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의 통신보국⑥…선경의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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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의 통신보국⑥…선경의 포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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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종현 선경 히장 만나 포기 설득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을 최종선정했다고 발표한 직후인 8월 중순의 어느날. 최형우(崔泂佑) 의원과 손길승(孫吉丞) 대한텔레콤사장이 서울시내 모처에서 만났다.

최 의원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오른팔격이었고, 손 사장은 선경그룹이 21세기주력사업으로 야심찬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이통통신회사의 대표이자 선경의 그룹경영기획실장이었다. 이들은 각각 김 대표 진영과 선경그룹의 실력자들이었다.

최 의원은 “최종현 회장이 선경의 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해주면 사태가 쉽게 풀릴 것”이라며 이동통신을 둘러싼 정치논쟁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최 의원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 대표, 선경의 최 회장 사이에 교량역할을 자처하고 나온 것이다. 손 사장은 이날 회동에서 오간 얘기를 최 회장에게 보고했다.

선경측은 이에 대해 “당시 최 의원은 손 사장에게 사업권을 반납하도록 최 회장을 설득해달라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최 의원과 손 사장의 회동이 있은 후인 8월24일, 서울 하얏트호텔. 김영삼 대표와 최종현 회장 극비리에 단독면담을 가졌다. 김 대표는 최 회장에게 2통사업의 포기를 정식으로 요구했다.

선경측에 따르면 이날 김 대표는 앉자마자 “최 회장, 이유야 어떻든 나는 꼭 대통령이 되고 싶소. 국민들이 저렇게 반대하니 날 좀 도와주시오”라고 요청했고, 최 회장은 직접적으로 사업포기 의사를 밝이지 않았으나 “선경과 선경가족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포기할 때의 어려움을 말했다고 한다. 이날 최 회장은 김 대표와 만난뒤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바로 워커힐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최 회장은 이날 내내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정정당당하게 따낸 이동통신을 고집할 것인가, 「국민정서에 맞지않는다」는 여론에 따라 사업을 반납할 것인가.

김 대표가 최 회장을 만나던 날, 청와대의 김중권 정무수석은 “선경의 반납명분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반납가능성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 오늘 저녁 노 대통령과 김 대표,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의 4자회동을 통해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희망하고, 또 그렇게 끝날 것 같다”고 말해 막후대화에서 의견이 접근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날 하오 6시30분 청와대. 김 대표는 “사업의 추진에 있어 한 점의 의혹도 없도록 해달라”며 그동안의 발언에 관한 오해가 있었음을 사과했다. 노 대통령은 “나에게 맡겨달라”며 수습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회담이 끝난후 김정무 수석은 “두분사이의 오해는 완전히 씻겼으며, 두 분의 신뢰관계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8월25일 노 대통령은 예정대로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틀후인 28일 김 대표가 총재에 취임한다.

이 무렵 선경측은 최 회장의 의중에 따라 제2이통사업권 반납 방침을 굳혔으나 마땅한 반납방법과 사후대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업권 반납만 선언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정치권의 단순한 생각과는 달리 선경으로서는 반납하더라도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선 선경이나 최 회장은 사업권 반납을 선언할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사업주체는 유공을 비롯한 대한텔레콤 참여업체 16개사이기 때문에 선경이 선언한다해도 다른회사들이 원인무효라고 법적으로 대응할 경우 빠져나갈 구멍이 없고 대한텔레콤 자체가 아직 법적 구성이나 이사회 구성을 하지 않은데다 상법상 권한과 법적 대표권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16개 참여업체 전원 합의에 의한 사업권 반납이 이상적이지만 어려울 것이 당연했고, 선정권자인 체신부가 선정 무효 및 보류를 결정해 주었으면 하는 게 선경측의 바램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최 회장을 제외한 선경의 대부분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반납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최 회장 앞에서 “절대로 반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서슴없이 나왔다. 이동통신사업에 관여했던 선경의 한 간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회장이 대통령과 사돈이면 사돈이지 왜 선경이 사업을 반납하느냐, 회장이 선경을 떠나면 되지 않느냐는 등의 불만이 직원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제기됐어요. 체신부도 「그 정도 비난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왜 사업에 참여했느냐」며 질타했지요.”

이런 어려움과 강한 불만 속에서도 최 회장은 마침내 사업권 포기를 결심하게 된다. 김 대표가 민자당 총재직에 취임하기 하루 전날인 8월27일 손길승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대한텔레콤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동통신사업권 포기를 공식 발표했다.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심사를 거쳐 제2이동전화 사업자로 선정되었으나, 대주주인 유공은 국민화합을 위해 사업의 본허가 신청등 제반사항의 계속추진을 포기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사업권을 포기하지만, 내년에는 다시 사업권자 신청에 꼭 참여하겠습니다.”

선경의 대한텔레콤이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최종선정된지 1주일만의 일이었다. 물론 다른 15개 컨소시엄 참여업체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선경의 사업포기 발표와 동시에 송언종 체신부 장관은 “제2이동통신과 관련한 모든 문제는 차기정부의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고 기자들에게 간략하게 발표한뒤, 곧바로 정원식(鄭元植) 총리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선경의 자진반납 형태로 이동통신문제가 마무리 되자 청와대비서실과 체신부의 실무자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그동안 국책사업이 정치 논리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지시(8월26일 국무회의)도 있었고 자신들도 그렇게 건의했건만, 대통령선거를 4개월 앞두고 여지없이 그 당위성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노 대통령도 “대통령으로서 사돈이 하는 기업에 득을 줘서도 안되겠지만, 피해를 줘서도 안되질 않는가. 누가 보더라도 공정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았던가. 행정부 곳곳에서 격분의 소리가 나왔지만 당시는 권력의 축이 이동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직접 진두지휘했던 체신부 박영일 통신정책 심의관의 설명.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시 제2이통사업자 선정은 공정하고 객관적이었습니다. 당시 선경은 물론 포철등 신청 6개사의 사장들이 모두 선정결과에 승복했었지요. 심사평가위원들로 하여금 TV프로에 출연, 선정과정을 설명토록 했지만 여론의 방향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선정을 2개월만 앞당겼어도 정치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사업자선정을 마쳤을 겁니다.”

아무리 실무자들이 공정한 선정이고 특혜는 없었다고 강변해도 임기를 앞둔 대통령이 사돈기업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것은 국민정서에 맞지 안는다는 정치권의 주장에는 당할수 없었다.

그 무렵 TV에서는 「사랑이 뭐길래」라는 주말연속극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국민정서」가 뭐길래, 선경의 최회장은 참여사와 임직원들의 반발을 사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다 따놓은 이동통신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선경측은 그때 최 회장의 결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최 회장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사안을 풀어 나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엔 포기해도 차기정부가 새로 사업자를 선정할 때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통령의 심기를 편케 해주자는 사돈으로서의 마음 씀씀이도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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