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북한 핵폐기까지 차갑게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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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디테일에…북한 핵폐기까지 차갑게 지켜보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30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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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보다 이행과정이 더 중요…뮌헨 회담 거울삼아야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면, 감격하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보수와 진보라는 낡은 칸막이를 떠나서 국민이든 인민이든 어떤 표현으로 불리든 남과 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에는 공감한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한결같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은 역사적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전쟁광처럼 보였던 김정은이 평화주의자로 둔갑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도 중국도 제껴놓고 한반도 문제의 운전자로 등장했다. 이설주가 출현하고 김여정이 무대를 주름잡았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화면에 비쳐줬다. 김여정이 문 대통령 술잔에 술을 따르고, 이설주는 김정숙 여사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귓속말을 나누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언제 우리가 물고 뜯고 싸우던 사이였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평화의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 감격이 고양된 분위기에 간첩 잡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국정원장이 눈물을 흘린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미디어들은 “이설주가 직접 차문을 열고 나와 경호원들이 당황했다”느니, “줄담배 피는 김정은이 회담장 밖에 나가 조용히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뉴스도 주어담아 보도한다.

이 평화의 분위기가 쭉~ 가서 북한이 정말로 핵무기를 폐기하고 경제에 매진한다면 그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남북 정상의 만남은 우리 국민에게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했다.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것은 고조선 신화쯤으로 잊혀졌고, 연초애 핵단추가 내 서랍에 있다던 위협도 기억속에 사라진 듯하다.

 

▲ 4·27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발표 /청와대 홈페이지

 

환희와 기쁨은 일시적이다. 착각일수도 있다.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기는 쉽다. 역사의 게임에서 쉽게 흥분하는 쪽이 진다. 과거 70여년간 북한이 우리에게 어떤 도발을 했고,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기억하며, 김정은이 약속한 것을 정말로 지킬 것인지, 혹여 위장전술이 아닐지를 차가운 이성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 /위키피디아

 

시계를 80년전으로 돌려보자. 1938년 9월, 유럽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놓여 있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민족주의 광기를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고, 그해 3월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주데텐을 침공하겠다고 공언했다. 침공시기도 10월 1일로 못박았다.

겁이 난 것은 영국이었다.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면 체코와 군사동맹을 맺은 프랑스가 자동개입하고, 영국도 필연적으로 참전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영국이 가장 우려한 것은 독일이 우위에 있던 폭격기였다. 당시 전투기가 최첨단 군사무기로 등장해 폭격기의 공습은 오늘날 핵 공격에 상응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독일이 영국을 공습하면 개전 첫주에 15만명이 사망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영국 총리는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히틀러가 경고한 전쟁개시일을 20일 앞두고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주데텐 문제를 대화로 풀자고 제의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히틀러 제거 공작을 준비해 실행 직전이었다. 총리가 회담을 제의하는 바람에 음모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체임벌린은 9월 15일부터 9월 23일까지 영불해협을 바쁘게 오가며 히틀러와 마주 앉았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위기가 오든 말든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히틀러의 욕망은 무슨 일이 있어또 평화를 지키겠다는 체임벌린의 의지만큼 강력했다”고 평했다.

체임벌린은 영국 언론들을 잘 이용했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회담 사실을 기자들에게 흘리고 기자회견장에서 평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키웠다.

당시 영국언론에 비친 히틀러는 광인(mad man)이었다. 그런 인식도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첫대면한 이후 바뀌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처음 만나보고 “내가 본 자 중에서 아주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 사나이는 냉혹하지만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고 히틀러를 두둔했다.

히틀러도 “나는 독재자가 아니다. 내가 공약한 바를 국민들이 신임했고, 그로부터 권력이 나온다”고 했다.

전쟁 일촉즉발에서 정상회담이 열리자 영국인들은 환호했다. 특히 영국언론은 가관이었다. 어느 민완기자는 “다가오는 전쟁의 암운을 일거에 걷어냈다”고 썼다. 선남선녀들이 거리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는 보도도 나왔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에게 주데텐만 내어주면 전쟁은 없다고 장담했다. 체임벌린은 1차 회담 결과를 들고 의회에 돌아와서 “어떤 사정이 있어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끌어넣을 수는 없다, 무력 충돌은 악몽이다. 나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평화 애호가다”라고 외쳤다. 영국국민들은 전쟁을 거부하는 체임벌린총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체임벌린이 의회에서 다우닝 10번가까지 가는 길에 인파가 몰려 간신히 빠져나갔다고 당시의 기록이 전한다.

체임벌린은 체코의 주데텐만 독일에 넘겨주면 평화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는 히틀러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선전포고일 이틀을 앞두고 체결된 협정(뮌헨협정)은 1년 내에 폐기되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주데텐을 집어삼킨데 이어 이듬해 보헤미아를 침공해 합병하고 슬로바키아에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 1938년 9월 29일 뮌헨회담. 왼쪽으로부터 체임벌린(영국), 달라디에(프랑스), 히틀러(독일), 무솔리니(이탈리아). /위키피디아

 

물론 80년전 뮌헨 회담 당시의 유럽 상황과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다르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지만, 동일하게 재현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과거의 실퍠 사례들을 모아 오늘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쟁을 불사하는 세력과 평화를 고집하는 세력이 충돌할 때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뮌헨 회담은 보여주었다.

 

▲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만찬 모습 /청와대 홈페이지

 

1919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에서 1990년 12월 소련 해체까지 소련공산당은 71년간 러시아와 주변 소비에트를 지배했다. 북한 노동당은 1945년 8월 이후 73년간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다. 인류역사상 최장의 공산정권이다. 공화국 체제라고 부르짖으면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어 3대 세습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향해 3년간 전쟁을 일으키고, 숱한 무력도발과 무장공비 침투, 나아가 핵실험에 ICBM까지 개발하며 국제사회를 위협해왔다.

그 기나긴 혹한의 시기가 어느날 한번의 만남으로 봄이 오듯이 녹아 내렸다면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이 평화의 기치를 내건 장면은 이전에 숱하게 보아왔다. 멀리 김구와 김일성의 회담에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까지 평화와 민족통일이 논의되었다. 며칠전 판문점 합의보다 더 수준높은 합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지금은 다르다고들 한다. 어느 여론조사에서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책 의지를 신뢰한다는 의견이 64.5%나 나오고 불신한다는 의견이 28.3%로 나왔다. 희망수치라고 보아야 한다.

판문점 선언에는 좋은 내용이 다 들어 있다. 그 선언에는 천사만 들어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판문점 선언엔 구체적인 이행 프로그램이 없다. 선언은 추상이기 때문에 억제력이 없다. 억제력은 구체적인 실무협상에서 만들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감격이 크면 실망도 증폭될수 있다. 이젠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아야 한다. 북한 지도부가 너무나 많은 한국민들을 흥분시켜 놓았기 때문에 되돌이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북한이 정말로 핵포기를 하는지를 두눈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는 것도 쇼다. 터널은 또 뚫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두번도 아니도 수십번 속았기 때문에 북한이 완전하게 핵을 내려놓을 때까지, 다시 핵무기를 만들 수 없도록(불가역) 하는 조건까지 이행할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입증될 때 우리는 마음껏 흥분하고 감격하자.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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