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의 세상보기] 흙길을...맨발로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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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의 세상보기] 흙길을...맨발로 걸어보세요
  • 나은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01 20:56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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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 칼럼니스트] 길 앞에 섰다. 운동화를 벗는다. 망설임 없이 양말도 훌렁 벗는다. 돌돌 만 양말을 운동화 안으로 집어넣는다. 양손에 운동화를 한 짝씩 들고 꼼지락꼼지락 발가락을 움직인다. 준비 완료. 맨발을 내밀어 흙을 딛는다.

엊그제 비가 내려서일까? 발바닥의 모양대로 보드랍게 감겨오는 말랑한 흙. 발가락 사이로 살며시 올라오는 흙의 감촉이 참 좋다. 푸석푸석하던 마음의 밭에 촉촉하게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다. 서늘하면서도 탄력 있는 지구의 피부와 껍질을 벗어버린 내가 만나는 시간이다. 

오른팔에 두르고 있던, 중세 기사의 갑옷처럼 육중한 깁스를 드디어 풀었다. 힘든 여름을 보냈다. 깁스를 한 건 한쪽 팔인데 마치 내 인생이 갇혀 버린 듯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이었다. “또야? 너 작년 이맘때 다리 수술했잖아. 제발 사지 관리 좀 잘해라.” 친구의 농담에 나도 웃긴 했지만 무척 속상했다. 아직 뼈 상태는 괜찮다고 했는데… 서두르고 덜렁대다 생긴 사고였다. 어쩌겠는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의 파편들을. 

왼손 하나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머리를 감을 수도 없고 청소기를 미는 거도 어설프고, 글씨를 쓸 수도 없었다. 오른손잡이라 숟가락질도 젓가락질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포크로 음식을 먹는데 그마저도 흘리기 일쑤였다. 불쑥 속에서 열불이 나다가 갑자기 서글퍼지곤 했다. 나이 들면서 이렇게 하나하나 허물어지는 거겠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자동차 타고 돌아다닐 수 없는 시간도 오겠지. 히말라야산맥 어디쯤 눈 쌓인 고산준령을 바라보며 트레킹을 해보고 싶다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나고 마는 거겠지…  

흙길을 맨발로 걷기위해 가지런히 벗어놓은 슬리퍼와 신발들.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흙길을 맨발로 걷기위해 가지런히 벗어놓은 슬리퍼. 고무신도 보인다.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은 팔의 족쇄를 푼 것만으로도 마음 가볍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어 여의도 샛강 길을 걷는다. 빗물이 고여 있던 자리는 흙이 말캉말캉했다. 앞서 간 누군가의 발바닥 모양이 선명히 찍혀 있다. 발이 살짝살짝 들어갔다 나왔다를 하는 것뿐인데 흙이 나를 받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품 넓은 땅이 내 육신의 무게도 마음의 무게도 받아주는 것 같다. 땅이, 흙이, 작은 생명체인 나를 위로한다. 마음속 응어리가 스르르 풀려 간다.  

아, 그래. 옛날에도 그랬었다. 추석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엄마 아버진 철둑 너머 밭에서 햇고구마를 캐셨다. 고구마 줄기를 걷어서 밭 가장자리에 쌓아 두고 그 위에 우리 4남매를 앉히셨다. “동생들 잘 챙겨라. 광수 흙 주워 먹지 않게 한눈팔지 말고.” 엄마 아버지는 저쪽 끝 고구마 두둑 끝에 앉아 호미로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바로 아래 남동생과 여동생은 고구마 잎을 뜯어 날리기도 하고 뭉쳐서 던지기도 하고, 줄기로는 채찍질하듯 흙바닥을 치며 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금세 싫증이 난 동생들은 어느새 뽀르르 밭으로 내려갔다. 겨우 걷기 시작한 막내도, 형 누나를 따라 고구마 줄기 더미에서 구르듯 내려갔다.  

