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2백년전, 아시아 바다는 엄청난 교역로였다

중국~인도네시아~아랍을 잇는 해상실크로드에 사람과 물자 이동…신라의 흔적도 김인영 에디터l승인2019.02.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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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1497년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발견했다고 유럽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수백년 전에 한반도에서 중국, 아랍을 잇는 해상교역로가 열려 있었다.

 

▲ 해상 실크로드와 육상 비단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① 아랍 난파선의 타임캡슐

1,200년전, 9세기에 아랍 무역선 한척이 인도네시아 자바해 벨리퉁섬 해역에서 난파되었다. 이 해역은 예로부터 산호초가 넓게 분포되어 있어 큰 배들이 항해하기 힘든 곳이었다. 무역선은 바투히탐(Batu Hitam: 검은 바위, 黑石)이라는 암초에 부딛쳐 난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바다 속에서 해삼을 캐던 잠수사가 중국 도자기를 발견했다. 2년후 본격적인 수중 발굴이 이뤄졌다. 난파된 선체와 무역품들이 바닷속 17m 지점에 고운 모래에 덮인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아랍 난파선은 벨리퉁 난파선(Belitung shipwreck), 당 난파선(Tang shipwreck), 흑석호(黑石號) 등으로 불리었다.

벨리퉁 난파선은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를 왕래하던 아랍 무역선이었다. 출발지는 중국 당(唐)나라 국제무역항인 광저우(廣州)였고, 목적지는 페르시아만의 무역항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도자기에 ‘보력(寶曆) 2년 7월 16일’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 경종(敬宗) 2년, 서기 826년으로 추정된다.

이 배에는 6만7,000여점의 각종 보물이 가득 차 있었다. 파손된 것을 포함하면 7만 점으로 추정된다. 금·은 그릇과 은괴, 청동거울, 유리병, 칠기, 동전, 선상 생활품 등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싱가포르 국가문물국 아시아문명박물관과 공동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전남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에서 ‘바다의 비밀, 9세기 아랍 난파선’을 개최, 벨리퉁 난파선에서 건져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기간은 오는 3월 17일까지다.

이 전시회에는 ‘아랍 난파선’ 유물 가운데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의 쿠텍푸아트 갤러리(Khoo Teck Puat Gallery) 소장품 189점을 소개되고 있다.

 

▲ 1998년 수중발굴된 아랍 난파선 /문화재청
▲ 금제 인물무늬 술잔(중국 당, 9세기) /문화재청

 

② 당나라 시대, 광저우에 수십만 아랍인 거주

그러면 당시 당나라와 아랍 국가 사이에 교역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이 배가 난파하기 전후에 광저우에서 일어난 아랍인 폭동사건이다.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이 일어나 양귀비(楊貴妃)의 품에 빠져 있던 당 현종이 서쪽 성도(成都)로 쫓겨나고 그의 아들이 황제에 올랐으니, 당 숙종(肅宗)이다. 당시 신라 임금은 35대 경덕왕(재위 742~765년)이었다.

당 숙종 3년인 758년, 중국 남쪽 해안도시 광저우(廣州).

지금 광저우, 홍콩, 마카우, 선천이 위치한 지역으로 당나라 때에도 해양무역도시였다. 이곳에는 당나라 상인은 물론 사라센과 페르시아의 상인, 유태인 상인이 몰려와 상업과 무역활동을 했다. 아랍인들은 마을을 형성해 집단으로 몰려 살았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당나라 관헌과 아랍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을 것이다.

10월 30일 대식국(大食國, 사라센)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광저우시를 약탈하고 바다로 도망쳤다. 중국과 아랍인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해는 계사(癸巳)년이었다. 음력으로는 9월이었다. 중국 사서에는 “大食波斯寇廣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라센과 페르시아가 광저우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이때 광저우를 약탈한 아랍과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으로 돌아가지 않고 광저우 인근 하이난섬(海南道)에 체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당나라는 절도사들이 지방군벌을 형성하고 있어 해남도에는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약탈자들은 바다로 도망쳐 해남도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 숙종은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힘이 미치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다.

당의 황제를 대신해 아랍과 페르시이안들에게 복수를 한 사람은 전신공(田神功)이라는 지방군벌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저항하던 인물인데, 양쯔강(揚子江) 어귀의 무역도시 양저우(揚州)를 쳐들어가 그곳에 있던 대식국과 페르시아인들을 수천명 학살했다. 광저우 학살이 발생한지 2년후인 서기 760년의 일이다.

중국 기록에는 “大食波斯賈胡死者數千人”(대식과 페르시아 상인 수천명이 죽었다), “殺商胡波斯數千人”(상인과 페르시아인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광저우와 양저우는 거리가 멀다. 광저우는 중국 남해안의 도시이고, 양저우는 동해안의 도시다. 아랍과 페르시아 무역상들이 당나라 때 중국 연안에 주거지를 만들어 크게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천명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에서 그들의 인구를 가늠케 한다.

