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배에 대한 연구①-제주 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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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배에 대한 연구①-제주 떼배
  • 채바다
  • 승인 2015.12.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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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바다(고대 해양 탐험연구소 소장, 시인)

 

제주에 전래 되는 떼배는 원시 형태의 배(舟)로써 그 원형을 찾으려면 박물관에서 만나게 된다. 이 떼배는 연근해에서 고기잡이, 해조류 채취 등에 이용되었다. 바다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는 섬지방에서 떼배는 세계 여러 문명의 발상지에서 만나게 되는 원시 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船材가 통나무로 건조 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배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가는 타임캡슐과 다름없다. 그것은 오늘날 배의 始原을 찾아 가는 키워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6년5월과 1997년9월 제주에서 일본 오도열도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탐험항해를 하였다.

2001년4월에는 전남 영암 대불항에서 규슈 가라쓰까지 5세기 초 천자문1권과 논어10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학문의 시조로 추앙되는 왕인박사의 고대 한.일문화 이동 뱃길 탐험항해를 하였다.

또한 옛 탐라국(제주도)과 탐진(강진)에 나타나는 탐라국 탄생신화와 벽랑국 3공주가 왔다는 탐라-탐진 신화의 뱃길을 탐험항해 하였다.

 

필자는 본고에서 통나무로 만든 떼배의 시원과 선박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 보고 이 떼배를 복원하여 일본과 전남 강진 신화 뱃길 탐험항해에 대하여 간추려 기술하려 한다.

 

제주에 전래 되는 떼배

제주에는 원시 형태의 통나무로 만든 떼배를 터배, 터위, 테우, 등으로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떼배는 연근해에서 고기잡이, 해조류 채취 등 해녀들의 소라 전복 채취에 오랫 동안 이용되어 왔다.

연구자는 오래전부터 떼배에 대한 시원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런 떼배에 관련한 문헌사료들이 없는 상황에서 전래되는 떼배에 대한 구조와 船材 그리고 제작 방법등을 익히고 70여년 동안 제주 토박이로 떼배와 목선(풍선)을 건조하는데 일생을 살아온 조선장 김천년형을 만나면서 떼배를 건조하여 탐험에 나섰다.

 

일찍부터 제주사람들은 떼배를 이용하여 고기잡이와 해녀들의 물질 활동에도 넓게 이용하였다. 아쉽게도 오늘날에 그 자취를 감추고 실제로 사용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박물관에서나 만나게 된다. 필자는 이 떼배를 복원 제작하여 일본을 세 차례 항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열악한 통나무 9개로 만든 떼배를 타고 무모한 도전이라는 말을 뒤로하고 일본 항해를 작심 하였다. 또한 제주와 전남 강진 마량항으로 항해 하였다. 그 배경은 탐라국 탄생 신화에 나타나고 있는 벽랑국을 찾아 나섰다. 필자는 이 항해를 신화의 뱃길이라 칭하고 있다. 떼배에 대한 원거라 항해 가능성을 확인하려 하였다.

 

제주도는 어느 도서들과 다른 기후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주민들이 바다를 상대로 생활의 근거지로 삼아야 하는 섬 지방 특유의 생활환경 때문에 이 떼배는 섬사람들에게 어업과 해상 교통수단으로 이용 하였다.

떼배는 세계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원시 형태의 배들과 비교하여도 어로 활동과 문화이동 수단으로 크게 기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떼배의 태생적 배경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그 보존 가치가 높다는 판단에 이른 것도 항해 결과에서 찾게 되었다.

선조들의 바다를 향해 도전했던 원초적 해양 유산으로서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사랑과 애환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떼배를 통하여 선박의 진화와 발달 사를 찾아 가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이러한 떼배는 다른 나라의 원시 배와 비교하여 자랑스러울 만큼 그 연구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해양 문화의 시원과 발자취를 찾아 가는데 중요한 방향타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떼배 항해를 통하여 이런 형태의 원시배들은 오래전부터 인류문명의 시작과 함께 강유역과 해안선을 따라서 사람들의 교통수단은 물론 문화이동에 쓰여 졌음을 증명할수 있었다.

