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別抄 뱃길 탐사②-대몽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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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別抄 뱃길 탐사②-대몽 항쟁
  • 채바다
  • 승인 2015.12.0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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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국 뱃길 탐사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동서양을 휩쓰는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세계 지도를 바꾸어 나갔다.

다음은 고려를 앞세워 일본을 정복하려는 속내이다. 첫 수순은 고려의 국왕을 입조시켜 마음을 돌려놓고 물리적인 전쟁 보다 양쪽의 희생을 줄이는 무혈 정복으로 고려의 복속을 시도했다. 이러한 전략은 본격적인 삼별초의 등장으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1270년(원종 11년) 원종은 몽골에 사대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상황들이 벌어 졌다. 이런 기류 속에서 원종은 몽골 제국의 군대아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할 정도로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다.

몽골의 원격 조정에 의존하여 왕권을 이어 가는 나약함을 보이고 있다. 원종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삼별초이다.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왕실에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원종은 삼별초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명부를 압수하는 한편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였다. 삼별초의 반발은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명부가 몽골의 손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위태로울 것은 물론 고려의 방위 정보를 넘겨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는 더욱 결속력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몽골에 대항하여 고려의 복속을 차단하는 구국의 길로 나섰다. 삼별초의 기세는 강화도를 벗어나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구국의 선봉자에 나선 삼별초의 등장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몽골의 침략에 맞서 대항 하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별초는 한 발도 물러설 수 없었다. 고려 왕실이 굴욕적인 복속은 일반 백성들까지 동조하는 추세로 확산 되어 나갔다. 고려의 자존과 위상이 걸려 있는 것이다. 삼별초는 이에 맞서 목숨을 내 걸고 나섰다.

몽골은 차츰 고려 왕실과 연합하여 자신들에 대한 압박수위가 날로 높아 져 갔다. 개경 환도를 거부한데 따른 이유에서이다. 원종은 몽골의 지원 아래 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이에 반하여 몽골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가진 백성들과 삼별초는 크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항복과 다름없는 태도 변화에 삼별초는 이를 차단코자 최 선봉장으로 나섰다.

삼별초는 고려를 지키려는 결연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불 타 올랐다. 삼별초의 용맹스런 와 불퇴전의 용기들은 이미 해상 전투에서 자신감이라 하겠다.

1,000여척을 앞세워 강화에서 진도로 향하는 위세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선박 동원과 이동은 웬 만한 준비와 각오 없이는 결행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고려의 해양 군사력 즉 조선기술, 항해 기술들의 뛰어 났음을 단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로 파악 되고 있다.

여기에 동원된 선박들은 거의 해군선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미 고려는 예성강 벽란도을 거점으로 송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베트남 인도 아라비아 중동까지 세계 해양 무역으로 누비는 해양제국의 후예라는 사실에 주목 해야 한다. 범선 항해시대 해양은 오랜 준비와 도전 없이는 함부로 육지를 벗어 날수 없는 것이 해양이다.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에 맞서 싸워 쉽게 무너지려는 집단이나 군대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로지 맞서 싸워서 이기겠다는 용맹스러움이 없다는 먼 바다로 나가지 않는 것이 뱃사람들의 기질이다. 해상에서 어떠한 싸움에서도 견줄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나설 수 없는 뱃길이다.

 

삼별초에 대한 해산 명령과 명부 압수는 충격적으로 받았다. 국가방위를 맡고 있는 자신들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들고 앞장 선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왕손인 승화후온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정통성을 찾는 수순을 취하여 진도로 향 했다.

이들은 진도에 상륙하여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거제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주요 도서들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산해 나갔다. 이러한 전세를 파악한 개경 왕실과 몽골은 함께 연합을 이루어 나섰다.

1270년 9월, 개경 정부는 김방경을 앞세워 몽골의 장수 아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진도를 공략하였다. 11월 연합군은 진도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1271년 원종이 몽골에 보낸 국서에서 당시 "경상, 전라의 공부는 주로 해상로를 통해 개경으로 물자를 운송하였다.

이런 주요 해상로는 이미 삼별초가 장악하고 있었다. 진도의 해상로가 열려 있지 않는 한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들은 통과하지 못했다.

삼별초가 남서 해안의 중요한 해상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국가 물류 운송의 주요 이동 수단인 조운선, 통과조차 못하게 되자 개경의 왕실은 큰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은 삼별초 지휘부에 여러 차례 회유책을 쓰며 사신을 진도로 보냈으나 이들 마저 억류하는 등 회유책에 응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고려왕실과 몽골은 합세하여 진도를 공격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 하였다.

1271년 5월 15일에 왕실로 소환시켰던 김방경을 복귀 시키고 홍다구와 흔도를 앞 세워서 진도의 용장산성에 파상적인 총공격으로 삼별초을 제압하는데 성공 하였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결국 진도는 이들 연합군에게 함락되어 새로운 퇴로를 찾아 제주로 향했다.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이동 했다. 이 때 남해 등지에서 활약하던 장수 류존혁(劉存奕)도 군선 80척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이들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진용을 정비하고 최후의 결전을 제주에서 치렀다.

제주에 상륙한 삼별초는 진도 세력 외에 경상도 전라도 여러 도서와 내륙에서 집단으로 입도하고 있다. 남해에서 유존혁 장군의 무려 4백 여척과 함께 출병하고 있다.

제주를 뒤 따라온 연합군은 다시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를 제압하는데 성공 하였다. 이때 잡힌 포로는 1300명으로 기록은 남기고 있다. 제주의 싸움에서 삼별초는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제주에서 살아남은 일부 세력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활동하고 있던 또 다른 별초의 세력들은 포기하지 않고 신세계을 찾아 갔다.고 판단된다.

