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연대기] ㊶ 재즈와 현대 대중음악의 탄생 (중)
상태바
[콘텐츠연대기] ㊶ 재즈와 현대 대중음악의 탄생 (중)
  •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 승인 2021.10.17 08: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동열 우송대 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미국의 루이지애나주는 1680년대 프랑스의 탐험가 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이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를 기리고자 명명한 지역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개척되다가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거치고 영국에 할양되었다. 이후 퐁텐블로 조약에 의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800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전쟁 보상으로 양도받으며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복잡한 과거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개척 시기부터 노예 제도를 운영했고, 이를 위해 지속적인 노예 수입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다. 노예는 식민지 사회를 구축하는 중요한 인적 구성이었다.

식민지 정부는 백인과 흑인과의 결혼이나 혼혈을 엄격히 규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 탄생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크레올’이라 불렀다. 지금도 일부 미국인들은 루이지애나를 ‘크레올 주’라 지칭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 크레올

19세기 초반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이면서 정식으로 미국의 주로 편입된 루이지애나주는 크레올들을 백인으로 인정했다. 흑인이 아니면 피부색이 약간 검더라도 백인으로 인정해주는 ‘이분법적 인종구분’에 따른 조치였다.

크레올들은 프랑스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등 다양한 이민자들의 혈통이 섞이며 미국의 주류인 앵글로 색슨 계통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크레올은 독특한 계층이었고, 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루이지애나 당시 주도(州都)이자 최대의 도시 뉴올리언즈는 그러한 크레올들이 만드는 독특한 문화가 샘솟는 곳이었다.

18세기 후반의 그림 ‘The Old Plantation’ 노예들이 밴조와 퍼커션에 맞춰 춤을 추는 그림을 묘사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18세기 후반의 그림 ‘The Old Plantation’ 노예들이 밴조와 퍼커션에 맞춰 춤을 추는 그림을 묘사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백인의 지위를 가진 크레올들이지만, 정통 백인들에 의한 차별이 없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핏줄에 흑인의 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차별하는 백인보다는 흑인과 어울리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노예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 교육도 받게 했고, 크레올들의 경제 수준도 중산층 이상의 수준이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중산계급에서 유행했듯 크레올들도 음악 같은 사회적 교양을 쌓았고, 음악적 소양을 갖춘 크레올들이 뉴올리언즈 곳곳에 있는 펍과 술집에서 연주를 하며 직업으로서의 연주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서 뉴올리언즈는 음악사에 있어 중요한 도시가 된다. 바로 재즈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크레올이 만든 재즈의 뿌리

크레올들의 음악적 소양과 그들과 어울리던 흑인 계층의 만남은 독특했다. 쿠바, 아이티에서 흘러 들어온 부두교 의식에서 파생된 쿠바-아이티 리듬과 아프리카에서 온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들의 리듬은 크레올들의 유럽적 음악 감성과 유럽의 악기들과 맞지 않았다.

유럽의 음악은 정형적이고 악보의 음표 하나에 연연하는 작곡자 중심의 음악이었지만, 노예들의 음악은 적절한 리듬을 연주자와 악기의 상태,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일종의 즉흥 연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 서로 다른 음악이 만나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게 된 건 마치 백인과 흑인이 만나 혼혈을 이룬 것과 같은 일이었다. 크레올들이 재즈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도 우연을 아닐 것이다. 뉴올리언즈의 쾌활하고 긍정적인 크레올들은 서로 다른 이들의 장점과 단점을 적당히 버무려 독특한 음악적 리듬과 세계를 만들었고 이 리듬이 재즈의 시작이 되었다.

뉴올리언즈의 스토리빌이라는 홍등가에는 다양한 크레올 연주자들이 연주자로서 지냈고, 밴드 형태로 함께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많이 늘게 되었다.

크레올들과 어울려 지내던 일부 흑인들은 그들에게서 악기를 배웠고, 노예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뉴올리언즈 곳곳에서 흑인 연주자를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재즈란 말 자체가 생긴 것이 1910년대의 일이기에 이 시기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재즈라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음악을 사랑했고, 교회에서 장례식에서 결혼식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퍼져 나갔다.

1905년 뉴올리언즈의 재즈 밴드. 사진=뉴올리언즈 뮤지엄 홈페이지 캡처
1905년 뉴올리언즈의 재즈 밴드. 사진=뉴올리언즈 뮤지엄 홈페이지 캡처

재즈, 축음기 기술과 만나다

당시의 재즈가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건 아니다. 뉴올리언즈의 백인들도 그 음악을 즐겼고, 많은 관광객과 유동 인구가 오고 가는 항구 도시의 특성 상 방문객들에 의해 재즈는 시카고나 뉴욕 같은 대도시로 점점 퍼지게 되었다.

1880년대 토머스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하며 축음기를 빠르게 보급시킬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작곡가나 피아니스트 같은 음악가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새로운 ‘녹음된 음악’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고 몇몇 연주자들의 음악이 녹음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초기 축음기의 오디오 콘텐츠 시장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말, 연설, 이야기, 낭독 등 콘텐츠 시장의 킬러 콘텐츠 없이 다양한 콘텐츠 형식이 범람했고 음악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형식이긴 했지만, 기록 매체가 가진 녹음 시간의 한계로 기존 유럽형 음악을 담기에는 기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 축음기 기술자들은 당시 유행이 번지기 시작하던 재즈에 주목했다. 악보가 정해져 있지 않은 재즈는 얼마든지 짧게 줄일 수 있었고, 너무 긴 음악은 사람들의 집중력을 흐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2~3분 내외의 짧은 멜로디 중심의 노래로 된 콘텐츠들을 기획했고, 재즈는 그들이 원하는 것들에 딱 맞는 양식이었다. 20세기 현대 대중음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계속)

문동열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