 

▲ 황소의 난 행로 /위키피디아

 

③ ‘황소의 난’에서 외국인 혐오주의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아랍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황소는 소금 밀무역업자였다. 당시 소금산업은 정부가 주도했기 때문에 비쌌고, 세금도 과도했다. 이에 황소 일당은 소금을 밀무역하면서 소비자들에게 반값으로 거래했다. 당 조정이 소금 밀매업자를 색출하면서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당 말기의 ‘황소의 난’이다.

반란군은 879년 중국 남부 무역도시 광저우를 기습했다. 그곳에는 중국이 대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대식국과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활약하고 있었다. 황소군은 이들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페르시아 이슬림교도, 아랍의 이슬람교도, 유태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었다. 수천명이 살상되었다. 1859년 미국 선교단이 이때 황소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12만명으로 추정했다. 또다른 연구자는 사망자가 12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황소의 군대는 뽕나무 밭도 파헤쳤다고 한다. 이미 이때 중국 남부에서 비단 가공업이 상당히 크게 번성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고대에 중국 변방지역에 20만명의 외국인이 거주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큰 상업도시가 형성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 스리비자야왕국의 통치범위와 해상무역로 /위키피디아

 

④ 인도네시아 해상제국 스리비자야

그 무렵 지금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에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650~1377년)이 있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팔렘방(Palembang)이 수도였다.

이 왕국은 우리 역사에서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와 겹치는 700여년 동안에 말레이 반도와 순다 열도를 지배하는 거대한 해상제국을 형성했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9~11세기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수도 팔렘방은 동남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중국·인도 및 동남아시아 각지와 교역하고, 우리나라의 탐라국(제주도)과 교류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섬은 고대부터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인도를 연결하는 동서 해상교역로로서 지정학적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팔렘방은 수마트라 섬 남동쪽 무시 강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은 '하천이 모이는 곳' 또는 '하천의 충적지'라는 뜻으로, 고대로부터 항구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7세기부터 동남아 해상교역로를 장악하고, 말레이 반도와 자바 섬도 지배했다. 왕국은 팔렘방에 좋은 항만 시설을 제공하고 시장을 열어 교역선들을 유치했다.

수도 팔렘방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믈라카 해협과,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 사이의 순다 해협 등 동서 항해의 두 주요 항로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왕국의 강한 해군력으로 동서 간을 이동하는 모든 선박을 통제하며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중국 「신당서」(新唐書)와 「송사」(宋史)에서 스리비자야는 '삼불제‘(三佛齊) 또는 '실리불서(室利佛逝)' 등으로 표기되어 중국과의 내왕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이라는 유명한 승려가 인도에서 공부하러 오가면서 스리비자에 몇 년간 머물렀던 기록을 자신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남겼다.

그 내용을 보면 의정(義淨)은 광저우(廣州)에서 페르시아 배를 타고 약 20일 걸려 수마트라에 도착했다. 팔렘방에서 그는 6개월간 머물며 장차 학업에 필요한 산스크리트어를 익힌 후 인도로 갔다. 의정의 관찰에 따르면, 성채로 둘러싸인 도시 스리비자야에는 약 일천 명의 불승들이 있었다. 불승들의 경전 내용이나 의식이 중국과 별 차이 없었다고 한다.

의정의 기록에 따르면, 팔렘방은 무역선들의 기착지였고 불교의 중심지였다. 의정은 도자기, 진주, 비단 등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며, 장뇌, 백단향, 향료 등이 몰루카스로부터, 면직물은 인도로부터 수입되면서 거래되고 있음을 기록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이곳을 거쳐 간 신라승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팔렘방은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당나라 또는 신라 승려들이 인도로 순례를 떠나 전에 머물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것이 곳이었다.

 

▲ 서역인 얼굴을 한 경주 괘릉 무인석 /사진=김인영

 

⑤ 신라 시대의 서역문화

그 무렵 한반도는 통일신라 시대였다. 이 아랍 상인들이 신라와도 교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외래 문화를 적극 수용했고, 중국 당나라는 물론 일본, 서아시아, 서역과도 교류했다. 서역과의 만남은 육로인 비단길과 바닷길은 해상실크로드 두 경로를 거쳐 이뤄졌다. 당시 들어온 서아시아 ‘황금 장신구’는 신라에서 금세공기법과 무늬로 꽃을 피웠다.

경주 괘릉(掛陵)에 서역인 모습을 한 무인상이 서 있다. 이 무덤이 원성왕(재위 785∼798)의 것이라고 한다. 괘릉 석상의 얼굴이 누구인가엔 해석이 분분하다. 페르시아인이라는 설도 있고,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라는 설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수십만명이 거주하는 아랍인촌이 중국 해안에 건설되어 있었으니, 괘릉의 얼굴이 누구인이든 간에, 그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무역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목포에서 전시되는 아랍 난파선의 유물들은 고대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간의 교역을 비로소 밝혀준 타임캡슐이다. 전시에서는 9세기 해상실크로드 상에서 바닷속으로 사라진 난파선과 그 최후를 맞이한 선원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천 년 동안 바다가 품어온 예술품을 통해 중국-아랍-신라 각 나라들이 동시대 공유했던 문화를 한 자리에서 느낄 수 있다.


김인영 에디터  opinionnews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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