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절친, 밤의 왕자…인기스타가 정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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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절친, 밤의 왕자…인기스타가 정권 쥐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7.27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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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켓 챔피언 임란 칸, 파키스탄 총선 승리…반부패 구호로 성공했지만

 

그는 명문귀족은 아니지만 중상류층 부모를 뒀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1952년 1남 4녀의 외아들로 파키스탄 펀잡주 라호르에서 태어난 그는 13살에 크리켓을 시작했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계기는 크게 두단계였다.

첫 번째는 그가 크리켓 금메달리스트라는 사실이다. 그는 1992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공동개최한 그해 월드컵에서 파키스탄 대표는 결승전에서 영국과 싸워 승리했다. 파키스탄의 크리켓 우승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는 영국인들에게도 강인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 주인공은 임란 칸(Imran Khan)이었다.

그는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 출신이다. 깎은듯한 외모, 우람한 풍채, 명문대 출신, 운동스타…. 그는 영국 귀족 사회에서도 인기를 끌만한 필요조건을 갖췄다.

그는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엄격한 이슬람 규율을 따르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런던 사교계에서 그는 플레이보이로 통했다. 매일밤 런던 나이트클럽에 다녔고, 영국 타블로이드의 파파라치들이 그를 늘상 뒤쫓았다. 영국 귀족 여인들과 자주 염문설에 휘말렸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임란 칸에게 두 번째 인기 상승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영국 유태계 금융재벌 골드스미스가의 상속녀와 결혼한 일이었다.

그는 수많은 상류층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43살 되던 1995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절친이었던 제미마 골드스미스(Jemima Goldsmith)와 결혼했다. 당시 제미마의 나이가 21살. 22세의 연하와 결혼하며 영국 타블로이드지를 가득 채웠다. 유태인 집안의 제미마가 이슬람식으로 결혼식을 치른 것도 화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임란과 제미마는 두 자녀를 낳은후 이혼했다.

한때 다이애나 비가 파키스탄 의사 하스낫 칸(Hasnat Khan)과 염문을 뿌렸는데, 임란 칸이 중매했다는 주장이 있다. 임란은 영국 텔레그래프지에 그런 사실을 폭로한 적이 있다. 부인 제미나를 통해 알게 된 다이애나에게 친지인 해스넛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임란 칸과 해스넛 칸은 우리로 치면 같은 항렬의 가까운 친척관계다.

임란 칸은 2015년에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영국인 레함 칸(Reham Khan)과 재혼했지만 두 번째 결혼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최근에 부시라 마니카(Bushra Manika)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 파키스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오를 임란 칸 /위키피디아

 

25일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에서 오랫동안 파키스탄의 정권을 장악해온 양대 정당을 물리치고 인기스타 임란 칸이 정권을 거머쥐었다. 파키스탄 제3당인 테흐리크-에-인사프(PTI)는 총선 승리를 선언했다. 한 때 런던에서 플레이보이로 소문나 있었고, 다이애나 곁에 있었던 크리켓 스타 임란 칸(66)이 마침내 인구 2억명에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의 총리가 된 것이다.

1996넌 그는 정치에 뛰어들어 ‘파키스탄 테흐리크-에-인사프’(PTI)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파키스탄어로 ‘정의 운동당’이란 뜻이다.

그는 부패척결을 구호로 내세웠다.

파키스탄 정치는 오랫동안 부패에 시달렸다. 파키스탄 무슬림연맹(PML-N)과 파키스탄인민당(PPP)의 두 정당이 오랫동안 번갈아가며 정권을 장악하면서 파키스탄 정치를 부정부패로 얼룩지웠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창당한 PPP는 1988년 창당 주역의 딸인 베니지르 부토를 총리로 내세웠지만, 그녀는 부패 혐의로 첫번째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93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지만 이번에는 당시 대통령인 파루크 레가리의 부패 스캔들로 3년 만에 중도 하차했다.

PPP와 경쟁해온 무슬림연맹(PML-N)의 대부격인 샤리프 전 총리도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1990년 샤리프는 부토가 낙마하자 뒤를 이어 총리에 올랐지만 대통령 굴람 칸과 대립하며 결국 부패혐의로 1993년 해임되었다. 샤리프는 2013년 3번째로 총리에 취임했지만 부패 문제로 지난해 7월 총리직에서 쫓겨났다.

임란 칸은 1999년 군부 쿠데타를 지지했다. 당시 군부 쿠데타 후 집권한 샤리프가 부패 무제를 종식시키고 정치적 마피아를 척결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임란 칸은 샤리프로부터 총리 제의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란 칸에 대한 총리 제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의 정당은 빠른 속도로 유권자를 파고 들었다. 반부패를 골자로 하고, 자선, 교육·의료·환경개선등 복지혜택을 내세웠다.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하지만 그의 앞날은 평탄치 않다.

그는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기득권 세력의 양대 정당이 호시탐탐 정권 탈취를 노리며 자그마한 실수에도 임란 칸 정권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국가에서 제3지대 또는 제3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성공할지, 그에게 달려 있다.

미국과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파키스탄은 핵보유국가다. 미국과 서방세계는 파키스탄의 핵무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공격하는 기지로 파키스탄을 활용하면서 핵무기를 묵인해줬다. 북한이 이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어쨌든 앞서의 정권은 미국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임란 칸은 미국에 염증을 느끼는 대중정서를 선거에 활용하면서 탈레반에 대해 동정적인 표현을 많이 썼다. 그레서 그는 ‘탈레반 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국은 혹여 임란 칸이 파키스탄의 반미 정서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파키스탄 군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도 관건이다. 파키스탄 군부는 이번 총선에서 직간접적으로 임란 칸의 PTI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선 임란 칸이 군부의 꼭두각시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의 정치학자 크리스틴 페어는 뉴욕타임스에 “그(임란 칸)는 허수아비다. 그가 지금처럼 된 것은 군부와 정보부대의 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기에 의존해 높은 지지를 얻었지만, 정치적 견해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년이 넘었지만, 작은 조직이라도 직접 관리해본 경험이 없다. 따라서 인도와의 대립관계, 미국의 아프간 작전, 국내 빈부 격차, 종교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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