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 떠난 박태준④…장기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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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 떠난 박태준④…장기외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2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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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정치적으로 멍들었지만, 해외에선 대접받는 기업인

 

포철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받은 박태준은 1992년 10월 17일 조용경보좌관을 통해 신당불참은 물론 정치를 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뒤 포항과 광양제철소에 칩거하다시피 하다가 11월 5일 장기외유를 시작했다.

명예회장으로 재임했던 기간 박태준씨는 거의 해외에서 보냈다. 1992년 11월 5일부터 12월 18일(선거일)까지의 1차 외유에서는 일본 중국 홍콩 베트남 미얀마를 넘나들면서 이른바 「남방(南方) 정책」을 추구했다. 92년 12월 25일부터 93년 2월 20일까지의 2차 외유에서는 일본 인도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 일본을 거쳐 세계일주를 했다. 명예회장의 「명예」가 해외에서 인정받는 기간이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의 명예가 「멍에」로 작용했던 기간이기도 했다.

박 전회장은 당시의 외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단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이상 회사일에 다시 신경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광양4기 제철소가 준공됨으로써 포항과 합쳐 2,100만톤의 생산체제가 확립되었으므로 10년후 20년후를 내다본 사업계획을 구상하기 위해 중국, 대만, 미얀마등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가 외유를 하던 중 92년 11월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북경공항에 도착했을 때 리무진 20대가 비행기착륙지점에 대기했고 아무런 입국절차도 없이 30분간 모든 차량통행이 통제된 가운데 시내호텔까지 질주했다. 중국정부로서는 비록 정치에서는 손을 뗐으나 포철 명예회장 자리만으로, 박태준이라는 인물만으로 총통 대우를 했다는 것이다.

북경에서 열린 만찬회장에는 차세대 실력자로 꼽히는 주룽지(朱鎔基) 부총리는 물론 장관급 8명, 차관급 11명이 참석했는데 재계모임에서 이처럼 고위인사들이 모이기는 전무했다는 게 당시 중국측 참석자의 얘기다.

중국에서 박태준씨는 북경~홍콩간 고속도로공사 대한 합작참여를 제의받아 논의했고, 수도(首都)강철과 보산(寶山)제철소로부터 각각 1,000만톤규모의 제철소건설 참여 문제를 협의했다.

박태준은 중국 방문중 대표적인 철강기업인 수도강철의 명예고문으로 추대받기까지 했다.

박태준이 중국에서 협상을 벌인 프로젝트는 뭐니뭐니해도 북경~홍콩간 고속도로건설 합작투자.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북경과 홍콩을 잇는 대규모 대륙종단 고속도로 건설사업으로, 포철과 동아건설, 포철 자회사인 거양개발등 국내기업이 합작으로 참여키로 돼 있었다. 중국정부는 1997년 홍콩 귀속에 대비, 북경~홍콩간 약2,400Km의 대륙종단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구상중이었다. 이 사업을 위해 박태준은 11월 13일 홍콩에서 수도(首都)강철총공사의 저우관우(周冠五) 회장과 만나 국제적인 컨소시엄을 구성, 시행키로 합의했다. 박태준은 또 중국측으로부터 공사시행자로는 리비아대수로공사등 대규모토목공사의 경험이 많은 동아건설과 거양개발을 선정키로 하고 최원석(崔元碩) 동아건설 회장으로부터도 참여약속을 받았다.

박태준은 이외에도 냉연강판 공장 설립과 홍콩에 합작투자회사의 설립에도 합의했다.

북경~홍콩간 고속도로는 중국이 향후 10년에 걸쳐 건설한다는 목표만 세워졌을 뿐 구체적인 사업계획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인데 약 100억 달러 이상의 공사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20세기 최대의 토목공사로 일컬어지는 사업. 그러나 박태준이 포철을 떠나고 이 사업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베트남에서는 두 무오이 당서기장을 만나 연산 20만톤 규모의 미니밀 건설을 합의했는데 두 무오이 당총서기는 이 철강회사의 설립에 포철을 건립할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만큼이나 의욕적이었다는 것.

박태준은 베트남에서 또 하노이~하이퐁간 5번고속도로의 건설에 참여하는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사업은 3억~5억달러 규모.

92년 12월 중순 미얀마의 양곤공항. 박태준 명예회장이 트랩을 내려왔다. 미얀마 군사정부 제2인자인 세인웅 장군은 박태준에게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는가 싶었다.

“형놈.”

갑자기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세인웅 장군의 입에서 큰소리로 「한국식」 욕설이 나온 것이다. 사연인즉 조말수 부사장이 미리 입국, 어떻게 하면 한국식으로 최상의 존경을 표할수 있는가라고 물은 세인웅 장군에게 거수경례와 함께 “형님”하고 말하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세인웅 장군은 발음이 나빴던 것이다.

