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의 전쟁①…파경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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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의 전쟁①…파경의 서막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02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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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노태우 “재벌 때문에 나라 망하겠소”

 재벌 개혁이 화두다. 재벌 개혁 문제는 올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활발하게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어느 정파가 정권을 차지하더라도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재벌 개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초 경제개발을 시작한지 벌써 60 갑자의 끝자락에 이르는 시점이다. 하지만 재벌 개혁은 30년전에도 주요한 화두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2·12 사태를 일으켜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공과에 대해선 이미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는 것은 30년전 그의 집권시 재벌과의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경제개발 30년 되는 시점에 재벌의 힘은 막강해져 정부가 컨트롤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때 재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재벌 개혁이 화두로 다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 당시 재벌 개혁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 1990년 1월 22일,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고 있다. 3당은 합당해 민주자유당으로 출범했다. / '재벌 때문에 나라망하겠소' 책자 자료 사진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1988년 2월~1993년 2월)을 6공화국이라고 불렀다. 5공화국인 전두환 정권에 이어진 정권이라는 뜻이다.

1987년 5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6·29 선언을 단행한다. 이어 실시된 국민 직접선거에서 노태우는 김영삼,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 김인영저 “재벌 때문에 나라 망하겠소” /김인영

6·29 선언 후 출발한 6공화국 기간은 군사정부와 문민정부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고 할수 있다.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6공화국 5년 동안, 경제는 호황에서 불황으로, 정경 화합에서 정경 갈등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정부와 기업인은 경제 불황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게 됐고, 이는 결국 재벌의 정치참여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5·8 부동산 특별조치를 시작으로 해서 재벌에 대한 정부의 강경조치가 가해지고, 재벌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정부 조치에 항의했다. 그러는 가운데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제14대 총선과 대선에서 집권당에 도전했고, 다른 케이스지만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집권당내 비주류 수장으로 나서 두 거물 경제인은 다음 정권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고 미래는 과거의 거울이다. 역사는 순환 반복하며 발전하는 법. 따라서 과거의 기록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반성할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점에서 6공화국 시절의 정치, 경제적 갈등과 대립 과정을 찬찬히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총수들의 결의문

1990년 3월 27일 저녁 청와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등 5대 재벌 총수와 유창순 전경련 회장이 들어왔다. 저녁식사를 겸한 이날 만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경고성 당부를 했다.

“재벌들이 국민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재벌들도 국가 경영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부동산 투기로 이익을 추구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업 본연의 임무에 전념해 주십시오. 당신네들이 부동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이승윤 부총리, 김종인 경제수석의 경제팀이 들어선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노 대통령으로선 당부의 형식을 취했지만 지시요, 경고의 의미를 함축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재벌 총수들은 완곡한 표현 속에 감추어진 노 대통령의 의중을 흘려듣고 말았다.

이로부터 43일 뒤인 5월 10일. 盧心(노태우 대통령의 의중)의 실체가 무엇인지, 재벌총수들은 분명히 깨달아 국민 앞에 경제난국의 십자가를 짊어 지겠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5·8 부동산 억제 특별대책’에 대한 항복선언이었다.

그날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청와대 오찬으로 불참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을 제외하고 개최된 이날의 ‘경제난국 타개 결의대회’는 10대그룹 총수의 모임으로는 사상 처음이었다. 10분만에 끝난 이날 대회에서 이건희 회장이 봉투를 열고 결의문을 읽었다.

“부동산 ‘투자억제’를 위해 첫째, ‘불요불급한’ 부동산은 6개월 이내에 자진매각한다. 둘째, 6개월 이내에 공매하지 않은 부동산은 즉각 토지개발공사에 매각한다. 셋째, 비업무용 부동산은 일절 취득하지 않는다.…”

이날 공동결의문은 재계로선 청와대에 대한 항복문서였고, 결의대회는 청와대와 전경련이 이미 합의한 각본에 따라 실행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부동산 투기를 ‘투자’로, 과다보유 비업무용 부동산을 ‘불요불급’한 부동산으로 완곡히 표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5·8조치. 6공화국(노태우 정부) 5년동안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정치적으로 분수령이 됐다면, 경제에서는 단연 이 조치가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 시기적으로도 1990년 1월 22일의 3당 합당에서 5·8조치까지 3개월여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여소야대를 극복한 정치권력과 재계의 역학관계에서도 균형이 깨진 것이다.

5·8조치는 또 3저 현상에 호황을 구가하던 6공화국 초기의 경제가 극심한 노사분규와 이에 따른 임금상승, 무역수지 악화, 부동산가격 및 물가앙등, 증시폭락등의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면서 좌초하기 시작할 때 돌출됐다. 재계는 ‘물정부’ 운운, 정부의 무능을 탓했고, 정부는 경제 침체를 탐욕스러운 재벌의 탓으로 돌릴 때였다.

그러나 5·8 조치는 일시적으로 재벌의 고개 숙임을 강요했지만, 태풍전야의 고요에 불과했다. 정권말기의 권력누수를 틈타 재벌들은 5·8조치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마침내 1년뒤 정주영씨는 재계 대통령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당을 창당,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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