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別抄 뱃길 탐사①-고대성곽
상태바
三別抄 뱃길 탐사①-고대성곽
  • 채바다
  • 승인 2015.12.01 2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石城과 오키나와 쿠스크성 중심으로

채 바 다(고대해양탐험연구소장, 시인)

 

몽골 제국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유럽까지 정복하였으나 고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몽골의 고려 침략은 1231년(고종 18)시작되었다. 고려는1232년에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는 대 몽항쟁을 선언하고 이들의 집요한 침략에 대항하며 나라를 지켜 냈다. 그 중심에 삼별초가 있다. 이러한 저항 배경에는 매년 공물 받칠 것을 요구 하면서 벌어졌다. 물론 내정간섭과 복속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압박과 침략은 곧 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필자는 몽골의 침략에서 끝 까지 대항하며 고려를 포기 하지 않았던 삼별초의 정신에 큰 감화를 받았다. 이들의 항쟁은 주로 해상에서 이루어 졌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 왔다. 2007년 6월 '탐라와 유구(琉球·류큐) 왕국' 특별전(국립제주박물관)은 탐라와 오키나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 특별전에서 1955년, 오키나와(沖繩)현, 우라소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癸酉年高麗瓦匠造;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것에 놀랐다. 이후 필자는 삼별초의 주요 무대인 평양과 개성에 이어서 강화도, 진도, 제주도에서 이들의 숨결들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특히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 평양과 개성에서 고구려 성과 만월대 그리고 고려 박물관을 찾을수 있었다.

2006년 11월에 북한을 방문할 때이다.

그 후 강화의 고려 城, 진도 용장산성, 제주 항파두리 城과 오키나와 류쿠왕국의 구스쿠 성을 답사하는 기회를 만들어 갔다. 이곳들은 한결 같이 삼별초의 주요 활동 무대 가운데 한곳이기에 그 흥분은 더 했다.특히 오키나와 여러 곳에 축성된 쿠스쿠 성 답사는 고려의 석공들이 건너와서 쌓은 것처럼 나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오키나와 산세를 이용한 석성들의 축성 기법과 배치 구도는 물론 토목공법에 놀랐다.

평양성과 개성 만월대를 떠올리게 했다. 유서 깊은 마니산 참성단의 성곽들은 말 할 것조차 없다. 이들 성곽에 대한 배치와 축성 공법들은 한결 같이 일란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곽 축성법과 배치는 중국과 일본하고 현저 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부분들이다.

▲ 탐라국 뱃길 탐험

 

고대 성곽을 따라서

성곽은 전쟁에서 최후의 방어 공간이며 공격의 공간이다.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처음이며 마지막 방패막이다. 어느 고대 국가를 막론하고 城은 최고의 석축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이처럼 城들은 그 나라의 국력이며 상징을 나타내는 걸작품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쌓은 토성과 석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고 상당한 고초를 겪으면서 쌓은 역사의 숨결이다

이러한 축성 기술과 건축 기법들은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과 현저하게 다르다. 고구려 성을 비롯해서 고려, 조선시대 이르기 까지 그 脈을 함께 이어오고 있다. 그 축성 공법과 design들은 치밀하고 견고하게 축성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예술성 까지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석축 문화는 청동기 시대 장묘 문화로 알려진 고인돌, 석곽묘에서 그 시원들을 찾게 된다. 고인돌, 이러한 know-how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본다.

다양한 산기슭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城곽 배치와 공간처리에 놀랍다. 과학적인 축성 기술과 토목 공법들을 동원하고 있다. 城은 적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최고의 방어 수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공략하기 가장 힘든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등고선을 따라서 축조하고 있다. 또한 강유역과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서 효율적으로 축성하고 있다. 이러한 성곽들이 조선시대 까지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

 

가. 평양성

평양성은 북한 국보 1호이다. 서기 552년-586년 축성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벽에 명문이 세겨 있는 성석편 발견으로 축성연대와 축성에 5부 사람들이 동원된 사실과 공사 담당자 이름과 관직이 세겨져 있어서 밝혀졌다. 고구려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축성되어 있다.