 

떼배의 구조와 형태

떼배는 통나무로 만들어 졌다. 전래 되는 크기와 통나무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밑 면 지름은 보통 20-30cm 내외로 길이는 5-7m 내외로 제작 되었다. 이처럼 통나무를 일정 크기로 제단하여 허리에 2-3 곳에 구멍을 뚫고 관통 목으로 연결 제작 하였다. 이 관통 목을 장쇠라 불렀다.

통나무의 균형과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구조물이 만들어 지면 그 위에 30-40cm 높이로 상자리를 만들어 해수면과 거리를 두고 제작하고 있다.

이 상지리는 평소 여름철, 마당에서 사용하는 평상과 다름없는 구조이다. 이 상자리에서 노젓기와 어로 작업과 채집활동이 용이하게 설계 되어 있다. 또한 통나무로 엮어진 구조들은 평소 해체와 결합이 쉽도록 하고 있다. 태풍이 몰려오거나 겨울에는 육상으로 옮겨 놓는. 지혜를 동원하고 있다.

▲ 동해안 지역의 떼배(1990년대 삼척)

관리와 운영

이 떼배에는 2-3명이 승선할 수 있도록 설계 되어 있다. 노는 육지와 다른 구조로 제작되어 평소 한선에서 사용하는 노와 차별된 것이 특색이다. 측면에서 노를 젖는 것이 아니라 선미를 향해 바라보면서 노를 젖게되어 있다. 공간이 협소하여 배의 중심 위치에서 한 개의 노를 이용하여 교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배 한가운데 장대를 세워서 그물을 지탱하여 제주에서 잘 알려진 자리돔 잡는 배로 이용하였다. 이 떼배의 자리돔 잡는 풍경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한 폭의 그림 같아 그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본래 이 떼배는 포구에서 이동은 썰물과 밀물 때를 이용하여 이루워 진다. 이 밖에 소형선박들의 이동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소형선박들이 크고 작은 돛을 달고 항해하지만 떼배는 이와 다르다. 한마디로 돛이 없이 이동한다. 떼배의 구조상 돛이 있다 하여도 빠르게 이동할수 없다. 평상시 배의 속도는 한 시간에 대략 2km 내외로 사람의 걸음 거리 보다 늦다. 대부분 바람이 불면 항해가 어렵다.

 

해상 문화이동으로 나타난 유적과 유물

제주에서 발굴되는 유물•유적들을 살펴보면 일찍부터 한반도를 통하여 문화 유입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1973년 애월읍 빌레못 동굴에서 수집된 동물 화석 뼈와 석기류들이 발굴 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고산리(高山理)유적지에서 발굴 되고 있는 유물들도 오래전부터 해상활동에 대한 여러 상황들을 살피게 된다. 고산리 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대략 9천년-1만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산리와 북촌리, 사계리, 월령리 유적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는 유물들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남해안 도서지역의 토기와 비슷하여 이 지역으로부터 문화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고산리 융기문 토기가 남서 해안 도서지역과 연계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빗살무늬 토기 등도 경남 동쪽 해안에서 부터 서쪽으로 흑산도에 이르는 남해안 지역과 제주도에서 함께 확인된다.

대정읍 상모리 무문토기는 한강유역에서 정립되어 충남 서해안,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도서지방을 거쳐 제주해협을 건너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일본의 대마도에서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 융기문 토기 조각이 발굴되었다.

1976년 대마도해안에서 7000년 전의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1978년 그곳의 서쪽 인근에서 9000년 전의 것으로 인정되는 토기 조각들이 약 500점이 발굴됐다.

이것은 약 9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의 최하층에서 기원전 4000년경의 것이 발굴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것이 규슈 나가사키현 이와가게 동굴과 시코꾸의 에히메현 가미구로 이와동굴에서도 발굴되었다.

 

이러한 발굴 유적들은 한반도와 제주, 일본등지로 연결 되는 해상 이동과 문화의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소바다식 토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새김무늬(줄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로서 평안남도, 황해도, 경상남도 등의 바닷가와 압록강, 대동강, 두만강, 낙동강 유역에서 수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가현, 나가사키현, 가고시마현, 사쯔마반도 다네가섬, 경남 남해안과 가까운 대마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를 중심으로 경남 해안, 대마도를 잇는 규슈, 전라남도 남해안을 잇는 규슈, 제주도에 신석기 문화의 유적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벌 써 8000~1만년을 전후한 시기에 배(舟)를 통하여 해상 이동들의 가능성을 엿 보게 된다.

