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8월 1일] 강대국에 외면당한 바르샤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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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8월 1일] 강대국에 외면당한 바르샤바 봉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3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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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에 버금가는 전투…잊혀지도록 강요된 대학살극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44년 7월,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졌고, 소련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바르샤바를 향해 대공세를 취했다.

지하로 숨어든 폴란드 저항군은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폴란드 지하저항세력은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폴란드인 스스로 나치 독일군을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군의 앞잡이던 폴란드 공산세력보다 먼저 폴란드를 해방시켜 독립후 주도권을 쥔다는 우파진영의 압박감이 봉기를 유발시켰다. 봉기는 우파진영이 주도했고, 좌파도 동조했다.

봉기의 타이밍은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로 정해졌다. 그러나 예정시간에 앞서 유격대 1,000여 명이 갑자기 집결해 전투를 전개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계략을 꾸몄다는 설이 유력하다. 예정에 앞선 갑작스런 봉기로 저항군은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봉기를 일으켰다.

 

▲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 /위키피디아

 

1944년 8월 1일 시작된 바르샤바 봉기(Warsaw Uprising, 폴란드어로 powstanie warszawskie)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수도 바르샤바를 독일 나치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한 폴란드 국민군이 일으킨 무장봉기다. 외부의 도움이 전혀 없이 63일 동안 진행된 폴란드인들의 봉기는 독일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무참하게 무너졌다.

초기에 폴란드 국민군은 바르샤바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해 해방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은 봉기군이 반공노선의 민족진영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하지 않고 바르샤바 경계 밖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소련군이 진격을 멈추자 독일군은 전열을 정비해 바르샤바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스탈린과 미국 루스벨트에게 폴란드 봉기를 지원할 것을 주장했지만, 소련군은 물론 미국도 보급품을 투하하는 정도였고,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63일간의 전투는 사망자 수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폴란드 저항군 가운데 1만6,000여명이 죽고 6,000 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폴란드 민간인은 15만~20만명이 죽었다. 대부분 민간인은 학살당했다.

독일의 이 잔혹한 학살극은 나치군이 체코 리디체(Lidice)에서 저지른 대량 학살에 버금가는 2차 대전의 최대 잔혹사로 남아있다.

 

▲ 바르샤바 시내 폴란드 국민군 점령지역 /위키피디아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1944년 7월까지, 약 5년 가까이 폴란드는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스로 독립할 준비를 했다.

봉기를 준비한 사람은 2만~5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이중 무기와 탄약을 장비한 군인은 약 2,500여명에 불과했고, 여성도 4,000여명 정도 참가했다.

▲ 타데우시 부르 코모로브스키 /위키피디아

봉기가 예정시간보다 앞당겨져 혼란스럽긴 했지만, 봉기군 사령관 타데우시 부르 코모로브스키(Tadeusz Bór-Komorowski)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국민군은 빠른 시간 안에 바르샤바 대부분 지역을 점거했다.

봉기 이틀 만에 국민군은 중앙 우체국과 조폐창, 병원, 인쇄소, 발전소, 공장을 점령하고, 식량창고와 군복 저장소를 점령했다. 봉기로 인해 바르샤바를 통하던 독일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거병 첫째날, 봉기군 2,000여명, 독일군 500명이 전사했다.

둘쨋날 봉기군은 손수 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12마일 떨어진 프라가에 도달했지만,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소련 공군도 바르샤바에 대한 공습을 멈췄다. 소련군의 도움이 없이 봉기군 스스로가 독일군과 싸워야 했다.

8월 4일, 폴란드 국민군은 바르샤바 내에서 최대 영역을 점령했다. 봉기군은 바르샤바를 8개 구역으로 편성해 각 구역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독일 친위대 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즉각 진압을 명령했다. 이에 각지에 주둔하던 SS 부대와 독일군이 바르샤바로 출동하고, 공수기갑사단까지 바르샤바로 향했다. 힘러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두려워 바르샤바를 시범케이스로 초토화한다는 생각이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의 모든 포로와 군관민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렸다.

독일 폭격기는 매일 바르샤바에 폭격을 쏟아 부었다. 독일군은 민간인이건 봉기군이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살했다. 반란 초기에 6만5,000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집단으로 처형당하고, 볼라(Wola) 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선 1,360 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처형당했다. 독일 특수부대는 바르샤바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 강간, 화형을 일삼았다.

8월 중순에 350여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수감된 수용소가 개방되면서 그 안에 있던 유대인들도 봉기에 참여했다.