대동강 유역을 따라서 축성된 평양성은 이러한 지형지물을 최대로 활용하고 있다. 석축 방식은 매우 섬세하고 견고하게 축성 하고 있다. 한편으로 성곽 축성의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성 문을 뚫고 지나가는 적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주기위하여 요소요소에 돌출형 치雉를 배치한 것은 최고의 전략적 공법이 아닐 수 없다. 내성, 중성, 외성을 2중 3중으로 쌓아 포진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중국에 남아 있는 지린성, 국내성, 라오닝성, 오녀산성, 안시성, 비사성에서 찾게 된다.

 

나. 개성 만월대(開城 滿月臺)

북한 국보 122호. 이다. 1973∼1974년에 걸쳐 발굴 조사에 이어 최근 남북 공동발굴조사 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은 고려의 왕궁터이다.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소실되어 폐허 상태로 남아 있으나 조선 초에 내성이 추가되었다. 송악산 남쪽 기슭 해발 50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 궁성 외곽은 토성이었던 것을 후대에 서쪽 구역을 석축으로 쌓았다.

1029년 외성이 축조되면서 도성이 완성 되었다. 이곳 또한 능선을 따라 성벽을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대부분 토성은 훼손 되고 능선과 골짝이를 따라서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곳곳에 세워진 성문들은 궁성 구조에 맞게 여러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개성 고려궁성(만월대)에 대한 제3차 남북공동발굴조사로 이어지면서 2014년 11월 공동 발굴 재개로 올해 6월부터 11월말까지 장기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

 

다.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 고려성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최우 일파가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 하면서 1234년 1월 축성 시작 13년 걸려 축성하였다. 빈번한 몽골의 침략으로 개경성을 모방하여 내성⋅중성⋅외성으로 축성 되어 있다.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남아있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2호로 지정. (문화재청)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그 후 수차례 복원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라. 진도용장 산성(珍島龍藏城 山城)

용장산성은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총 길이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 높이는 4m 내외로 복원되어 있고, 성내에는 복원된 용장사지(龍藏寺址)와 궁궐지(宮闕址)로 파악되고 있다.

산성 구간의 지형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명문기와, 자기류, 동전류 등의 유물로 볼 때 신안군 압해도 출토 명문기와를 감안하면 1243년(고종 30)용장산성이 축조시기로 보고 있다. 1270년(원종11년)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오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또한 여러 마을과 해안선 그리고 능선을 따라 축성 하고 있다. 조사결과 약 13㎞에 이르는 성벽과 함께 고려시대 성문형식으로 성문지 6개소,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치와 적대 3개소, 제사 관련 건물지와 장대를 비롯한 수십 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강화도와 진도는 조석간만의 차이가 6노트 7노트를 상회하는 거친 물살을 이용하여 몽골의 상륙과 공격이 불리하도록 좁은 해역에서 험한 조류를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고도의 해상 전략과 전술에서 삼별초의 해양력(조선, 항해기술)에 놀라게 된다.

 

마.애월 항파두리 성과 환해장성(涯月缸波頭里 城과 環海長成)

 

① 항파두리 성

항파두리성은 북쪽으로 수평선을 훤히 바라다 보여 해상으로 진입하는 적 동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곳은 하천을 최대한 이용하여 주위 15리에 달하고 있다.

외성의 면적은 약 24만 평. 동서남북에 문이 있었고 주위가 하천과 언덕을 이용하여 토성과 석성으로 축성하고 있다. 이러한 축성 방식은 한 반도의 성곽 축성 기술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2011년 08월 19일 이곳 유적지 시굴조사에서 삼별초와 관련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제주고고학연구소).

상귀리 9만2223㎡에서 성벽 하단 기초석렬과 판축된 성토층에서 초석, 문지도리, 적심석, 수혈 유구와 망루지, 소토유구 등 총 108기 등이다. 유물 가운데 상감청자류와 숫막새와 암막새, 암키는 13세기 말 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청동바늘, 청동젓가락, 고누놀이판 등이 발굴되어 삼별초에 관한 유물로 보고 있다.

