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의 도보기행]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인천 배다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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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의 도보기행]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인천 배다리 마을'
  • 박경희 도보기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29 16:04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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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도보기행 칼럼니스트
박경희 도보기행 칼럼니스트

[박경희 도보기행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지나며,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배다리역사문화마을’을 다녀왔다. 지하철 1호선 서쪽 끝자락인 도원역에서 출발하여 '창영 철길변 갤러리'를 지나 배다리 마을로 들어갔다.

배다리 마을이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고랑이 있었다 한다. 이 갯고랑을 건너는 다리로 인해 생겼다는 설과 바닷물이 들어온 갯고랑에 배를 연결하여 그 위로 건너다녀서 배다리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인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를 포함한 지명 이름이 배다리 마을이다.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게 개항장 일대를 빼앗긴 조선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배다리 마을 주변에 들어선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과 피난민들이 몰려와 생계를 위해 온갖 물건을 내다 팔았던 곳으로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다. 그 당시 인천의 번화가라고 할 수가 있었다. 

창영초등학교 입구에는 배다리 마을의 중요한 거점을 알려주는 설명이 당시의 사진과 함께 부착되어 있어 마을의 근대 역사를 알 수 있었고,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천 최초의 초등학교였던 창영초등학교 전경.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인천 최초의 공립 초등학교였던 창영초등학교 전경.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19년 3.1운동 당시 인천에서 만세운동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류현진,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한국 미학의 기틀을 마련한 미술사학자 고유섭,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많은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순국한 강재구 소령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지금은 건물이 없어졌지만 아펜젤러 선교사 사택터 표식.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지금은 건물이 없어졌지만 아펜젤러 선교사 사택터 표식.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창영초등학교의 담장을 따라 배다리 마을의 골목길을 좀 더 깊숙하게 가보면 성인 한 사람 정도만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이 많았다.

골목을 나오니 작은 언덕에 단아하고 예쁜 건물 있었다.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인 건물로 근세 북유럽의 르네상스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이었다.

성인 한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성인 한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걷다가 작고 예쁜 붉은 벽돌 건물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이곳은 영화초등학교로 우리나라 최초 사립 초등학교라 한다. 들어가면서 바라보는 왼쪽 건물은 초등학교이고, 오른쪽 건물은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이다. 이 두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건물은 영화초등학교 본관동으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라는 설명이 있다.

배다리마을을 거닐다 쉽게 볼 수 있는 골목길 벽화.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배다리마을을 거닐다 쉽게 볼 수 있는 골목길 벽화.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본관동은 신식 교육 실시와 선교의 목적으로 설립된 건물이었다. 반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맞배지붕 구조의 건물로 재래식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954년 건물 입구 쪽의 증축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건물이라 한다. 1911년에 세워져 113년이 된 본관동은 한국 근대사와 함께하였고, 배다리 마을에서 옛것이 그대로 보존된 역사적 가치가 상당한 건물이다.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전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전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영화초등학교를 나와 '창영동 꿀꿀이죽' 거리로 갔다. 창영동의 옛 이름은 우각리로 우리말로 쇠뿔고개이다. 오르는 골목길이 소의 뿔처럼 휘어져 생긴 지명으로 19세기 말 이후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옛날 인천서 서울 갈 때 거치는 길목으로 경인 철도가 생기기 전 서울을 다니던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였다.

6.25전쟁 이후 창영동 뒷골목을 중심으로 통행하는 인구가 많은 사잇길에 꿀꿀이죽 거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여기서 막일꾼, 노동자, 피난민, 지게꾼 같은 사람들의 끼니 해결을 위해 이용되었다.

꿀꿀이죽 거리 이정표.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꿀꿀이죽 거리 이정표.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꿀꿀이죽 거리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꿀꿀이죽 거리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전쟁 이후 먹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으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꿀꿀이죽 거리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이 꿀꿀이 죽이 부대찌개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더 어려운 사람들은 옥수수죽이나 학교에서 나온 미군 원조 우유죽으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하니 우리 근대사의 슬픈 이야기다.

인천양조장 모습. 현재는 인천문화양조장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인천양조장 모습. 현재는 인천문화양조장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한 건물 앞에 재미있는 커다란 깡통 로봇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황해도 출신 상공인 최병두가 세운 ‘인천양조장’이었다. 최병두는 24세 때 인천에 정착하여 정미업을 하다가 1926년 여러 작은 막걸리 공장을 합병하여 배다리에 '인천양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7년부터 가공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막걸리인 '소성주'를 생산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막걸리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인 지하수가 예전 같지 않아, 1996년에 70년 동안 이어온 양조장은 가동이 중단되었다.

가동이 중단되어 완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곳을 도시 재생의 작은 모범사례로 만들고자, 2007년부터 스페이스 빔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이 공간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양조장이었던 구조와 시설, 흔적들을 살리고 남은 물건들을 모아 별도로 보관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배다리 지역 활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배다리 일대 철거된 물건을 모아둔 보물창고로서 배다리 마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공간이 되었다.

최근에는 건물 간판을 '인천문화양조장'으로 바꾸고, 배다리 생태공동체마을 만들기 프로그램과 배다리 전통주 학교 프로그램 등 주민 친화 및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한 역할을 해가고 있다는 설명이 되어있다.