아기들 흙장난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아기들 흙장난 모습. 사진=유튜브 캡처

막내 돌보는 건 언제나 맏이인 내 몫이었다. 행여 넘어질세라 나는 막내동생 뒤에서 두 팔을 겨드랑이에 끼고 허리를 굽혀 아장아장 함께 걸어 다녔다. 당연히 맨발. 포슬포슬한 흙이 발가락 사이로 올라왔다. 마음도 포슬한 흙처럼 부드러워졌다. 몇 발짝 걷다가 막내가 주저앉으면 나도 같이 주저앉았다. 동생은 손으로 흙을 잡아 누나에게 던졌다. 내가 깔깔 웃으면 동생도 따라서 까르르 웃었다. 나는 두 손에 흙을 가득 담아 막내의 작은 발에 뿌려 주었다. 어린 동생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신나 했다. 동생이 웃음을 터뜨리면 나도 또  덩달아 더 크게 웃었다. 고구마를 캐던 엄마 아버지도 우릴 쳐다보며 웃으셨다.  

놀다가 심심하면 손가락으로 흙을 헤집어 바알간 고구마를 후벼냈다. 그리곤 고구마 줄기에 흙을 쓱쓱 문지른 다음 앞니로 껍질을 벗겨냈다. 하얀 속살을 우적 베어 물면 연하고 풋풋한 햇고구마즙이 맛있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집으로 돌아올 땐 모두가 흙고물 범벅이었다. 여섯 켤레 신발은 모두 아버지 바지게로 올라가 있고 우리는 맨발로 흙길을 타박타박 걸어왔다. 엄마 등에서 잠든 막내동생의 조막만 한 발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뽀얗게 흙이 묻어 있던…. 

어쩌면 나 같은 촌아이들은 흙이 밀어 올리는 힘으로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달리기를 할 때도 넓은 운동장을 맨발로 뛰었다. 지금처럼 런닝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무신이나 투덕투덕한 운동화를 신고 뛰는 것보단 맨발이 훨씬 더 편했다. 신을 신으면 뛰다가 벗겨지기 일쑤였으니까. 비 오는 날엔 대나무 살로 만들어진 하늘색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에 갔다. 질퍽한 진흙 길을 가면 어차피 버릴 거라 고무신을 신었다. 물기 많은 곳을 잘못 디디면 고무신은 진흙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고 맨발만 훌떡 나와 진흙을 딛곤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때부터 고무신은 그냥 손에 든 채 우린 물 고인 웅덩이만 골라 맨발로 찰박찰박 밟으며 걸어갔다. 그렇게 물 장난을 하며 학교에 도착하면 수돗가에 발 씻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었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도 변했다. 도시는 모두 문명의 옷을 입었다. 길만이 아니라 땅이란 땅은 단단한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지구의 껍데기가 흙이라는 걸 잊고 살 만큼 문명의 두께는 두텁고 견고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을 위한 길보다 차들을 위한 단단하고 매끄러운 길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다. 속도는 곧 돈이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땅속으로 땅 위로 거미줄처럼 얽힌 길을 통해 차들은 인간과 짐을 쉼 없이 실어 나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은 모든 가치의 정점에 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은 경제성이 떨어지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존재는 쓸모없는 도구로 취급받는 씁쓸한 현실이다. 나도 그쪽으로 분류될 날이 머잖았다. 

아스팔트나 시멘트는 단호하다.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용케도 머리 내밀고 올라오는 풀포기 따위는 당장 제거해야 존재일 뿐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흙을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손에 흙이라도 묻으면 소스라치게 놀라 씻으러 뛰어가고, 하얀 운동화에 어쩌다 흙이 묻으면 당장 빨아달라고 난리다. 시골에서 하얀 운동화 신는 일은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골 마을 길도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로 덮여 간다고 한다. 자가용이나 트럭, 농업용 기계들이 오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아스팔트나 시멘트를 딛고 살면서 사람들 마음도 단단해져 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똑똑하고 분명한 사람들은 많은데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사람은 많지 않다. 남의 실수나 아픔을 두고 충고하는 사람은 많은데 공감하고 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편을 가르고 남을  배척하는 일에 핏대를 세우는 날선 이들이 수두룩하다. 시멘트 같은 사람보다 흙 같은 사람이 주변에 넘쳐났으면 좋겠다.  