발굴한 기와조각 중에는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져 있는 헌평와(軒平瓦) 조각과 "고내촌(高內村)...신축이월(辛丑二月)..."이라고 명문(銘文)된 조각들이다.

'신축년'은 고려 고종 28년(1241)에 해당된다. 성내에서 색상이 선명한 고려청자 파편과 거대한 초석(礎石)이 흩어져 있고, 불상도 출토된 바 있다.

 

② 환해장성

환해장성은 1270년 영암 부사 김수가 고려정부의 병력을 이끌고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 해안선을 따라서 섬을 방어하기 위해 지형에 따라 대략 높이 2m 내외 석성이다.

성의 길이는 120여 km.에 달한다. 제주시 북쪽으로 애월읍 고내리, 동쪽으로 조천, 함덕, 성산읍, 온평리와 신산리 해안도로, 대정 일과리, 영락리 등지에서 만나게 된다. 조천과 함덕 사이의 해안 도로에는 대략 3-4미터 높이다.

해안 절벽을 제외하고 섬 전체를 성으로 쌓았다. 이어서 고여림 장군이 700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며 가세하였다. 이런 장성을 쌓기에 제주민들의 커다란 고초가 뒤 따를 수밖에 없다.

 

▲ 서귀포시성산읍 온평리 해안 환해장성

 

이후로도 조선시대 들어 와서도 왜적이 침략이 잦아 보수 보완하였다. 異樣船이 출몰로 헌종 11년(1845)에 환해장성을 수리했다. 탐라기년에 기록이 있다.

 

바. 오키나와 구스크 城

오키나와는 13세기부터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여러 곳에 크고 작은 성곽들이 축성되고 있다. 본섬 북부에 45개소, 중부에 65개소, 남부에 113개소 등 300여개가 분포되어 있다.

구스쿠 (グスク)는 성(城)을 가르치는 말이다. 또한 구스쿠 城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류큐왕국의 대표적인 상징 유적이다. 원래 일본어로 성은 ‘죠’라고 읽고 오키나와에서만 ‘구스쿠'라고 한다.

오키나와 구스쿠의 성들은 한결 같이 크고 낮은 산등선을 따라 축성 되어 있다. 내부 공간은 평탄면과 굴절 계단형’으로 축성되어 있다. 이러한 성곽 축성들은 13세기말부터 14세기 전반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 곳 성곽들도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병풍상의 곡선을 이루며 축성 하고 있다. 고구려 城의 전통으로 알려진 치(雉)와 옹성들을 그대로 본받고 있다. 축성 시기에 사용된 철제 공구와 제작 기술들을 살펴 볼 때 외부로부터 상륙한 경험 있는 축성 기술력을 동원하고 있다. 이곳 원주민들로는 이러한 성곽의 축성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이다.

오키나와 군도에는 360개 넘는 성들이 있다. 이 성곽들의 축조 연대는 대략 13-14세기로 밝혀지고 있다. 이 시기는 삼별초가 제주에서 섬멸 된 이후이다. 앞 서 기술하였듯이 성곽은 거대한 부족들이 전쟁 수단으로 축조되었다. 오키나와 구스크 성 축성 이전 시대를 돌이켜 보면 오키나와 원주민들의 수렵과 농경문화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문화 배경에서 구스크 성곽들의 축성은 상상 할수 없는 시대로 결론짓게 된다. 전쟁의 수단으로 축조된 유산이다. 당시 오키나와 원주민의 생활상으로 보면 전쟁 세력들을 찾아 볼 수 없다.

원주민은 물론 부족들의 전쟁을 일으킬 만한 구실이 전혀 없는 시대이다. 외부로부터 상당한 세력들의 상륙 없이는 어렵다.

