작사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일반인들 눈높이에서는 제대로 화를 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웃으면서 이 나라가 자기들 것이라고 믿는 바보들에게.

과연 그렇기만 할까? 움베르토가 쓴 칼럼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 떠올랐다. 제목뿐 아니라 세상을 비틀며 풍자한 주옥같은 칼럼들도.

 

▲ 움베르토 에코. 2015년 마지막 소설 'Numero Zero' 출간에 맞춰 파리를 방문했을 때.[사진=연합뉴스]

패러디로 세상을 꼬집다

움베르토 에코는 매우 알려진 작가이자 철학자, 미학자, 역사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전문 분야는 기호학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방대한 영역에서 전문가이다. 그의 학문적 완성을 담은 책들은 읽기에 다소 버거울 수 있다. 심지어 소설도. 그러나 이 책은 궤를 조금 달리한다. 대중 독자들을 위해 쓴 칼럼을 모아 엮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칼럼들을 쓴 목적을 “현대 생활에 대한 해학적인 고찰과 문학적인 패러디와 환상적이고 황당무계한 잡문들로” 채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에코는 서문에서 패러디를 특별히 강조했다.

 

“패러디의 사명은 그런 것이다. 패러디는 과장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패러디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낯을 붉히지 않고 태연하고 단호하고 진지하게 행할 것을 미리 보여 줄뿐이다.” (p.7)

 

에코는 패러디가 현실의 과장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패러디는 미래에 긍정적인 변화를 부를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왜 하필 패러디로 세상을 비틀었을까? 에코의 전문 분야인 기호학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전통적으로 기호에는 각각 역할을 줘 해석할 수 있었다. 정확한 정의(definition)는 물론이고 상징과 은유로 해석하는 것에도 무게를 두었고. 중요한 것은 그 기호에서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고 공유하는 행위이다.

기호학자 에코는 이 책에서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패러디 혹은 풍자라는 수단으로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권위적이고 비능률적인 관료조직, 당시 어수선했던 이탈리아와 유럽, 세계의 깡패(?) 미국을 기호처럼 상징으로 만들어 풍자했다. 에코는 그들이 옳지 않다고 부조리하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상황으로 은유하고 풍자로 비판했다.

인상적인 글을 뽑자면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1990년에 쓴 칼럼이다. 에코가 이탈리아 사람이니 처음에는 축구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었다. 글 서두에 축구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축구를 싫어한다는 얘기일까? 그런데 축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축구광들을 싫어한다는 얘기였다.

 

“내가 축구광들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지 않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며,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을 자기네들과 똑같은 축구광으로 간주하고 한사코 축구 얘기를 늘어놓는다.” (p.138)

 

에코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소재로 당시 이탈리아 분위기를 은근히 비판했다. 축구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던 특정 세력, 제3 세계 이민자들을 거부하자던 여론과 당시 세력을 넓히던 극우세력들을 비판한 것이었다.

에코의 이 글은 현재 한국으로 치환해도 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위 인용문에서 ‘축구광’과 ‘축구’를 다른 단어로 바꿔보라. 딱 들어맞지 않는가?

또한, 움베르토 에코는 형식과 절차만 중요시하고 정작 핵심을 외면하는 현대 사회를 다양하게 풍자했다. 1996년에 쓴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이 칼럼에서는 기업과 고객 간 커뮤니케이션을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사고나 책임에 대한 면피용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하지만 말해야 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 거짓말의 근원이 된다. 그런 점을 잘 아는 터라 사용 설명서 작성자들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어 한다.” (p.98)

 

우리가 흔하게 먹는 약 설명서에는 세상에 알려진 거의 모든 부작용이 나열되어 있으며 보험약관에는 돋보기로도 보이지 않는 글씨로 회사의 면책사항을 늘어놓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비단 기업과 고객 사이에만 사용되었을까? 에코는 정부가 시민에게,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사용하는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에코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특수한 논리 훈련학교가 있지는 않을까 비꼰다. 예를 들면 이렇다. “모든 독신자는 독신자이다” 라거나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처럼 오로지 진실만을 간결히 표현하라고 훈련하는 학교. 사실을 얘기하는 척하면서 그 누구도 책임질 말을 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풍자했다.

 

풍자,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한 위로인가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에코의 풍자처럼 주어가 빠지거나 행위가 주체가 되는 유체이탈 화법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고는 쳤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묘한 화법이었다.

그리고 에코의 예언처럼 “난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난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이 동사만 바뀌어서 유행한 적도 있다. “난 배고프다. 왜냐하면, 난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처럼.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재미도 있지만, 현상에서 드러난 단면이나 결과만 중요시하는 우리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어서 씁쓸하다.

이 시절 세상을 비틀어 풍자한 움베르토 에코의 글들이 생각난 건 왜일까?

에코는 대상을 명확하게 겨누고 풍자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자기 눈에 들어찬 들보를 보지 못하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그들의 들보를 콕 집어 들어내 보여준 것이다.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썼다. 그 글을 읽는 독자뿐 아니라 비판을 받은 당사자들도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드라마도 분명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부조리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그러나 그들이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드라마 제작사나 투자사는 그들이 비판한 특권층들과 가까울 텐데. 혹시 일반인들에게 현실은 절대 달라질 수 없으니 판타지로나 만족하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었을까?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쓴 ‘아서 클라크’가 판타지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지만 일어났으면 하는 상황”을 다룬다고 했듯이.

에코는 「텔레비전에서 동네의 바보를 알아보는 방법」이라는 1992년에 쓴 칼럼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예언했다.

 
“그러나 드골의 코나 아니엘리의 주름살이나 미테랑의 송곳니를 아무리 웃음거리로 만든다 해도 놀림을 당하는 그들이 놀리는 자들보다 언제나 더 강한 쪽이 될 것임을 우리는 직감으로 알고 있다.” (p.153)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에코의 글이 떠올랐던 건 아니었을까?

 

▲ 해학이 돋보이는 이탈리아 출간 당시 표지 [사진=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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