여의도 샛갈 자연생태공원 흙길. 사진=나은주
여의도 샛갈 자연생태공원 흙길. 사진=나은주 칼럼니스트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맨발 걷기의 효능에 대해 다룬 이후 어싱(earthing)이 유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대지와 내가 만나는 것, 접지(接地)를 의미한다. 대지 표면에 존재하는 치유 에너지가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맨발 걷기가 대표적이다.

흙길을 맨발로 걸으면 경혈을 자극하여 통증이 사라지고, 잠을 잘 자게 되며 혈액 순환이 잘 되는 등의 효과가 크다고 한다. 방송은 안 봤지만 건강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오며 가며 들었던 얘기 들이다. 반드시 이런 효능을 기대하고 걷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콘크리트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싱은 콘크리트 세상에서 만나는 숨구멍처럼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타는 듯한 열기와 폭우를 견뎌낸 풀들과 그 사이로 빼꼼히 얼굴 내민 달개비꽃이 사랑스럽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분홍 꽃구름 같은 꼬리조팝나무꽃과 하양, 분홍, 연보라 무궁화꽃이 내 마음을 물들인다. 쑥부쟁이, 코스모스도 가을 숲을 환하게 밝힌다. 천천히 해찰하며 걷다 보면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워진다.  

흙은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고운 가루와 동식물이 죽어서 생긴 유기물이 합쳐진 물질이라 했던가. 내가 밟는 흙에는 몇십억 년 전에 융기한 지구의 속살과 아름다운 꽃들과 멸종된 동물의 뼈와 이승을 살다 간 사람들의 육신이 섞여 있을 것이다. 과거의 생명체들은 현재의 생명들을 살려내고 키우기 위해 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흙이 키워낸 식물과 동물을 먹고 살아온 나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고운 흙의 입자가 되어 다른 식물과 동물을 살려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흙길의 표정이 다양하다. 말랑한 길을 벗어나니 잘 다져진 차진 길이 나온다. 발바닥에 착착 감기는 길을 걷다 보니 또 자잘한 모랫길이 나타난다. 까실까실한 모래를 밟는 건 내 발바닥인데 뱃속이며 어깨까지 곰질곰질 간지럽다. 대지가 나를 간지럽힌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맨’으로의 내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의 ‘맨땅’을 만나는 시간.  

지금까지의 시간이 살아내기 위해 나를 감싸고 방어하며 살아온 날들이었다면 앞으로는 한 꺼풀씩 벗어던지고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노력의 시간일 것이다. 맨발로 대지를 걷듯 이제 사람을 대할 때도 순수한 ‘맨맘’으로 대할 일이다.  

환삼덩굴 잎들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펴서 힘내라 힘내라 손을 흔든다. 둥근잎나팔꽃 하트 잎들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사랑의 마음을 뿅뿅 날린다. 온통 내 편들이다. 설렘 가득한 가을 길이다. 

나은주 칼럼니스트는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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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2023-09-11 10:54:31
요즘 산에서 MTB를 타다보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엄청늘었던데, 건강과 추억 일거양득이네^^

한우리 2023-09-04 20:42:48
https://blog.naver.com/naeunjoo63/223200932912

https://blog.naver.com/naeunjoo63/223056643871

raplan22 2023-09-03 17:03:36
요즘 핫한 맨발걷기에 어릴 적 추억이 더해져 의미가 배가 되네요. 자연에 의지하며 흙과 더불어 맨발로 걷기. 저도 도전해봐야겠네요~

파란하늘 2023-09-03 14:55:53
말랑말랑한흙길, 환삼덩굴, 둥근잎 나팔꽃...
우리가 잊고 살았던 낱말들입니다~
새로운 세포가 살아나늘듯한 글을 읽으니 시골 옛집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정나도 2023-09-03 08:37:13
글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네요.
그 땐 그랬는데
지금은 흙을 어쩌다 보게 되네요.
더 자주 흙이랑 나무랑 자연을 봐야겠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