 

성곽 주변에서 발굴되는 기와 철제 유물들을 살 펴 볼 때 철기문화를 공유한 문명 집단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발자취들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 유일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고려 기와들이다. 고려의 집단 상륙이외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성곽 축성은 고도의 토목기술을 가진 세력들이 동원되지 않으면 성곽 축성은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성곽축성은 오랜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건축이다. 또한 국경과 집단 성격에 따라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풍토와 지형을 조화롭게 이용할수 있는 숙련된 기술 집단이어야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성들의 성격과 형태 그리고 구조들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오로지 고구려와 고려의 성곽에서만 나타나는 공간 배치와 형식이다. 이러한 성곽 축성은 고도의 토목기술을 가진 세력들이 동원되지 않으면 이러한 성곽 축성은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축성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오로지 오랜 숙련된 기술 집단이어야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성들의 성격과 형태 그리고 구조들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고구려와 고려의 성곽에서만 나타나는 공간 배치와 형태이다.

이처럼 발달된 성곽을 구축할 수 있었던 문명 세력들의 상륙은 오키나와의 지각 변동을 가져 왔다. 그것이 바로 구스크 성곽 들이다. 원시 시대와 다름 없는 평화로운 원주민들에게 선진문명을 가진 성곽 축성 기술을 가진 외부 세력들의 상륙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성곽의 축성 연대는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러한 성곽 축성 기술을 가진 세력은 한반도에서 이 시기에 제주 또는 한반도의 남부 도서 지방에서 퇴각한 삼별초 집단과 맞물리고 있다..

 

삼별초의 활약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와 패전 그리고 퇴각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 수군들이 사기도 많이 떨어 졌다. 진도에서 리더인 배중손을 잃었다. 제주에서 김통정을 잃은 것은 치명적이다.

여기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여러 도서에서 출발한 삼별초의 또 다른 세력들은 제주의 함락을 예견하여 일부는 일본과 오키나와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다.

그 주력세력들이 오키나와로 뱃길을 돌렸다는 정황들을 앞 장에서 지적하였다. 범선 항해에서 동일한 항포구에서 동일 집단들이 출발 하여도 도착지는 여러 지역으로 상륙하기 마련이다.

동력을 이용하는 항해는 목적지 도착은 가능하지만 돛단배는 각자 바람과 조류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세력들의 오키나와 상륙을 예단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 당시 오키나와 원주민들은 전쟁을 모르고 살아가는 평화로운 시대이다. 이런 시기에 고구려 성곽을 빼어 닮은 성곽들이 등장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축성 배치와 기술과 설계 그리고 디자인 까지 옮겨다 놓은 느낌이다. 이런 현장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고려의 해양력은 일찍부터 베트남 인도, 중동까지 무역항로를 개척 해 나갔던 해양 왕국이다. 삼별초는 이러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해양력을 이어 받고 있다. 오키나와 행 뱃길은 사전에 이미 확인해둔 신세계로 향한 출구 할아 하겠다. 이 논제를 배경으로 향후 이러한 의구심들이 점차 하나씩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사. 구스크城 유적과 유물

오키나와 수리성(首里城),포첨성(浦添城),수리성(首里城), 승연성(勝連城)등에서 고려기와 발굴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배경에는 2007년 6월 국립 제주 박물관 <탐라와 유구(琉球·류큐) 왕국> 해양문물교류특별전에서 우라소에성(浦添城) 출토 기와에 새겨진 명문은 큰 반을을 일으키기에 충분 하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암키와에 “癸酉年高麗瓦匠造)”풀어 쓰면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글자 내용이다. 계유년은 1273년 고려 삼별초 세력들이 제주에서 함락된 시대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전시회 에서 선보인 ‘수막새’ 기와가 진도 용장산성에서 발굴된 기와와 일란성 기와처럼 닮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진도에서 발굴된 수막새 수키와는 연꽃잎이 8개이고 오키나와 수막새에는 9개라는 차이 뿐이다.

구성과 디자인 등을 살펴 볼 때 그 DNA는 한 핏 줄이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고려계 기와들이 구스쿠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 되고 있는 것은 유큐왕국이 통일되기 전 패권싸움의 중심무대였기에 고려계 기와들의 출토는 삼별초 활동시기와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들 기와의 제작 년도가 계유년으로 새겨져 있을뿐더러 이 계유년은 1273년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며 항복을 하고 잔여 세력들의 퇴각 한 해와 약속이나 한 듯 닮아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