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재인 정권의 재앙적 경제 지력 문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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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재인 정권의 재앙적 경제 지력 문제 많다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7.07.3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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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페이스북 ‘리버럴 이코노미스트’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고 세이의 법칙을 설명한 것은 케인스였다. 냉장고를 생산하면, 전량이 시장에서 저절로 소비된다니! 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요설이지만, 사실 세이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본래 세이의 법칙은 "생산이 소비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얘기는 ”생산만 하면 다 소비된다“는 뜻이 아니다. 농부가 밀을 생산해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벌면, 새롭고 더 좋은 재화에 대한 수요가 생긴다는 의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케인스는 세이를 철저히 왜곡했다.

 

‘소비수요’와 ‘소비’는 다르다. 수요는 구매력이 뒷받침된 ‘욕구’이지 ‘소비 그 자체’가 아니다. 소비수요는 생산에 선행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 수요는 철저히 암묵적이고 잠재적이다.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이 시장에서 얼마나 소비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안고, 투자와 생산을 결정한다. 지금 많이 소비되고 있는 재화에 대한 증산을 결정하는 것조차, 증산된 재화가 얼마나 소비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철저히 예측의 영역에 속한다. 소비에 대한 예측이 생산을 유발하지만, 소비 그 자체로 생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가 생산을 추동한다”는 논리는 소비수요와 소비를 혼동한 결과다. 어떤 것을 ‘소비’하려면 소비하는 바로 그 시점에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완료돼 있어야 한다. 예약주문이라는 것이 있지만, 예약주문을 받는다는 것은 그 즉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생산이 완료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기가 좋아질 때 생산지표가 소비지표보다 먼저 반등하고 반대로 경기가 나빠질 때 생산지표가 소비지표보다 먼저 부진해지는 게 세이의 법칙이 갖는 정합성을 잘 보여준다. 생산을 이끄는 것은 소비가 아닌 ‘발현되지 않은’ 소비수요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소득주도성장론 역시 생산이 소비에 선행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지적 오류의 산물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가계소득을 높여 ‘소비-투자-생산-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 사이클을 상정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납품단가 후려치기 근절과 같은 구호들은 가계소득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임금을 높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대기업‧고소득자‧자산가 증세를 통해 복지와 재분배를 강화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려는 것도 다 소득주도성장을 격발시킬 가계소득 확충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과 조세의 급격한 인상은 기업 이윤의 급격한 감소와 동치다. 어떤 기업과 산업이 일정 수준의 이윤을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것은 그보다 적은 이윤을 내고서 생산이 가능한 기업이 아직 시장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율적 경쟁이 아닌 강제에 의한 이윤의 감소는 투자와 생산 동기의 위축을 의미한다. 즉, 소비에 선행해야 할 생산이 위축된다는 얘기다. 임금 인상으로 소비는 증가하는데, 반대로 생산이 줄어든다면 결과는 인플레이션뿐이다. 소비가 기업의 매출 증대로 이어지는 것은 철저히 증산이 이뤄진 뒤의 일이다.

 

소비의 증가세를 보고 기업들이 증산을 결정하리라 예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임금과 조세의 인상분만큼 이윤이 감소한 상황이다. 최대한의 매출 증가를 예상해도 인상분만큼의 본전치기이고, 사실 소비와 생산의 시간차, 기업 간의 경쟁력 차이, 소비 성향 등 불확실성을 유발하는 요인들 탓에 나간 이윤이 전부 매출로 돌아오리라 예상하는 기업은 없다.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투자와 생산 유인이 생길 리 만무하다.

 

생산자의 이윤 동기를 줄이지 않기 위해선 결국 보조금의 확대나 금리 인하와 같은 방법밖에 사용할 수 없다. 보조금이든 금리 인하든 결국 통화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가가치의 산출이 선행되지 않는 통화증발은 버블과 불황으로 이어지는 파괴적인 경기변동을 야기하거나, 고물가‧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것이 오스트리아학파의 결론이며 본지가 누누이 지적한 바다. 정권은 비극적 운명을 내재한, 선진국에서 그 실패 사례가 허다한 오래된 미래의 사막에서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는 신기루를 좇고 있다.

 

재정지출을 늘리기 위한 재원 마련 방안에서도 문재인 정권은 운동권 총학생회 수준의 저능함과 아마추어리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총 178조 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정권의 재정 운용 계획에서 대기업과 고소득자에 대한 핀셋 증세로 마련할 3조 8천억 원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소수에 집중된 과세는 소수에겐 큰 부담을, 재분배 받는 다수에겐 낮은 복지 효능감만을 가져다준다. 북유럽 국가들이 20%가 넘는 부가세를 물리는 것이나, 일본과 미국이 높은 국가부채비율을 안고서도 감세 행보에 나서는 건 바보여서가 아니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국채를 대거 발행할 공산이 크다는 <조선일보>의 보도는 타당하다. 국채 발행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행한 국채가 이 나라의 경제 수준을 제고할 건설적 투자에 활용될 레버리지가 될 것인지, 하룻밤 즐거운 쇼핑을 즐기기 위한 카드론이 될 것인지에 따라 아주 다른 결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안타깝게도 소비를 경제 성장의 기축으로 보고 있는 정권에서 그 귀결은 레버리지 보단 카드론일밖에.

 

카드론을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조달하면 통화증발이요, 외국으로부터 빌리면 외채다. 둘 다 하면 70년대의 영국이고, 외채 부담을 지면 지금의 그리스다. 당장 국가신용도가 높은 상황에선 외채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높은 국가신용도는 낮은 국가부채의 결과이며, 정권이 타도와 징벌과 가렴주구의 대상으로 삼는 주력 대기업의 높은 부가가치 창출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외채를 결국 누가 갚을 것인지 생각해 보라.

케인스 경제학은 논리 정합성이 일천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이 옳다. 그나마도 케인스 경제학은 불황기에 소비되지 않은 유휴자원을 사용하기 위해 총수요를 진작하자는 게 핵심이다. 소비 진작과 수요 창출은 경기변동에 대한 대비책이지, 경제성장을 위한 처방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소득주도성장은 포용적 성장이라는 이념적 구호의 일환에 불과하거나, 극단적인 일부 후기 케인스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한국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게 현 정권 관료들의 목표라면 지금의 경제 정책을 적극 지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가경영이라는 관점에선 단언컨대 최악의 수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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