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연대기 II] 성공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포켓몬스터의 탄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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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연대기 II] 성공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포켓몬스터의 탄생 (3)
  •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 승인 2022.09.10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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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개발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배우고 만들어
포켓몬 신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쌓아 올린 결과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닌텐도가 타지리 사토시에게 후에 포켓몬이 될 ‘캡슐 몬스터’의 제작을 제안한 것은 무작정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나름의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 믿음의 첫번째 근거는 타지리 사토시에 대한 신뢰였다. 타지리 사토시는 게임 프리크라는 게임 공략 잡지 발행으로 당시의 비디오 게임 업계 내에서 유명세도 있었지만 이미 16살 때 SEGA에서 주최한 게임 디자인 아이디어 경진 대회에서 입상해 20만엔의 상금을 탔을 정도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

게임 플레이에 능할 뿐만 아니라 게임 기획력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미 타지리와 게임프리크는 남코(Namco, 일본의 게임 개발 및 퍼블리셔, 격투 게임 철권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회사)를 통해 1989년 ‘퀸티 (Quinty)’라는 이름의 퍼즐 게임을 발매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콘텐츠 산업에서 많은 성공의 창세(創世) 신화가 우연과 행운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포켓몬의 성공은 분명 긴 준비 기간과 함께 인내의 시간 이 필요했다.

포켓몬의 선배라 할 수 있는 게임 프리크의 첫 작품 ‘퀸티’의 패키지 이미지. 사진=게임프리크 홈페이지 캡처
포켓몬의 선배라 할 수 있는 게임 프리크의 첫 작품 ‘퀸티’의 패키지 이미지. 사진=게임프리크 홈페이지 캡처

모든 것은 무에서 시작한다

게임 프리크의 첫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퀸티’는 해외에서는 ‘멘델 팔레스 (Mendel Palace)’로 알려진 게임이다. 어떻게 보면 포켓몬의 선배 격인 이 게임은 게임에 대한 이해도는 높았지만 게임 개발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었던 타지리 사토시를 진정한 ‘개발자’로 만들어 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퀸티의 개발에 앞서 게임 개발 경험이 없었던 타지리는 단순 무식한 방법이지만 닌텐도의 비디오 게임기 패미콤을 하나 하나 뜯어보는 것에서 시작했다. 공식 개발 키트는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하드웨어를 이해해야만 게임을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의 전자상가가 밀집한 아키하바라에서 부품을 하나 하나 조달해 개발 키트부터 게임 소프트를 담는 저장 매체인 롬(ROM)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가며 개발에 몰두했다. 이렇게 밑바닥부터 훑어가며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한 타지리는 비디오 게임기 패미콤의 개발 언어였던 패밀리 BASIC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데 또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무에서 하나 하나 쌓아 올리기 위해 타지리는 결국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준비가 될 때까지 결코 서두르지 않았던 이 기간은 결국 성공을 위한 좋은 밑 거름이 됐다.

퀸티의 북미판 패키지, 멘델 팔레스란 이름으로 발매되었는데 일본판의 이미지와는 완전 다르다. 북미 수출 당시 당초 퀸티 일본판의 일러스트가 ‘너무 귀여워서’ 북미에서는 오히려 인기가 없었고 패키지 일러스트를 바꾸자 판매가 늘었다. 포켓몬 개발 때 이런 북미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사진=위키피디아
퀸티의 북미판 패키지, 멘델 팔레스란 이름으로 발매되었는데 일본판의 이미지와는 완전 다르다. 북미 수출 당시 당초 퀸티 일본판의 일러스트가 ‘너무 귀여워서’ 북미에서는 오히려 인기가 없었고 패키지 일러스트를 바꾸자 판매가 늘었다. 포켓몬 개발 때 이런 북미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사진=위키피디아

포켓몬의 삼총사가 모이다

타지리가 퀸티의 개발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회사인 게임 프리크도 잡지사에서 게임 개발사로 변화하고 있었다. 잡지를 같이 만들던 팀들 중 일부는 그대로 게임 개발로 넘어왔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잡지의 삽화를 담당했던 스기모리 켄이었다.

포켓몬의 디자인을 담당했고 초기 포켓몬의 대부분의 미술 작업을 총괄했던 스기모리 켄은 퀸티의 일러스트와 캐릭터 디자인 등을 담당했다. 개발과 미술은 구해졌지만 정작 중요한 음악을 다룰 사람이 필요했던 타지리는 같은 학교의 마스다 준이치를 팀으로 끌어들였다.

포켓몬 삼총사 중 두 사람. 마스다 준이치(왼쪽)와 스기모리 켄. 사진=게임프리크 홈페이지 캡처
포켓몬 삼총사 중 두 사람. 마스다 준이치(왼쪽)와 스기모리 켄. 사진=게임프리크 홈페이지 캡처

이른바 포켓몬 삼총사로 불리는 포켓몬 개발의 핵심 멤버가 이 때 모이게 된 것이다. 1989년 퀸티의 개발이 끝나자 게임 유명한 아케이드 게임인 제비우스의 광 팬이었던 타지리는 제비우스의 퍼블리셔인 남코가 자신의 첫 게임을 유통해주길 원했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남코는 게임 프리크가 여전히 동아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지적했고, 타지리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준비해 스기모리, 마스다와 함께 게임 프리크 법인을 설립한다. 법인 설립 후 남코와 무사히 계약한 게임 프리크의 첫 게임 ‘퀸티’는 당시 누계 20만 개의 히트작이 되었고 퀸티의 성공이야말로 오래 준비한 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보상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얻을 보상의 끝은 아니었지만 최종의 성공을 위한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문동열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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