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대중문화 읽기] 다가오던 ‘서울의 봄’ 앗아간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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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대중문화 읽기] 다가오던 ‘서울의 봄’ 앗아간 그해 겨울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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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 칼럼니스트] 소문대로 스트레스 쌓이는 영화였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이고 다양한 콘텐츠로도 익숙한 소재였다. 그런데도 2시간 21분의 짧지 않은 상영시간 동안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영화이니 혹여 통쾌한 장면이 나올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순진한 관객의 마음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다. 독재자가 사라졌으니 어쩌면 봄이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숨죽이며 독재를 견뎌온 많은 한국인의 육체와 정신을 무참히 짓밟아 놓았듯이.

표현의 제약이 있다고도 느껴지는 지금, 반동의 역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이 영화가 어떻게 개봉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일었다. 무엇보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며 벌어진 군사 반란과 진압의 순간들을 시계열적으로 배치한 게 사실감을 더했다. 아마도 그날 반란군은 진짜 그랬을 것이고 진압군 또한 진짜 그랬을 것 같았다.

‘서울의 봄’이 하고픈 이야기는

<서울의 봄>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이미 역사로 알고 있는 사건을 영화로 만든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영화는 뭔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만 그 이야기가 관객에게 닿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닿는다고 하더라도 만든 이의 의도와 감상하는 이의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 그만큼 영화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장르다. 

그런 면에서 <서울의 봄>은 패를 보여주며 하는 카드놀이 같았다. 다음에 나올 패가 보인다는 말이다. 복선이나 반전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책에 기록된 사실로 영화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유의 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영화라는 걸 보여주듯 <서울의 봄>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지금을 보여주는 듯했다.

무엇보다 전두광(황정민 분), 즉 전두환의 모습이 그랬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된 뒤 국내 모든 정보는 보안사로 집중됐다. 집중은 독점으로 연결된다. 즉, 보안사령관이면서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광이 국내 정보를 독점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전두광은 남의 집 밥상에 오르는 반찬도 알 수 있고 심지어 그 집 강아지를 간첩으로 만들 수 있다며 국내 정보를 장악한 오만함을 표현했다. 그렇게 군사 반란이 시작되었다.

<서울의 봄>은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많이 아는 게 중요하다는 걸 영화 곳곳에서 보여준다. 영화 속 보안사 요원들은 군 통신망을 장악해 모든 대화를 감청한다. 그 순간 반란은 이미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진압은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영화 <더 킹>의 여러 장면이 겹쳐 보였다. 특히, 정우성이 연기한 검찰청 ‘전략수사부’ 한강식 부장검사가 떠올랐다. 전략수사부의 자료실은 도서관처럼 광대하다. 그 광활한 서고에 국내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모든 정보가 쌓여 있었다.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해서.

<더 킹>은 물론이고 <서울의 봄>은 정보 소유, 특히 정보 불균형을 악용하면 권력을 갈취할 수도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울의 봄>에는 여러 선택의 순간, 혹은 타협의 순간이 나온다. 그런데 그 순간들이 모이면 결국 ‘역사의 변곡점’이 된다는 걸 이야기했다. 그래서 아쉬웠고, 아팠다.
 
반란 대응보다는 몸을 피신하기 바빴던 국방부 장관, 그랬던 그가 어쩔 수 없이 진압군 측 벙커에 와서는 진압보다는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며 수뇌부에게 혼란을 준 순간이,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된 후 차순위 명령권자였던 참모차장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신병을 확보했던 반란군 수괴가 도주한 순간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반란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진압군을 철수시킨 육군 수뇌부의 결정, 영화 속 전두광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똥장군’들의 타협이 뼈저리게 아팠다. 

물론 영화가 어떻게 그리더라도 역사는 변하지 않았겠지만, 그 선택의 순간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봄으로 향하던 역사의 흐름을 겨울에서 멈추게 하는 변곡점이 되었으니까.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서울의 봄>을 보는 내내 궁금증이 하나 일었다. 왜 등장인물들이 실명이 아닐까 하는. 역사 속 전두환은 영화 속에서 전두광으로 분했고, 노태우는 노태건으로 분했다. 그리고, 진압군을 이끌고 반란군에 맞섰던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태신(정우성 분)이 되었다.

이에 대해 김성수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캐릭터에게 인성과 품성도 부여하고, 기록엔 없지만 사건 당시 그들의 대화나 표정에 대해서도 자신만만하게 만들고 싶었던 의도였다"고 밝혔다. 다만 관객들도 역사를 다시 돌아보고 각각 생각하는 기억을 건져 올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었다고.

그런데 영화 속 반란군들의 사조직인 ‘하나회’만큼은 실제 이름을 썼다.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인 하나회는 대한민국을 군사 독재가 가능한 나라로 이끈 사조직이었다. 

그런 ‘하나회’인 만큼 실제 조직 이름을 언급하며 역사적으로 단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세에게 ‘하나회’처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패거리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역사는 잊지 않아야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사망했다. 그 2주기 행사가 지난 11월 23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 박희도(영화 속 공수2여단장 도희철) 등 전두환 추종자들이 대거 모였다. 

전두환은 군사 반란과 국민 학살에 대한 뉘우침 없이 천수를 누리다 갔다. 그런 전두환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들 또한 자기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고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천수를 누렸거나 여전히 누리고 있다. 

<서울의 봄>은 그런 세상에 던지는 물음표 같았다. 봄으로 향하던 대한민국을 겨울에 멈추게 한 이들과 그 계승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멱살 잡듯 끌고 왔는데 계속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듯했다. 그리고, 역사는 잊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서울의 봄>이 흥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 세대에서 특히 흥행한다고 한다. 여러 번 관람하는 이들도 많다고. 그런데 영화가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까지 바꿀 수 있을까. 

마침 영화 속 그날처럼 12월 12일이 다가온다. 봄을 바라보게 되는 겨울이 된 것이다. 내년 봄은 어떤 모습일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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