 

인류 문명과 배의 등장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고대인들은 그들의 환경 속에서 필요한 언어와 생활도구를 만들며 살았다. 이것은 인류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처에서 출토되는 동물의 뼈로 만든 화살촉, 낚시바늘, 돌칼, 돌도끼 등과 석기류, 토기류와 같은 수많은 유물들은 고대인들의 해상 활동에서 생활 수단으로 쓰였던 유물들이다.

동굴이나 움막의 자리에서 숯이 발견되는 것은 고대인들이 불을 발견하여 이용한 흔적들이다. 이러한 유적들은 원래의 장소에서 가까운 곳은 물론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까지 문화 이동과 해상 활동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문화 이동들은 바람과 해류, 그리고 조류와 같은 해양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고대 사람들은 일찍부터 수많은 자연을 이용하여 각 가지 재료에 손을 가하여 다양한 도구를 만들며 살아온 것이다. 이 시기부터 원시 배의 출현과 어로 활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울진 반구대 암각화에서 잘 나타나고 잇다. 이 암각화에서 고래의 등장은 많은것을 시사 하고 있다. 또한 수렵생활에서 사냥한 동물의 그림들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코끼리 상아와 사슴의 뿔 조각 등도 그들의 활동상을 보여 주고 있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사냥 활동에 대한 흔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주장들이 있다. 이러한 발자취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연계의 모습과 자신들의 활동들을 묘사하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지구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살아왔다. 자연동굴이나 인공적인 거처를 정하고 수렵과 채집 활동 그리고 고기잡이 등에 도구를 사용(짜르기,다듬기,묶기)하면서 원시 형태의 배를 만들어 강 유역이나 해안 가까이에서 배를 이용하여 오르고 내리고 건너면서 연근해로 이어지는 연장선 상에서 어로 채집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시도에서 배의 등장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인류는 손이나 발을 이용하여 오리처럼 물갈키 형태로 추진력을 얻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토기에 그려진 그림에서 뗏목배를 볼수있으며 2,500년전에 그리스의 헤로도투스(Herodotus)가 가죽배(cufa)에 대한 글을 남긴 기록이 있다.

토기와 점토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파피루스선들의 그림들을 보면 그 시기가 기원전 4000년으로 판명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떼배와 비교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이다.

 

여기에서 통나무배(dug-out or log out)에 대하여 살펴보면, 영국, 노르웨이,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소련 등에서 통나무배의 출토품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는 4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의 원시배는 길이 5m-9.5m에 이르는 큰 것도 출토되었다. 이 통나무배 통나무 하나에서 차츰 여러 개 모아서 떼배 형태로 만들어 쓰게 되었다고 보아 진다, 한편으로 덩치가 큰 통나무는 연장이나 돌을 구어 파내는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추정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장을 사용한 통나무를 떼배 형태로 묶어서 만드는 과정은 기술의 발달 수순으로 본다.

 

제주도의 해상문화이동

한반도 남쪽에 있는 제주도는 동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나라의 중간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제주도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으로 연결되는 해상교통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항해로 상에서 한라산은 등대 역할과 방위를 결정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제주도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시인거리에 있다. 가장 가까운 곳은 해남과 청산도 완도와 이어지는 강진, 영암, 고흥 반도와 거리는 약 100-120여 km 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들은 시인거리에 있어서 일찍 부터 항해가 일찍부터 제주를 향해 항해를 하다가도 일본 열도 이외에 멀리 떨어진 중국, 절강성, 오키나와, 베트남 등지로 표류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고대 항해는 표류항해로 인한 문화 이동도 피해 갈수 없는 항해의 한 방법이다.

일본 규슈 지방만 보더라도 한반도로부터 표류선박들의 조난 사고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표류와 조난사고들은 고대 뱃길의 항로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곳은 시인거리에 있지는 않지만 해류와 조류 그리고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상륙 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가 1996년부터 2001년 사의 세 차례 탐험 항해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한반도로부터 문화 이동의 통과 항로의 한 해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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