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추사가 30년간 고민한 글씨 ‘침계’, 보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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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추사가 30년간 고민한 글씨 ‘침계’, 보물 되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4.2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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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은 보물지정 55년만에 국보로 승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어려서부터 서예가 뛰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입춘첩을 써 붙여 놓았는데,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 글씨를 우연히 보았다. 재상은 그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노재상이 알아본 것이다.

친구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추사에게 자신의 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윤정현의 호는 ‘침계(梣溪)’였다. 친구 부탁을 받은 추사는 30년간 고민했다고 한다. ‘침’(梣)자가 한나라 예서에 없기 때문이었다. 추사는 고심 끝에 해서‧예서를 합한 서체로 써 주었다. 해서(楷書)는 예서에서 발달한 서체로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서체다.

‘침계’는 해서(楷書)와 예서의 필법을 혼합해서 쓴 것으로, 추사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성과 필법에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김정희의 학문‧예술‧인품을 엿볼 수 있다.

 

▲ 김정희의 침계(梣溪)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침계’를 비롯해 추사의 서예 3점을 보물로 지정했다.

▲ 김정희의 대팽고회(大烹高會) /문화재청 제공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추사의 또다른 작품은 ‘대팽고회’(大烹高會)인데, 추사가 세상을 뜬 해(1856년, 철종 7년)에 쓴 만년작(晩年作)이다. 두 폭으로 구성된 예서(隸書) 대련(對鍊)이다. 내용은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吳宗潛)의 「중추가연」(中秋家宴)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성대한 연회는 부부‧아들딸‧손자라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라는 글귀를 쓴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는 내용에 걸맞게 꾸밈이 없는 소박한 필치로 붓을 자유자재로 운용해 노(老) 서예가의 인생관(人生觀)과 예술관(藝術觀)이 응축된 만년의 대표작이다.

또 보물로 지정된 ‘차호호공’(且呼好共)은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라는 문장을 예서로 쓴 대련(對聯) 형식이다. 단정하고 예스러운 필치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정희의 학문이 예술과 결합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빠른 붓질로 속도감 있는 효과를 내는 등 운필(運筆)의 멋을 최대한 살려 김정희 서예의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 김정희 차호호공(且呼好共) /문화재청 제공

한편 문화재청은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 불리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국보로 지정했다.

국보 제323호로 지정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주도해 제작되었다.

거대한 돌미륵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미소는 영락없이 해탈의 세계다. 미륵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균형미도 잘 잡혀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은 석가에 이어 미래에 출현하는 부처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신앙이 현세를 구원하는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유행했다.

이 불상은 1963년도에 보물 218호로 지정된 후 55년 만에 국보로 승격되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높이가 18.12m에 달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글인 「용화회소(龍華會䟽)」와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등에 이 석불입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했으며,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의 솜씨를 빌려 탄생한 작품이다.

혜명(慧明)은 1025년(고려 현종 16)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제작했다고 알려진 승려로, 당시에는 저명한 장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석불입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 불상의 머리에 얹는 관)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며, 불상의 재료인 압도적인 크기의 화강암에서 느껴지는 육중함은 고려의 권위와 상징을 보여준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정제미와 이상미를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조각상으로,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독창성과 완전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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