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정으로 국가를 보전한 오스트리아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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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정으로 국가를 보전한 오스트리아를 보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0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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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정론, 정치공학으로 폄하하기보다 진중하게 들여다 볼 필요

정가에 대연정(大聯政) 논란이 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대권주자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새누리당·바른정당을 포함해 대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민주당 문재인·이재명 후보는 물론 국민의당·정의당 등 야당이 일제히 반발했고, 새누리당·바른정당 등 보수정당들도 정치공학이라며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현재로선 안 지사의 대연정론은 허공에 뜬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대연정 경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1945년 나치 독일에서 해방된 이후 지금까지 수차례의 연정을 실시해왔다. 그 중에서도 1945년의 대연정은 미·프·러·영등 4대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도 중립국의 지위로 국가통합을 보전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 1차 대전 이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는 근세 유럽의 강대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다.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점도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강대국에 포위되어 있다. 따라서 강할때는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했지만, 약할때는 주변의 침략에 노출되기 쉬운 나라였다.

1918년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과 함께 1차 대전에 참전해 패전하면서 제국은 갈라졌다. 1차 대전후 사회주의자 칼 레넌에 의해 1차 공화정이 실시됐지만, 좌우 정쟁, 폭력 대결, 내란으로 점철됐고,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합병됐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한 주로 전락해 2차 대전에 참전하고 패전했다.

▲ 칼 레너

오스트리아 ‘국부’로 불리는 칼 레너는 나치의 제3제국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빈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당시 실질적 정치 세력인 기독교사회당, 인민당, 공산당을 포함한 대연정을 형성했다. 곧이어 소련군이 빈 교외로 진군하자, 레너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의 피해자이고 독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소련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받았다.

칼 레너는 임시정부의 장관직을 각 정치세력에 공평하게 나눈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13개 주요 장관직을 기독교사회당에 4개, 인민당에 4개, 공산당에 3개, 무소속에 2개를 할당하고, 장관 아래 차관을 두 자리씩 만들어 장·차관이 다른 정당이 맡도록 배분했다. 오스트리아 대연정은 효율, 능률보다는 합의와 균형을 중시했다.

▲ 1945년 오스트리아 4개국 분할통치 /위키피디아

이렇게 형성된 대연정에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서방진영은 소련의 괴뢰정부라고 비난했지만, 좌우가 공존하는 대연정의 임시정부를 무시할수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4대 강국은 대연정을 통해 구성된 임시정부를 승인했고, 레너는 분할점령 하에서 10년을 기다렸다.

1947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 냉전이 본격화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대연정 임시정부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세력다툼에서도 자율권을 차음 확대해갔다.

나치가 패망한지 10년 후인 1955년 4월 소련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고, 영토내에 어떤 외국 군사기지도 두지 않는다는 내용의 중립화에 합의했다. 스위스식 중립이다. 이 조약은 미국과 프랑스·영국의 동의를 얻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에 주둔한 4개국 점령군이 모두 철수하고, 1955년 11월 5일 영구중립을 규정한 헌법을 공포했다. 오스트리아는 대연정을 통해 외국 군대의 점령을 극복하고 한국과 독일에서 나타난 분단의 위기를 피해 나갔다.

▲ 독일의 오스트리아 점령 /위키피디아

그러면 오스트리아가 대연정을 통해 국가를 보전한 배경은 무엇일까.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정책비서관을 지낸 배기찬씨는 저서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 1919~1934년 사이의 제1공화국 시기에 양대 계급정당인 사회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이 공존을 거부하고 독점 지배만 추구하다가 히틀러에게 망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따라서 4개국 연합군의 분할 점령이라는 국가직 위기 속에서 국민적 단결과 정치적 통합을 필사적으로 추구했다.

둘째, 확고한 정치기반을 가진 정당과 지도자들이 있었다.

셋째, 타협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각 정당이 권력의 구성비에 합의했고, 이를 통해 대연립정부를 성립시킬수 있었다. 이 구성비는 내각 배분 뿐아니라 국영기업, 국책은행, 방송국 사장 및 이사직 배분에까지 적용돼 계층 갈등을 완화했다.

 

▲ 1945년 한국 분단 /wekipidia

같은 시기에 한국은 어떠했나.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됐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됐다.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와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채 지도자들 사이에 극심한 분열이 발생했다. 좌와 우는 격렬하게 대립했고, 극단적인 시위와 심지어 요인 암살에 이르렀다. 북의 정권은 평양을 방문한 김구를 빈손으로 보냈고, 남의 이승만도 북을 무시했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1948년 결국 남과 북은 갈라져 각자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 결과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비견되는 사망자를 내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다.

 

노무현 정부에서 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합의와 상생, 융합과 재창조의 국가모델」에서 “오스트리아만큼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준거 틀이 되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여러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인 점이나 지정학적 위치도 유사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는 점, 심각한 공산화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 약소국으로서 경제적 생존 전략을 고심해야 했다는 점등에서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안병영 교수는 저서에서 ‘오스트리아 모델’이 구축되고 재편되는 전 과정을 관통하는 요인으로 ‘합의와 상생’ ‘대타협’의 정신, 그리고 ‘융합과 재창조’의 방법론을 손꼽는다. 화해와 타협, 조정과 중재, 점진주의와 실용주의, 융합과 재창조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가 추구해온 길이다.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언론계도, 지식인의 담론 구조도 모두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오스트리아 모델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한편, 대안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파한다.

 

안희정 지사의 대연정론은 한국의 정치현실을 감안할 때 논란의 불씨만 던졌을뿐, 실현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은 엄중하다. 대외적으로 볼 때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새로 취임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강력한 억제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고, 사드 배치를 놓고 중국과 러시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전후해 정국은 혼미할대로 혼미하다. 대선 주자들의 정권 이기심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 구 여권도 분열되고, 야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시위대도 갈라졌다.

우리는 구한말 일본·러시아·중국등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분열을 보았다. 그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1945년 해방후에 지도자들은 분열을 반복했다. 지금 또다시 엄중한 시기가 다가왔음에도 우리 지도자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 근원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다.

안희정의 대연정론은 그가 표를 얻기 위해 내세웠다고 폄하할지라도, 그 본질에 대해서는 진중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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