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악인의 서사’를 바라보는 9개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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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악인의 서사’를 바라보는 9개의 시각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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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 칼럼니스트] "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슬로건은 '악인의 서사'라는 책의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인의 서사'에서 악인과 관련한 콘텐츠를 규제하자는 함의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돌고래 출판사의 책 소개에 따르면 SNS 등에서 이뤄지던 그동안의 ‘악인 서사’ 논쟁들은 단절되거나 다소 파편적인 한계가 있어 다양한 이력을 가진 공저자들의 깊은 숙의를 단행본으로 한데 모았다고 한다.

창작계의 화두, 악인의 서사

이 책은 9명의 저자들이 ‘악인의 서사’를 주제로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들 공저자가 글을 쓰기 위해 동원한, 혹은 인용한 원전도 영화나 드라마, 고전소설이나 현대소설, 범죄를 기록한 논픽션, 그리고 희곡, 웹소설, 만화 등 온갖 시대와 장르를 망라했다. 

물론 이들 텍스트 모두 공저자들이 바라보는 ‘악인의 서사’ 관점에서 분석했다.

공동 저자 중에는 SF소설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도 있고 웹소설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도 있지만 9명의 공동 저자 모두 평론가나 연구자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9편의 글들은 기본적으로 ‘평론’ 혹은 ‘비평’의 틀 안에서 쓰였다.

사실 평론이나 비평은 비전문가 관점에서 읽기 어렵다는 오해를 사곤 한다. 많은 평론이 현학적인 문장으로 쓰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평론가들이 인용하는 (전문가들만 아는) 학자들의 이름과 (역시 전문가들만 읽었을 법한) 출전(出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점에서 '악인의 서사'를 접했을 때, 그리고 비평의 틀로 쓰인 책이란 걸 알았을 때 선입견이 작용했었다. 제목은 흥미롭지만 담긴 글들은 지루하거나 어려울 거라고. 

그런데 서점 매대 앞에서 이 책을 훑어보는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공감되는 문장들이 보인 것. 또한 비평의 틀을 하고 있어도 공동 저자 모두 가독성 높은, 친절한 글쓰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평론의 가치가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슬로건은 애초 현실의 잔혹 범죄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규탄하기 위해 대두되었다. 원래는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취지였던 것. 

대표적인 사례가 성범죄의 소굴이었던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발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었다. 그의 발언을 두고 일부 언론이 그의 전사와 범행을 연결하는 등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자 대중의 반발이 일었었다.

그 여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자는 화두는 현재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압력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매혹과 연민의 시선으로 악인과 악행을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향해 이들 작품이 악을 비호하고 합리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고,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지는 현실이기도 하다고.

책 '악인의 서사' 표지

9명의 공저자가 분석한 악인의 서사

한편, '악인의 서사'에 수록된 9편의 글들은 실제 작품의 사례를 분석하며 독자들이 악인의 서사라는 문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고찰해보도록 유도한다. 

‘악인의 서사’라는 추상적 화두로 논쟁을 소비하기보다 다양한 시대, 장르, 매체를 아우르는 유명 작품 속 악인의 사례를 소환한 다음, 창작물에서 악인 또는 악이 어떤 효과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묻고 답하는 데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악인의 서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즉 (독자들에게) 간접 경험으로 작용하는 공동 저자들의 서술을 통해, 독자들은 악인의 서사에 관해 더욱 깊은 이해와 입체적 고민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의도를 가진 책이다.

'악인의 서사'를 읽으며 독자로서 흥미롭고 반가운 대목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필자가 예전에 소개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비중 높은 출전으로 등장한 것. 

그 챕터를 쓴 문학평론가 전용민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자의식에 주목했는데 나르시시스트인 주인공이 소수자를 향한 우월 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악행을 다룬 작품을 조명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서사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인용했다.

'악인의 서사'를 서점 매대에서 훑어보며 필자는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떠올랐다고 했는데 전용민이 쓴 챕터에 나온 문장을 발견하면서였다. 

“나르시시즘은 세계를 인식할 때 타자의 실감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의 감정과 감각, 이해관계에만 몰입해 그것을 지켜내야 할 절대적 당위로 삼는 병적인 자기애다” (83쪽)

전용민은 나르시시즘을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오직 ‘나’만이 배타적으로 중요하다고 감각하는 비대한 자의식”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새로운 빌런'이라고 정의했다. 이 대목들을 읽으며 지금의 현상들이 떠오른 것.

사실, 미디어와 SNS에는 건강하지 않은, 혹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상관하지 않는 자기애에 빠진 이들이 등장하곤 한다. 결국 그들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디어와 SNS에서 강제적으로 소비되며 빌런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지난주부터 이번 주, 그 누구보다 욕을 많이 먹은 한 웹툰 작가의 사례가 그렇다.

무명 시절부터 인류애 넘치는 작품들을 창작한 그는 명성과 부를 함께 쌓아온 작가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그는 대중들에게 애틋한 아버지로 등극한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극도로 이기적인 부모의 전범으로 낙인찍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관계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대중의 심기 판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해 '악인의 서사' 공동 저자이며 영화평론가인 강덕구는 우리 시대가 “법과 도덕을 혼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공동체에 의해 악인으로 지목되면 “도덕이 지탱하는 공동체에 의해 가중 처벌”을 받는다는 것. 다시 말해 “법률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처벌을 완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례는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악인의 서사가 재미있긴 하지만

악인에게 혹은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그만큼 현 세상에서 악인, 혹은 빌런 만큼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세상이 빌런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는 욕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그런 세태를 반영한 '악인의 서사'는 현대의 창작물에서 단순한 흥미 차원으로 악인과 악행을 다루는 것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물론 대중들에게는 악인의 서사가, 즉 빌런의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동 저자인 ‘듀나’ 작가의 제언처럼 이제는 “악인보단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인 지난 3일 저녁 필자의 집과 가까운 분당 서현역에서 흉기 난동이 벌어져 더더욱 그런 맘이 들었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악인의 서사' 9명의 공동 저자들이 본문에서 인용한 원전 텍스트 중 읽고 싶은 책들이 생겼다. '악인의 서사'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또 다른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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