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연대기]㊷ 왜 가요와 팝의 길이는 4분내일까?– 재즈와 현대 대중음악의 탄생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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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연대기]㊷ 왜 가요와 팝의 길이는 4분내일까?– 재즈와 현대 대중음악의 탄생 (하)  
  •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 승인 2021.10.3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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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콘텐츠 산업의 역사를 볼 때 산업의 흥망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 모든 신기술은 기술의 발명과 이를 활용한 신 제품의 출시로 완성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기술의 신 세계로 인도하는 길을 멀고도 험했고, 사람들은 보수적이었다. 기술의 대중화는 결국 기술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하는 콘텐츠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고, 콘텐츠 산업은 그렇게 기술과 함께 현대 대중문화를 형성해갔다.

음악 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1870년대 축음기라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술이 개발되었지만, 축음기가 대중들에게 보급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였다.

초기 축음기 개발자 중 한 명인 토머스 에디슨은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자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가 축음기와 같은 원리를 가지는 기계의 유일한 개발자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축음기 시장의 비즈니스 전망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초기 축음기의 산업 확장기

그는 초기 축음기를 비즈니스나 기록 용도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비즈니스의 계약이나 제안에 대해 녹음을 하고 이를 상대방에 전달하는 일종의 ‘음성 메일’이나 유언(遺言), 중요한 연설과도 같은 음성 기록을 전달하는 ‘특수한’ 용도로 사용했다.

실린더 형태의 초기 축음기 기록 매체의 한계로 인해 녹음을 복제하여 보급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실린더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고 어디까지나 종이로 음성 기록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했다. 1887년 독일계 미국인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에 의해 보다 저렴한 매체인 왁스 실린더가 개발되자 축음기는 대중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에밀 베를리너는 미국에서 에디슨과 축음기 특허권을 놓고 오랜 법정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에디슨에게 지고 축음기 특허권은 에디슨에게 돌아간다)

당시 포노그래프 팔러의 모습 벽에 진열된 실린더를 고른 후 정면의 축음기에서 듣는 형태였다 출처=TEARA 캡처
당시 포노그래프 팔러의 모습 벽에 진열된 실린더를 고른 후 정면의 축음기에서 듣는 형태였다 출처=TEARA 캡처

18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최초의 ‘포노그래프 팔러’라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번역하자면 ‘축음기 휴게실’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축음기라는 기계를 판매하는 가게가 아니라, 일종의 현대 비디오방이나 DVD방같이 녹음된 오디오 콘텐츠들을 들을 수 있는 매장이었다.

고객들은 가게 벽에 적힌 광고 문구를 보고 듣고 싶은 콘텐츠를 선택한 다음 근처 축음기 기계로 가 청진기 형태의 리시버를 귀에 끼고 동전을 넣은 다음 출력되는 오디오를 감상했다.

1890년대 10여년 동안 포노그래프 팔러의 인기는 바다 건너 유럽으로까지 전파되었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호화스러운 살롱에서 고급 의자에 앉아 오디오 실린더를 주문하여 오디오들을 감상하는 것이 파리지앙들의 호사 중 하나였다.

당시 포노그래프 팔러의 오디오 콘텐츠는 다양했다. 연설, 낭독 같은 음성 콘텐츠도 인기있었지만, 단연코 가장 인기가 있는 콘텐츠는 음악이었다. 

마치 전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포노그래프 팔러에서 오디오 콘텐츠를 듣고 있는 사람들. 출처=위키피디아
마치 전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포노그래프 팔러에서 오디오 콘텐츠를 듣고 있는 사람들. 출처=위키피디아

팝송과 가요가 4분 이내인 이유

축음기 시대의 첫 번째 스타는 조지 워싱턴 존슨이라는 흑인 아티스트였다. 버지니아의 노예로 태어났지만, 그의 주인은 노예였던 하인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덕분에 읽고 쓰기와 함께 음악 교육까지 받은 그는 노예 해방 이후 뉴욕으로 와 휘파람으로 연주하는 거리의 연주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최초의 축음기 스타라 할 수 있는 조지 W. 존슨의 1898년 촬영된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최초의 축음기 스타라 할 수 있는 조지 W. 존슨의 1898년 촬영된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1890년 존슨은 포노그래프 팔러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뉴욕 축음기 회사에 캐스팅되어 그의 휘파람 공연을 녹음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는 회당 20센트를 받고 4~5개의 축음기 앞에서 (당시에는 마스터를 만들고 이를 복제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이 담긴 콘텐츠는 포노그래프 팔러에서 가장 인기있는 콘텐츠가 되었고, 대략 2만 5000개에서 5만개정도 추산되는 흥행 열풍은 축음기 음악 시대를 열었다. 

최초의 축음기 스타가 흑인이었던 건 당시의 백인 중심의 음악 양식이 축음기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음악은 길게는 1시간까지 가는 교향곡에서 오페라까지 당시 기술력으로 축음기는 그렇게 긴 시간의 녹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포노그래프 팔러의 회전율도 문제였다. 너무 콘텐츠가 길면 회전율이 떨어지고 축음기 기계당 수익률도 떨어졌다. 3분에서 5분 정도 길이의 음악 양식을 찾던 축음기 콘텐츠 제작자들은 존슨 같은 흑인들의 음악이 그들이 원하는 ‘축음기 시대의 음악 양식’임을 깨달았다.

축음기 제작자들은 재즈의 독특한 양식인 ‘리프’ (재즈 연주에서 반복되는 짧고 간단한 프레이즈)를 중심으로 한 3~4분 정도의 짧은 곡들을 연주자에게 주문했고, 재즈 연주자들은 그 의뢰에 부응해 다양한 곡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계속 새로운 콘텐츠의 공급을 원하는 포노그래프 팔러 업주들의 요청에 의해 다양한 음악들이 지속적으로 녹음되었고, 이를 전문으로 하는 음반 회사들이 만들어졌다. 음악 녹음 산업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흑인들은 최상의 콘텐츠 생산자로 인정받았다. 그들의 음악이 즉흥 연주를 기반으로 하기에, 같은 연주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저렴한 가격에 많은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는 ‘음원 공장’이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원의 대부분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음악들이었기에, 재즈는 자연스럽게 축음기를 대표하는 음악 양식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흔히 재즈를 축음기가 만든 음악 양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세기 초반 초창기 재즈 녹음 장면. 출처=NOLA홈페이지 캡처
20세기 초반 초창기 재즈 녹음 장면. 출처=NOLA홈페이지 캡처

이후 축음기의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매체의 기록 시간도 늘어났지만 이 시기 정착된 이 양식은 그대로 이어져 갔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 대중음악은 1920년 Mamie Smith의 ‘Crazy Blues’는 6개월만에 1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밀리언 셀러’의 시초가 되며 음악 산업 정확히는 음반 산업이 음악 산업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후 악보 출판사와의 저작권 분쟁과 라디오 시대를 거쳐 팝의 시대로 이어지는 현대 음악산업의 계보로 거대 산업으로 성장해가지만 여전히 축음기 시대의 유산은 4분 내외의 ‘짧은 음악’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문동열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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