이어 협상에 들어가 1만톤 규모의 아연도강판 공장, 2만5.000톤 규모의 와이어가공 공장 합작사업에 합의했다. 미얀마 정부에서는 박태준씨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정부허가고 뭐고 즉시 다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저녁 만찬회장에서 박태준은 농을 걸었다.

“내가 추진하는 사업이 잘되면 「형님」이라 부르고 잘못되면 「형놈」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통역을 통해 이 얘기를 전해들은 세인웅 장군은 사태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어쩔줄 몰라하며 발음연습을 했다고 한다.

당시 박 회장을 수행했던 구자영(具滋榮)상무의 평가.

“박 회장은 정치에 참여한 뒤에도 늘상 남방정책을 구상했습니다. 정부가 실익이 없는 북방정책에 매달려 있을 때였어요. 이때 중국 베트남 미얀마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광양4기 준공에 따른 공급과잉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박태준은 국내에서 대선열기가 들끓었을 때 외압에 의한 귀국 저지설이 난무했고 정주영 국민당 대표가 입당을 끊임없이 권유했으나 끝내 선거일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선거당일인 12월 18일 귀국, 서울북아현동 자택의 선거구에서 선거를 마친 박태준은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후인 12월 25일 또다시 외유길에 나섰다.

이대공 당시 부사장은 두번째 외유에 대해 “지금까지 철광석, 석탄등 원료를 공급해온 회사와 지난해 10월 종합준공식에 참석한 인사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측근들은 “그의 두번째 장기외유는 그를 둘러싼 각종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첫번째 외유는 측근들이 권유한 것이지만, 두번째 외유는 박 회장 스스로가 선택했다. 측근들은 또 박회장이 귀국후 잠깐동안 간부들이 올린 결재서류를 들춰보지도 않은 점으로 보아 박회장이 사실상 포철을 물러서려고 하는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포철내 한 측근은 “불편한 정치적 입장으로 국내에 머물기 보다 외유를 선택한 것 같다”며 “포철경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당시 분위기를 밝혔다.

박 명예회장은 출국전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나로 인해 임원들이 고생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 더이상 내 문제에 신경을 쓰지 마라. 포철의 내부승진 원칙을 획고히 지키는데 주력하라. 누군가(?)가 포철을 건드릴 때 가만있지 않겠다.”

그의 이같은 입장에 대해 포철 핵심들은 그를 명예회장으로 모시되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간다는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떠한 정치적 외풍이 몰아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경로 회장이 신년(1993년)시무식에서 “대내외 경영환경이 아무리 급속히 변화해도 전임직원의 조직력과 단결력으로 매진할 때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다”며 의지를 밝혔다.

또 박득표 사장이 협력회사 자회사 사장단을 모아놓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박 명예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과 내부승진 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포철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를 막아내는 길은 자회사 협력회사가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박 명예회장의 공백을 내부단결로 메우기로 한 포철의 첫번째 사업은 「남방정책」. 미국, 일본, EC에서는 무역규제가 심해지고 북방국가는 실속이 없기 때문에 중국 동남아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10년이내에 소비재는 물론 기초소재 시장에서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첨단기술이냐, 대량생산이냐의 기로에 서있는 포철은 서둘러 중국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남방정책의 논리였다.

당시 중국의 보산제철소 간부들이 포철을 방문, 보산제철소 3기 확장공사에 포철이 참여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보산제철소의 1기와 2기는 일본의 신일철(新日鐵)과 가와사키제철이 각각 건설했으며, 3기 건설을 위해 신일철, 포철등에 자본및 기술참여를 요청해온 것이다. 포철은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추진중인 연산 1.000만톤급규모의 보산제철소 3기공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황경로회장은 93년초 임원회의에서 “보산제철의 1,000만톤급 제철소건설에 투자하기 위해 최고책임자간 협상을 추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93년 1월 오스트리아 빈의 대통령궁에서 박태준은 오스트리아의 클레스틸 대통령으로부터 「銀星 대명예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 87년 철강업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베세머금상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이 때의 수상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시상식 현장에서는 카네기는 20세기초반의 철강왕, 한국의 박태준은 20세기후반의 철강왕이

라는 평가가 나왔다. 카네기가 당대에 600만톤의 철강생산회사를 건설, 세계1, 2차대전에 크게 기여한 US스틸의 모체가 됐다면, 박태준은 당대에 2,100만톤 체제를 완성, 한국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

세기말의 철강왕 박태준. 「아이언 朴」이라는 애칭을 가졌던 그는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멍들고 나들이했던 해외여행에서 대접받은 기업인이었다. 그는 이 외유에서 돌아온 직후 명예회장직마저 내던져 버리고 또다시 정처없이 해외로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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