나치에 의한 학살극이 벌어지는 동안에 소련군은 전선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독일군과 폴란드 국민군 간의 치열한 교전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스탈린의 입장에선 반공주의 봉기군과 나치 독일이 서로 싸우도록 고의적으로 방관하면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영국의 처칠은 폴란드 국민군을 정부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처칠은 영국과 식민지의 공군을 동원해 폴란드 저항군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 폴란드 국민군의 전투 사진 /위키피디아

 

8월 중순, 독일군은 바르샤바의 정수장을 점령해 물 공급을 중단했고, 봉기군은 90여개의 우물을 파면서 저항했다. 독일군이 도심에 전차와 장갑차량를 이용해 공격했지만, 저항군의 완강한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저항군은 자체로 제작한 쿠부시(Kubuś)라는 장갑차를 투입해 맞섰다.

독일군은 600mm 박격포, 로켓 발사기,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등 각종 무기를 집결시켰다. 독일군은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에 포격과 폭격을 퍼붓고, 전차를 진입시키고 그 뒤에 보병을 투입시켰다. 쌍방은 엄청난 피를 흘렸다. 하인리히 힘러는 바르샤바 봉기 전투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할 정도로 가장 치열한 전투라고까지 묘사했다.

8월 14일부터 폴란드 국민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30분마다 독일의 포격이 쏟아졌고, 봉기군은 방어선을 좁혀 나가야 했다. 봉기군은 바르샤바 구시가지에서 빠져나와 신시가지로 도망쳤다. 그들은 복집한 미로가 얽혀 있는 하수도를 통해 도망쳤다. 부상자 7,000명과 시민 3만명도 신시가지로 도망쳤고,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은 독일군에 전원 처형당했다. 야전 병원의 환자들은 모두 화형을 당했다.

구시가지의 전투에서 폴란드인 3만 명이 죽고, 봉기군 7,5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독일군도 3,900명의 사상자를 냈다.

 

▲ 폴란드 저항군이 재차제작한 쿠브시 장갑차 /위키피디아

 

소련의 스탈린이 방관하던 차에, 미국과 영국은 바르샤바의 봉기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9월 24일 독일군은 도심을 향해 공격해 야전병원의 환자와 직원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이때 일부 저항군 대원이 하수도로 대피했다가 길을 헤메 독일군 방어 지역으로 들어가 150명이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 폴란드 국민군 깃발 /위키피디아

9월 28일 독일군 사령관 폰 뎀 바흐가 조건부 항복을 제의했고 협상이 시작됐다. 10월 1일 독일군과 폴란드 저항군 사이에 조건부 항복에 관해 서명했다. 10월 2일 오후 8시를 기해 모든 지역에서 교전 행위가 중지되었다.

폴란드 저항군은 항복할 준비를 했다. 창고를 잠그고, 군복을 폐기하며, 사망한 봉기군의 신분증은 소련군에게 넘겨주고, 유대인들에겐 위조 신분증을 나눠주었다. 1만5,000명의 봉기군이 포로가 되었고, 5,000명의 부상자들이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일부 저항군 대원들은 포로가 될 것을 거부한 채 폐허 속에서 계속 항전을 했지만, 전투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 폐허가 된 바르샤바 구시가지 (1944년 8월) /위키피디아

 

교전이 끝났지만, 20만 명에 가까운 바르샤바 시민들은 독일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도시는 완전 정적에 휩싸였고, 독일군은 빈 집을 돌며 모든 것들을 약탈하며, 건물을 파괴했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완전히 파괴되었다. 1939년 바르샤바 방어전,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4년 바르샤바 대봉기 이후에 나치 독일의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바르샤바를 파괴했다. 도시의 85%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은 빌라누프 궁전이었는데, 나치 독일군의 사령부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바르샤바 봉기를 주도한 폴란드 국민군과 지하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바르샤바 저항군이 항복한지 3개월후인 1945년 1월 7일 소련군과 소련군에 소속된 폴란드 공산군이 마침내 바르샤바로 진입한다.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 내무위원회(NKVD)는 남아있던 바르샤바 봉기군을 체포하고 투옥했다. 그들은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되었고, 때론 실종 처리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으며,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정보는 검열되거나 폐기되었고, 폴란드 국민군(Armia Krajowa)이란 단어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봉기 45년이 지난 1989년, 폴란드 민주화 운동으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 졌다. 200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을 맞아,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추모식 기념비에 헌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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