 

그 첫 번째 곳이 오키나와 琉球로 판단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 가지로 요약하게 된다.

첫째는 1955년, 오키나와(沖繩)현, 우라소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癸酉年高麗瓦匠造;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고 한 이 명문(銘文)에 있다.

700여년 시공을 뛰어 넘어서 이들의 활약했던 진도 용장산성과 제주의 항파두리 등지에서 발굴 된 유물과 거의 대동소의 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동과 발자취를 파악하는데 이 보다 더한 물증들은 없다.

또한 이들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은 이러한 항해들이 가능한 거리이며 이 보다 앞서서 고려의 국제 무역은 이미 베트남, 인도, 아라비아 해 까지 진출하고 있다.

여몽 연합군의 대 공세를 감지한 삼별초는 제주 상륙을 포기 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남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이러한 남진 세력은 오키나와를 향하는 민족 대 이동이라 하겠다.

두 번째는 오키나와 구스쿠 산성들이다. 산성의 축성, 설계, 디자인들은 한결같이 고구려와 고려의 성곽들을 롤 모델 하고 있다.(고구려, 고려, 강화, 고려성, 진도 용장산성, 제주진성 등 한반도 고려성 참조 비교하게 된다)

세 번째, 식생활 어로방법과 풍습들에 찾아보게 된다.

 

삼별초 활약

1271년(원종12년) 11월, 고려정부는 이창경과 문선열을 원나라에 보내서 “탐라에 들어간 삼별초들이 남해 여러 섬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장차 이들은 육지로 상륙할 염려가 있으니 섬멸에 적극 나서달라.‘라고 요청할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탐라로 이동한 김통정은 1년여 지난 1272년 3월부터 전라도 연안에 까지 활동영역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충청․경기 서해 연안으로 세를 확장하면서 개경까지 공략을 펴 나갔다.

1273년에 들어서자 몽골군이 주둔해 있던 경상도 연안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육지에 있는 군현 관아까지 공격하여 수령을 잡아 갈 정도로 고려정부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에 맞서서 개경정부는 전함병량도감을 설치하여 삼별초 공격에 맞서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위협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삼별초는 탐라에서 벌이는 싸움과는 별도로 영호남 섬 뿐만 아니라 육지로 상륙하여 관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들의 저항은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다. 탐라 이외 지역에서도 별도로 대항하는 활약상들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

진도가 진압되고 나서 더 이상 반항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크게 빗나갔다. 쿠빌라이는 삼별초의 계속된 항거에 자신들의 일본 원정 계획에 치명타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삼별초 진압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탐라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많은 인명피해와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막강한 여몽 연합군을 앞세운 쿠빌라이는 탐라에 상륙한 삼별초를 철저히 섬멸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들을 진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전력 증강을 위한 시간을 벌고 이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원종 1272년 3월 금훈을 ‘탐라역적초유사(逆賊招諭使)’로 임명하여 산원 이정과 함께 탐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역풍을 만나 보마도(甫麻島)에 정박했으나 삼별초 선단에 발각되어 추자도에 억류되고 초유문서는 김통정에게 보내졌다. 김통정은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후 풀어주었다.

“너희들은 일찍이 사람을 진도에 보내어 우리를 유혹하며 마음을 늦추게 하고는 대군을 끌고 와서 공파하였다. 우리의 부모처자는 물론, 모든 것을 잃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바이다. 이제 또 우리를 멸하고자 유혹하니 마땅히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로되,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전할 것이냐. 그러므로 너희를 놓아주는 것이다.”

 

목숨을 건진 금훈은 곧바로 원나라로 들어가 삼별초를 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무력으로 평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여․몽 연합군은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곧바로 탐라를 공략하지 않고 배를 건조하고 시간 벌면서 회유하는 양면 전략을 세웠다.

홍다구는 김통정을 설득하기 위해 김통정의 조카 김찬과 이소 환문백 등 5인을 보냈다. 김통정은 김찬만 남기고 모두 참하였다.

 

삼별초의 의지를 확인한 연합군은 더 이상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격할 준비가 되자 원종 1273년 2월 심남현(지금의 나주)에 집결하여 진도 공격 때와 같이 파상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러한 상륙 계획은 변덕스런 해상 날씨로 순조롭지 못 했다. 우여곡절 끝에 병선 1백 60척은 추자도를 거쳐서 4월 28일 12,000여 명의 여⋅몽연합군은 항파두성 서북쪽, 명월포, 군항포, 동쪽으로 함덕포로 나뉘어 공격한 연합군은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는 최후의 종말을 고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때 희생자는 김원윤 등 6명을 공개 처형하고 지휘관급 35명과 사졸 1,300여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삼별초군을 진압한 뒤 몽골군 5백, 고려군 1,000명 모두 1천5백을 투입하여 삼별초 잔여세력 소탕과 치안유지 등을 맡도록 했다. 몽골은 탐라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루가치를 파견함으로써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삼별초에 대한 전공으로 김방경은 시중에 올랐고, 변윤(邊胤)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김석(金錫)은 상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나유와 송보연은 대장군으로 승진됐다.

 

김방경이 삼별초 진압을 끝낸 것은 4월 28일이다. 여⋅몽연합군이 영산강 중류의 나주 반남현에서 4월 9일 출정하여 시작한 탐라 소탕작전은 대략 20일 만에 끝난 셈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탐라에 상륙한 여⋅몽연합군과 송담천에서 전투를 벌일 때까지 주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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