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別抄 뱃길 탐사④- 오키나와 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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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別抄 뱃길 탐사④- 오키나와 뱃길
  • 채바다
  • 승인 2015.12.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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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국 뱃길 탐험

 

오키나와 뱃길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거리는 900-1000km 된다. 조선에서 풍랑을 만나서 천신만고 끝에 귀환 했던 여러 기록에 따르면 여러 차등을 보이고 있다. 1770년(영조 46) 12월 25일 제주항을 출항했다가 조난한 장한철(張漢喆) 일행은 불과 3일 만인 28일에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보면 기록의 오류 여부를 떠나서 이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거리가 그리 먼 곳에 있는 유구가 아닌 듯하다.

아래 표류 상황들을 파악하여 대략 줄잡아서 7일-15일 정도 걸린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짧은 거리만은 아니다. 대부분 제주에서 전라도 남서 해안 도서로 가는 항해 중에 큰 풍랑을 만나서 표류한 사례들이다. 이처럼 해상의 기상들은 시시각각 변화무쌍 할 정도로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범선시대 고대항해는 뱃길을 떠나면 낮에는 해의 방향을 보면서 밤에는 별 자리와 달의 위치를 보며 자신들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하는 천문 항해로 목적지를 찾아 갔다.

 

오래전부터 오키나와에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제주와 관련된 문화와 풍습들이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로지 해상 교통로를 이용한 이동 수단 밖에 생각 할 수 없다.

특히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의 발굴 현상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크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詩)에서 고려배는 베트남 등은 물론이고 대식국(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등지까지 오갔다 고 했다.고려의 해양 진출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는 해상제국 백제, 신라의 장보고 청해진 시대를 이어 받고 있는 해양 제국이다. 조선 기슬과 항해술이 뛰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 기록에 보면 3개월만에 배 9백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의 청동거울에 항해 중인 고려 선박 그림도 이러한 고려의 해양력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막강한 해양력을 가지고 있다. 개경을 중심으로 예성강 벽란도에 세계의 무역선들이 몰려와서 성시를 이루웠다는 것은 고려의 해양력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표류 선박

조선왕조실록에 1397년(태조6년)에 9명이 유구에 표착한 것을 비롯해서

1546년(명종1년)까지 13건의 표류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1456년(세조2년) 나주 출신 양성(梁成)

1477년(성종8년) 제주 김비

1483년(성종14년)중국 양주 표류, 정의현감 이섬(李暹)

1542년(중종37년)박손(朴孫) 일행 「유구풍토기」,

1687년(숙종13년)고상영(高商英) 안남국 표류 이듬해 12월 대정현 귀환「표류견문」
1770년(영조46년)애월 출신 장한철(張漢喆)

1893년(고종30년)12월17일 양우종(梁佑宗·1863~1917) 조천포 출발 한양 가던 중 풍랑 만나 류쿠 열도 표류. ‘표해일기’

 

오키나와에서 만난 제주의 어로 방법

필자는 오키나와 구스크 성 답사중이 이곳 태생 고전승 高田勝씨는 선조들이 흑돼지를 잡아서 그 피를 이용하여 그물이며 주낙 낚시줄과 돛에 발라서 어로 활동을 하였다는 조상들의 풍습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전래 방법은 제주도 어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제주에서 부터 전승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삼별초 세력은 점차 현지 토착세력과 연대하여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 한편 고려의 앞선 정치적, 문화적 경험과 제철, 선박 제조 기술 등을 바탕으로 오키나와가 유구왕국으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과정에서 삼별초의 후예들은 점차 현지에 동화되어 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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