헌책방거리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헌책방거리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헌책방 내부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헌책방 내부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배다리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헌책방거리가 있다. 배다리 마을 헌책방은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거리로 불렀다.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헌책방은 전성기 때는 40여 개에 달했으나, 현재 몇 개의 서점만 남아 헌책방거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도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서점과 기념품등 복합공간으로 운영하고있는 한 까페의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서점과 기념품등 복합공간으로 운영하고있는 한 까페의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해방 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기고 간 물건 중에는 책도 많았다고 한다. 이 책들이 고물로 쏟아져 나오면서 당시 배다리 근방에는 헌책방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알려져 최근에는 이곳 헌책방 거리가 더 유명해졌다.

여러 가지 벽화가 그려진 골목으로 들어가니 여인숙 간판이 있는 곳에 ‘빨래터카페’가 있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빨래방으로 착각하였다. 자세히 보니 카페였다. 명절 연휴라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갈 수는 없었다. 투명 유리창 안으로 아치형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다리 밑이 빨래터여서 그 모습을 살려 카페를 만들었는지 궁금하였다.

여인숙이었던 오래된 가옥을 개조 공사 하던 중에 빨래터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빨래터 모습을 살려 카페로 개조한 것이다. 여기를 들어오는 입구는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아치형 담장 위에 ‘복합공간 배다리 아트스데이 1930’이라는 간판이 있다. 카페가 있는 골목은 예전에 여인숙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생활에서 필수품이었던 성냥이 자취를 감췄는데도 전혀 불편하지는 않다. 어릴수록 성냥이란 단어조차도 모를 수도 있겠다. 현재 성냥을 사용하는 기회는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켤 때이다.  

성냥공장터에 자리잡은 인천성냥마을 박물관 전경.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성냥공장터에 자리잡은 인천성냥마을 박물관 전경.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한때는 집들이 선물로 각광을 받았고, 성냥갑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생활필수품으로 몇 통씩 사놓고 썼던 성냥을 만드는 전국 최대규모의 성냥공장이 배다리 마을에 있었다.

성냥마을박물관내 전시된 성냥갑 풀칠로 부업하던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성냥마을박물관내 전시된 성냥갑 풀칠로 부업하던 모습.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성냥마을박물관내 전시된 당시 인천에서 생산한 성냥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성냥마을박물관내 전시된 당시 인천에서 생산한 성냥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1883년 개항 이후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배다리에 모여들자, 조선인을 위한 학교와 시장, 고무와 간장, 술 등을 만드는 산업 시설이 들어서 번성하였다. 그중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냥공장이 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 공장 직공이 800명, 부업종사자가 2,800명에 달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각 가정에서는 빈 성냥갑을 받아다가 풀로 붙여서 말리는 부업으로 얼마씩 받아서 그걸로 반찬값 보태면서 살았다고 한다.

1917년 문을 연 배다리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은 세월의 변화에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마을을 위한 공동공간으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곳에서 배다리 성냥공장 역사와 성냥을 만드는 과정 등 성냥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알 수가 있다.

예전에 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풍경과 꿀꿀이죽 거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배다리 시장, 여러 공장의 모습 등 그 시대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진과 그 시절에 세워진 건물, 폐업한 자리에 주민과 함께하는 활동을 통하여 근대사의 모습을 간직한 배다리 마을을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었다. 

배다리마을에 전시돼 있는 1940년대 배다리시장 모습 사진.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배다리마을에 전시돼 있는 1940년대 배다리시장 모습 사진.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배다리마을 근현대사를 연대별로 사진으로 전시해 놓았다. 사진=박경희 칼럼니스트

배다리 마을은 현대적으로 개발하기 직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옛모습을 최대한 지켜낸 마을이다. 

마을 옆에 경인 철길이 있고, 많은 근대사를 간직한 곳으로 오랜 세월만큼이나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배다리 마을과 주변에 우뚝 솟은 고층아파트가 묘한 대조가 있는 곳으로 명절 연휴로 휴업이라 내부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었다. 

▶트레킹 코스 : 도원역~창영 철로변 갤러리~창영초등학교~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영화초등학교 본관동~창영동 꿀꿀이죽거리~인천양조장(현 인천문화양조장)~헌책방거리~빨래터카페

박경희 도보기행 칼럼니스트는 산에 오르고 계곡을 걷는 게 좋아 친구들과 함께 국내외로 등산과 트레킹을 다닌지 어느새 30여년이 지났다. 야생화가 너무 이쁘고 좋아 사진에 담는 일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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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2024-03-19 10:36:20
멋진 글 감사합니다. 가까운 곳에 좋은 곳이 있었군요...

푸르미 2024-03-03 19:52:20
인천이 가까이 있어도 우리나라 근대사랑 연관을 시키지 못하는 무지함이있었네요~ㅠ
따뜻한 봄에 나들이를 가봐야 겠네요.^^

철이 2024-03-02 21:38:14
좋은 글 감사합니다.

준이맘 2024-03-02 21:37:42
가까운곳에 좋은곳이 있는줄 몰랐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산이 2024-03-02 08:05:24
서울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코스가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