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㉕ 유성영화의 아버지 '샘 워너' – 무성 영화의 종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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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㉕ 유성영화의 아버지 '샘 워너' – 무성 영화의 종말 (중)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3.13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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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두려워 유성영화 제작 꺼렸던 영화사들
워너 브라더스, 공동창업자 샘 워너의 진취적 도전
불운의 샘 워너, 유성영화 시연 전날 사망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는 1926년 몇 편의 흥행작을 내고도 여전히 영세함을 벗어나지 못한 영화 스튜디오 중 하나였다.

당시 워너 브라더스는 사운을 건 새로운 모험에 도전한다. 바로 영화 영상에 동기화된 사운드를 도입하는 이른바 ‘유성 영화 (토키)’에 대한 과감한 시도 였다.  많은 이들은 워너 브라더스의 도전을 무모하다며 비웃었다. 

1920년대 후반 영화산업계 분위기는 워너 브라더스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줬다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유성영화 기술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지만 워너 브라더스 이외의 다른 영화사들이 현실에 안주하며 새로운 도전이 가져 올 사업적 위험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제작업체들은 지금 잘 하고 있는데 굳이 위험한 시도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워너 브라더스의 샘 워너 (Sam Warner)는 달랐다.

불운의 샘 워너가 만들어낸 '비타폰(VITAPHONE) 시대'

네 명의 워너 브라더스 창립자 중 한 명인 샘 워너는 형제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웨스턴 일렉트릭의 벨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영화에 사운드를 입히는 ‘사운드 온 디스크’라는 시스템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1926년 Vitaphone의 사운드 온 디스크 시연 장면 유성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926년 Vitaphone의 사운드 온 디스크 시연 장면 유성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는 곧 워너 형제의 장남이자 회사 대표였던 해리 워너에게 이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건의했으나 해리는 당시 적자 상태였던 재정 상황을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샘은 이미 1925년에 라디오 방송국까지 인수하며 ‘사운드’에 대한 많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소리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잘 알고 있었다.

샘은 포기하지 않고 해리를 벨 연구소를 데려가 사운드 온 디스크의 시연을 보여줬다. 이러한 샘의 노력에 결국 해리는 이 기술을 배경 음악을 입히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사운드 온 디스크의 도입에 동의하게 된다. 

1926년 4월 웨스턴 일렉트릭과 워너 브라더스는 파트너 쉽을 체결하고 Vitaphone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한다. 워너 브라더스는 Vitaphone을 통해 향후 5년 동안 1000편 이상의 단편 영화에서 이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유튜브에 공개한 Vitaphone 시연 영상, 사람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현장의 여러 소리들이 영상에 같이 동기화되어 있다. 역사적인 영상이라고 할 수 있겠
다. 영상출처=유튜브 워너 브라더스 채널.

하지만 샘은 단편보다는 장편 영화에서 이 시스템을 사용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Vitaphone의 시스템을 사용해 제작한 첫 영화는 1926년 제작된 영화 ‘돈 주앙 (Don Juan)’이었다. 비록 음성 대화가 지원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해리가 처음 이 시스템 사용을 허가한 의도대로 사상 처음 동기화 된 배경 음악이 사용되었다. 

뉴욕 필 하모닉이 연주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 돈 주앙의 음악은 지금은 사운드 트랙이라 불리는 동기화 된 배경 음악의 첫 등장이었다.  이 영화는 개봉 초기 영화 평론가로부터는 혹평을 받았으나 흥행 면에서는 대 성공을 거뒀다.

              영화 ‘돈 주앙’은 사운드 온 디스크 시스템을 사용한 첫 영화로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의 가교 역할을 한 작품이다 . 영상출처 =유튜브 워너브라더스 채널.

대중들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된 이 영화에 큰 흥미를 느꼈고, 적절하게 삽입 된 음악은 영화 몰입도를 높혀 주었다. 3달러나 되는 티켓 값에도 불구하고 티켓은 불티나게 팔렸고, 인기가 좋은 주말 공연에서는 서로 들어가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나 5달러나 되는 암표까지 등장했다.

뉴욕 워너 극장에서 돈 주앙을 보기 위해 몰려 든 관객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뉴욕 워너 극장에서 돈 주앙을 보기 위해 몰려 든 관객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유성 영화의 아버지 샘 워너의 유작이 된 ‘재즈 싱어’

돈 주앙의 성공은 흥행 면에서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지만 Vitaphone이라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한 제작비 증가를 생각하면 재무적으로는 손실에 가까웠다. 

성적표를 받아든 해리는 더더욱 유성 영화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다른 영화사들도 유성 영화 도입을 망설인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며 유성 영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판단했다.

해리의 태도에 실망한 샘은 회사를 떠나겠다고 해리를 위협했고 거기에 파라마운트의 공격적인 경영자인 아돌프 주커가 샘 워너에게 Vitaphone을 가져오는 조건으로 파라마운트의 수석 프로듀서 자리를 제안하면서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유성 영화의 선구자 샘 워너. 그의 모든 것을 걸었던 유성 영화의 시대를 하루 앞두고 불의의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유성 영화의 선구자 샘 워너. 그의 모든 것을 걸었던 유성 영화의 시대를 하루 앞두고 불의의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파라마운트를 포함한 당시 ‘빅5’ 영화사들이 워너 브라더스를 공격하면서 워너는 또 재정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Vitaphone 시스템의 독점권을 다른 영화사들과 나누는 조건으로 간신히 살아난다. 

고집불통이었던 해리도 어쩔 수 없이 샘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워너 형제들은 브로드웨이 연극 풍의 당시 유명한 뮤지컬 배우인 알 졸슨이 출연하는 영화 ‘재즈 싱어’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1925년 뉴욕의 벨 연구소를 드나드는 동안 여배우 리나 바스켓과 뜨거운 연애를 한 샘 워너는 리나와 결혼에 골인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다. 그리고 1927년 9월 동생인 잭 워너와 함께 재즈 싱어 제작의 마무리 작업에 열중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뇌에 생긴 감염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받던 중 혼수 상태에 빠진 샘은 1927년 10월 5일 사망한다. 그 날은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제작한 첫 유성 영화인 ‘재즈 싱어’의 시사회 전날이었다. 

유성 영화의 개척자 샘 워너가 결국 개봉을 보지 못하고 사망해 그의 유작이 돼버린 작품 ‘재즈 싱어’는 그야 말로 대 히트를 기록하며 워너 브라더스가 메이저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샘 워너의 도전은 영화 제작의 방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그 동안 소리 없는 영상만 보던 사람들은 드디어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와 배우 주변의 많은 소리들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는 혁명이었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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