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는 못 찾고 가묘와 기념관만 있는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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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는 못 찾고 가묘와 기념관만 있는 안중근 의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8.14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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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가묘, 뤼순형무소엔 추모관과 전시관…문 대통령 “남북 공동으로 유해 발굴”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독립유공자와 유족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가진 오찬에서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정부는 북한과 공동사업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 미야기 현에는 여순감옥의 간수 지바 도시치가 모신 안 의사 영정이 있고 동양평화론을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도 있다. 중국 하얼빈에도 안 의사의 기념관·동상이 있다"며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안 의사 유해조차 찾지 못했고 김구 선생이 효창공원에 마련한 가묘는 여전히 비어있다. '해방이 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안 의사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 효창공원 삼의사 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김인영

 

안중근 의사의 무덤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다. 효창공원에 ‘3의사 묘소’가 있다. 비석은 세 개인데 무덤은 네 개다. 비석이 있는 3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이고, 비석이 없는 무덤이 안중근 의사 가묘다. 가묘(假墓)란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임시 묘라는 의미다.

안중근의 순국일은 1910년 3월 26일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서글프게도 후손들은 순국한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묘소가 비석이 없는 가묘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묘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해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순국 당시 뤼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안 의사 사형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 의사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년 3∼4월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뼈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땅이 파헤쳐져 당초 목표로 삼았던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측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북한측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신지 108년이 지났는데,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돌아오길 쓸쓸히 고대하고 있다.

 

▲ 뤼순형무소내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 /김인영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뤼순(旅順) 형무소에는 2009년 8월 중국 당국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 맞아 추모관과 전시관을 개관했다.

여순 감옥은 러시아가 처음 만들었다. 1902년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한뒤 동북 3성에서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했다. 이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 곳을 점령했고, 러시아가 만든 감옥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1907년 증축했다. 현재 개관하고 있는 감옥은 그 때 증축한 것이다.

여순 감옥에는 일본에 저항하거나 전쟁을 벌인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들이 수감되었다.

총 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감방이 있으며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인으로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이 수감생활을 했다. 안중근과 함게 거사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도 이 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6~1939년 사이에 이 감옥에는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아인 등 연간 2만여 명이 수용되었고, 1942~1945년 사이에 수감자중 700명이 처형당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감옥의 사용이 중지됐고, 중국이 이 시설을 되돌려 받은후 1971년 7월 박물관으로 복원한후 공개했다.

 

▲ 뤼순형무소 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곳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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